듄을 보면 신화적 느낌의 알렉산드로를 더 잘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역사적 알렉산드로스를 보기 때문에 그의 내면과 정신세계가 잘 다가오지 않는다. 듄은 바로 그런 신화적인 부분을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여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신의 영역에 입성하여 마침내 영웅이 되는 그런 서사. 신의 영역이 인간에게 도달하는 그런 이야기. 신은 인간에게 도달하려고 영웅이 되는 것. 그렇지 않다면 고통은 불필요하고 인간의 몰락은 무의미 해지는 것. 인간의 몰락이 무의미해질 때 이미 의미가 발생하고 있다. 듄의 세계관은 어떤 것과 어떤 것이 맞닿는 순간이 바로 파괴의 순간이다. 할아버지의 존재를 파악하는 순간 할아버지를 죽여야 하는 것.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버무려져 있다. 모든 신화에 이러한 비극이 버무려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이야기 싹을 잉태하지 못한 것과 같다.
알렉산드로스, 그러니까 영웅 이야기는 이렇게 영화로 공간을 창조하여 세계에 대해 지각하는 것이 훨씬 더 머릿속 활성화에 기여하는 것 같다. 알렉산드로스에게 헌정하는 영화라는 생각을 했다. 제우스와 디오니소스의 총체적 결합으로 시나리오가 구성된 듯하다. 그리스 신화의 새 버전. 또 하나의 가상의 공간을 창조한 셈이다. 세계관 창조다. 그 정점에 폴 아트레이데스가 있는 것. 마치 알렉산드로처럼. 이집트의 파라오가 된 알렉산드로스와 사막 부족민의 신화(주입된 신화)를 현실에서 구현시키는 폴과 서로 입장이 다를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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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의 세계관을 그대로 외계의 어느 행성으로 옮겼다. 이를테면 '듄'의 모래사막은 알렉산드로스가 이집트 사막으로 떠나서 무엇인가를 증명하려 했던 사례와 같고, 또한 중동지역을 원정했던 무대와 같다. 그리고 이 지역은 간다라 문화가 만들어진 곳이며, 대승불교문화가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듄의 세계관은 그리스 문명과 사막 문명이 만나는 것을 의미하며, 하코넨을 죽인 것은 알렉산드로스가 기존 권력을 죽인 것을 의미하며, 황제를 물리친 것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역사적 사례를 신화적 세계관으로 바꾼 것이다. 그것은 관점의 확장이다. 종교의 탄생과 신의 탄생을 영화에 삽입하면 그대로 신화적 세계관이 형성된다.
종교의 탄생은 집단과 관계가 있다. 즉 미분화되지 않은 집단의 무의식이 바로 종교다. 이것이 서로를 묶고 있기에 어떤 종교는 태동한다. 그리고 메시아사상은 바로종교 지도자를 갈망하는 마음을 건드려 주는 것이다. 핵이 만들어지면 눈덩이처럼 커진다. 그리고 이내 디오니소스의 재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징조들은 그때 퍼즐처럼 짜 맞추어진다. 왜냐하면 그때 그가 그 환경에 내던져져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 누군가가 내던져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개인적 역량과 자질로 양상은 달라진다. 선하고 악하고의 어떤 방향성은 그것에 의해 결정된다. 왜냐하면 판단은 결국 최종적으로 개인이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세계관 확장은 곧 작가의 관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화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작가의 관점으로 올라서야 한다. 작가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 작가는 어디서 영감을 받고 모티브를 뽑아냈을까. 뻔하지 않은가? 그리스 신화와 그리고 영웅, 황제와 거대한 영토와 봉건 귀족들, 억압과 탄압과 원한과 복수, 종교의 탄생 시점들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무엇인가가 축적되면 어떤 것은 반드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때가 있다. 다만 그것이 아직 충분하지 않으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모를 뿐. 모든 것은 그렇게 생성되고 또한 무너진다. 산이 높으면 계곡은 깊다. 그 낙차의 반동에 의해 생성과 하강은 반복된다.
작가가 무엇을 어떻게 뒤섞여서 새롭게 조립했는가가 영화의 묘미이다. 우리는 그것에서 익숙한 것들을 본다. 그런데 낯설다면 그것은 창작되었기 때문이다. 재조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유사한 것이지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유사한 것을 만들지 똑같은 것을 만들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