제주 4.3과 연결되는 경험의 중첩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당사자성은 각자 다르다. 나는 여성이라는 당사자성을 가지지만,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고, 이주민으로서 한국에 살고 있지 않고, 가정폭력을 경험하지 않았다. 장애인으로서, 이주민으로서, 가정폭력피해자로서의 당사자성은 없는 셈이다. ‘당사자’는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일이나 사건에 직접 관계가 있거나 관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사회의 모든 사건과 사고와 문제의 당사자가 될 수 없다. 많은 부분 어떤 이슈의 당사자는 소수자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소수의 당사자를 제외하면 남은 우리는 당사자가 아니게 된다. 국어사전에서 당사자의 반의어는 ‘제삼자’이다.
내가 생각하는 연대는 손에 잡히는 것이다. 나의 일상 안에서 연결이 되어 있고, 그 연결 안에서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기도 하고, 연결되었다는 감각만으로 위로와 응원을 받기도 보내기도 한다. 내 삶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당사자, 그 당사자와 제삼자인 내가, 혹은 우리가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세상이 깨지거나 커져야 하는 일이니까. 제삼자의 연대는 시작이 어려운 법이다.
우리의 삶에서 내 마을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가족관계에서, 친구관계에서 일상을 통해 알게된 사람이 아닌 누군가와의 연결은 쉽지 않다. 제삼자로서 당사자와 연결이 되려면 극강의 공감 능력이 발휘되어야 하는데, 그 역지사지의 상상력을 동원한 공감능력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접촉과 관심이 전제가 된다. 그래서 내가 그 당사자를 자세히 보고, 나와 다른 것을 알고, 나와 같은 것도 알고, 나의 바운더리 안으로 인지하고, 계속 만나고. 하지만 누군가와 자연스럽게 접촉하여 들여다보는 것은 쉽지 않다. 보통은 부자연스럽게 조금의 불편함과 복잡성을 인지하면서 알게 된다. 그래서 어렵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당사자 존재들과 연결이 되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과거 역사 속 한 지점의 존재들과의 연결은 어떨까.
몇년 전을 생각해봐도 나에게 4.3은 5.18보다 귀에 덜 들리고, 4.16보다 손에 잡히지 않고, 6.25보다 더 오래된 국가폭력의 하나의 사례 정도로 다가왔었다. 그 때는 4.3이라는 사건과 시간 안의 인물이나 스토리나 삶이 보이지 않았다.
2023년 육아휴직을 하며 독서모임에 참여하여 책을 읽었다. 함께 읽었던 책 중 하나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였다. 읽는 동안 참 힘들었다. 우선 어려웠다. 그리고 괴롭고, 무서웠기도 했다. 소설 안에 4.3의 역사적 배경과 당시의 상황과 이후의 수습의 과정이 명확히 담기지는 않았지만, 그 시간을 살아온 사람의 모습을 주인공 인선의 어머니 ‘정심’을 보며 알 수 있었다.
“정심의 기억은 칼날처럼 선명하고, 그 선명함이 오히려 그녀를 매일 조금씩 베고 있었다… (중략) 그녀는 사라진 사람들을 대신해 살아가고 있었다. 말없이, 하루하루를 지켜내며”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중에서
2024년 12월,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에서 그동안 자신이 써온 장편소설들을 하나씩 이야기했다. 광주 5.18을 배경을 쓴 [소년이 온다]에 이어 제주 4.3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까지. 역사 속에 점점 희미해질 수 있는 아프고 슬픈 기억을 끄집어 올리는 그녀의 소설은 그 시대를 살아낸 세대들에 대한 위로가, 그 시대를 겪지 않은 세대들에게는 그 존재들(당사자들)과의 만남이 된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 중에서
계엄령과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절묘한 연결이 있던 2024년 연말, 나는 가족들과 오랜만에 제주 여행을 했다. 도착한 다음날 무안공항 사고가 있었다. 우리 가족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걸었다. 제주 중산간의 김영갑갤러리에 들렀다가 용눈이 오름에 올랐다.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제주 돌담으로 둘러싸인 작은 길이 보였다. 우리는 내려가 그 길을 가보기로 했다.
그 길의 마지막에는 다랑쉬굴이라는 곳이 있었다. 어딘지 모르고 도착한 곳었지만 잘 정리된 화산토 길이 보여 우린 잠시 내려 산책을 하기로 했다. 주차를 하고 들어서자 빨간 동백 문양이 보였다. 4.3 유적지를 표기하는 문양이었다. 다랑쉬 굴은 양쪽으로 구멍이 나 있는 작은 굴이었고, 4.3 시절 근방의 마을의 몇 가족이 이 안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굴이 발각이 되고, 군은 한쪽 구멍을 막고 반대쪽 구멍으로 불을 피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몰살하였다.
이 아름다운 곳이, 이 풀숲으로 둘러싸인 내가 서있는 이 돌 아래에서 일어났을 일에 [작별하지 않는다] 소설 내용과 겹치며 속이 아려왔다. 그 굴에 숨어있던 가족들 중에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그 시절 마을의 이웃들은 그 일이 있고 나서도 이곳을 차마 찾아오지 못했다고 했다. 마음속에 꾹꾹 눌러왔지 않았을까. 다랑쉬 굴 앞에는 고무신 한쌍이 놓인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 비석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여기에 인간이 있었다. 삶이 있었다. 우리는 죽은 자들. 죽었으나 죽지 않았다. 우리는 캄캄한 굴 속 연기에 갇혀 연기로 떠도는 자들. 사라지지 않는 자들이다. 우리는 다만 살기 위해 깊이 들었을 뿐. 마지막 숨이 막힐 때까지 서로를 놓지 않았다. 엄마는 한 줄기 숨을 아이에게 주었고, 연기의 소리가 인간에게 닿기를 기다렸다.
부디 우리를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우리의 그날이 당신들의 존엄이기를, 희망이기를, 평화이기를 바란다. 당신의 그 자리. 서럽도록 아름다운 다랑쉬의 명예를 지켜주길 바란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 없는 파도가 되었다. 당신들은 우리가 그토록 찾던 봄이다. 그대, 그러니 더 이상 슬퍼하지 말기를. 이것이 우리들의 전언이다”
제주 민예총, 다랑쉬굴 앞의 비석 내용 전문
우리 가족은 한참을 그곳에서 말없이 있었다. 그날 밤, 신랑과 나는 숙소에서 함께 한 방송사에서 방영하는 한강 작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함께 보았고,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일출을 보기 위해 찾은 광치기 해변에서도 우린 빨간 동백 문양을 보았다. 이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말도 안 되게 예쁜 이 해변에서도 많은 이들이 무참히 죽어갔고, [작별하지 않는다]의 그 장면처럼 검은 나무가 되어 파도에 쓸려가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이들의 이름도 해변 한편에 한 명 한 명 새겨졌다.
대통령 탄핵이 선고되는 2025년 4월 4일 하루 전, 4월 3일.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은 나의 친구와 글을 나누는 또 다른 친구들과 4.3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기 위해 종로의 한 극장을 찾았다. 이 영화는 수많은 사람들이 4.3에 대한 이야기를 알리는 이 영화를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십시일반 마음과 시간과 돈을 모아 전국에서 100개가 넘는 상영관에서 2025년 4월 3일 저녁 7시 30분 한 날 한 시에 동시 상영을 하는 것이었다. 영화 제목은 [목소리들]이었다.
화면 안에는 4.3을 살아낸 할머니들이 나오셨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지만, 그때의 가족을 잃고, 헤어지고, 모두가 두려움에 떨고, 눈앞에서 누군가 죽음을 당하고, 자신이 목격한 것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그렇게 6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낸 할머니들. 그리고 그분들의 옆에서 지지하고 있는 자식과 제주의 젊은 세대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작별하지 않는다]의 정심을, 다랑쉬굴에서 아이에게 입을 대어 숨을 불어넣어주던 엄마를 나는 살아있는 생존자들의 얼굴로 마주할 수 있었다. 그분들은 말로, 눈물로, 한숨으로, 구부정한 자세로 걸어가는 뒷모습으로, 그때를 생각만 해도 두려움에 이빨이 딱딱 부딪히는 소리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당사자여서 할 수 있는 말, 눈물, 뒷모습, 소리였다.
제삼자인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마음에 새긴다. '누군가'는 글을 써서 알리고, '누군가'는 영화로 담아내고, '누군가'는 연구하여 논문을 발표하고, '누군가'는 그들 곁에서 싸우고, '누군가'는 알리고 싸우는 사람들을 돕고, '누군가'는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누군가'는 내 옆의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 제삼자들은 그렇게 '누군가'들을 통해 당사자들과 연결이 되는 것 같다.
이렇게 '누군가'가 되는 존재들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4.3을 겪고 피해를 입고 고통속에 살아온 생존당사자들과 제삼자인 나 사이에는 한강 작가, 제주 유적지, 영화 [목소리들]이라는 '누군가'가 있었다. 이렇듯 나에게 아직 닿지 못한 당사자 존재와의 연결을 만들어주는 '누군가'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느 흐름에 있어서는 나도 '누군가'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