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보관한 케냐 홍차를 시음하다
이 차는 또 얼마나 단지 안에서 그대로 있었을까. 늘 마시는 차에만 손이 가니, 문득 같은 차만을 마시는 것은 무미하다는 생각을 한다. 차 편식은 오히려 차맛에 식상함을 초래한다. 차도 여러 차를 번갈아 마실 때 각 차의 맛과 향을 더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것 같다.
잊어버리고 방치된 차를 접하면 마치 보물단지를 여는 것처럼 어떤 흥분감이 같이 찾아온다. 비록 그 차맛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별맛이 느껴지지 않은 차일지라도 펼쳐 보일 그 순간에는 그런 감정이 함께 한다.
한입에 털어 먹는 가루약을 싸는 크기의 종이처럼, 그 정도의 크기의 한지에 약을 싸듯이 싸서 보관해 놓은 소분된 차들. 먹다 남은 차들이거나 나눔 한 차들을 그렇게 싸서 작은 상자 안에 모아 놓았던 것일 것이다. 이런 차들을 맛볼 때는 보통 한 번 우릴 정도의 분량이어서 솔직히 크게 와닿지는 않는다. 차는 텀을 두어 몇 차례 우려 마실 때 그 차의 본 맛이 신체에서 감각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____
오늘은 항상 이리 제쳐지고 저리 제쳐지다가 괜히 시간을 오래 숙성한 홍차 봉지를 개봉하였다. 금박 봉투 안에 담긴 "케냐 홍차"였다.
이 홍차는 밀봉된 상태로 있기 때문에 굳이 마시지 않을 거면 개봉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꾸 미뤄져서 어느덧 가지고 있는 시간만 십여 년(더 되었는지도)이 된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차는 마시는 데 항상 제외되었던 것이다. 케냐 홍차에 대한 내 선호도의 우선순위가 늘 밀렸기 때문일 것이고, 케냐 홍차가 내 입맛을 유혹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케냐 홍차를 개봉하여 예열한 개완에 넣고 1분 정도 기다렸다가 뚜껑을 열고 향을 맡아보았다. 향은 강렬하지만 역하지 않았다. 마른차 상태는 차엽을 썰어 놓은 형태이지만 그렇다고 파쇄적인 형태는 아니다. 홍차에서 이 정도 온전한 엽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거의 잎차에 가까운 차라고 보아야 한다.
케냐 홍차는 대부분 CTC 기계 방식으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CTC 방식은 crush(분쇄), tear(작은 조각), curl(동글동글하게 휘말다)의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이 방식은 찻잎을 부수어 작은 조각 상태로 만든 후 기계로 돌돌 휘말아서 모양을 만든다(성형).
아마도 이 과정, 잎과 줄기를 부수고 찢기는 과정에서 산화 발효가 촉진되어 색이 갈변하면서 향이 풍부해지는 것 같다. 이 과정이 전통 제다법에서의 '비비기' 과정에 해당될 것이다.
보통 CTC기계 과정을 거치면 홍차 티백을 만들거나 아니면 그 상태 그대로 비닐봉지나 알루미늄 통에 담아서 포장된다. 차스푼으로 떠서 주전자에 넣고 물을 붓고 팔팔 끓여 마시거나 짜이를 만들거나 한다.
CTC 방식에서 차 모양을 돌돌 말아서 구슬처럼 만드는 기계 성형 방식은 중국의 우롱차 성형기법에서 응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이런 모양은 우롱차 계열의 청차(우롱, 철관음 등등)의 마른차 형태이다.
다만 CTC 방식과의 차이는 우롱차 계열의 차는 모두 온전한 잎차 형태이지만 CTC 홍차는 잘게 파쇄된 잎을 한데 뭉쳐서 작은 알갱이 형태로 만든 차이다.
우롱차 계열의 차는 주로 다기에 우려 마시고, CTC 방식의 차는 티백 형태로 만들어 우려 마시거나 또는 주전자에서 끓인 후 걸러 마시거나 아니면 거름망이 안에 있는 찻주전자에 넣은 후 우려 마신다.
____
오늘 개봉한 케냐 홍차는 잎을 자른 흔적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잘게 잘린 것은 아니다. 이 정도면 잎차로 보아도 될 듯싶다. 당연히 개완에 우려 마셔도 불편하지 않았다.
이 차는 일반적인 인도와 유럽 홍차들 포장과는 다르다. 우리나라 발효차 포장처럼 그렇게 금박 알루미늄 봉지에 담겨 있다. 상표가 붙어 있긴 하지만 지워져서 흐릿하여 알아볼 수가 없다. 다만 '케냐 티'라고만 쓰여 있다.
그러므로 이런 형태의 포장 방식은 케냐 차를 가져와서 따로 봉투에 담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니 유명하거나 큰 차 회사 홍차는 아닌 것이다. 아마도 중국에서 누군가가 케냐 홍차를 수입해서 그 자신의 브랜드 이름의 상표를 달고 케냐 홍차를 판매한 것일 것이다. 아니면 한국 사람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케냐 홍차는 개인 브랜드 차라고 생각된다.
어쩌면 누군가가 케냐에서 전통 홍차 제다방식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암만 봐도 이 홍차는 CTC 방식은 아닌 것 같기 때문에 그렇다. 아니면 찻잎을 자를 때 한 두 번 정도만 자르고 기계로 비볐을 수도 있다.
이 차는 두 번 시음을 하였다. 첫 번째 마셔 보고는 "홍차네" 했다. 마시는 도중에 "목넘김도 좋고 바디감도 좋고 향도 역하지 않네"했다. 내포성도 거의 서른 번 정도로 뛰어났다.
두 번째 시음에서는 "흠, 이 차는 정산소종 맛과 향이네"했다. 두 번 시음 후에야 이 차에 대해서 리뷰를 써야지 했다. 가장 근접한 맛과 향을 찾자면 그러했다. 탕색은 본래부터 그런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지나다 보니 숙성되어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짙은 홍빛은 맑고 깊어 보인다.
케냐 홍차가 그동안 나에게 의문의 1패를 당하고 있었다. 안 마시고 방치된 차들, 마시다가 조금씩 남아서 내팽개쳐진 차들을 어떻게든 다 마셔 치우자라는 일념으로 하나씩 다시 살펴보는 과정에서 나는 이런 뜻밖의 수확을 얻게 되었다.
다른 케냐 홍차들은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이 홍차는 밀봉된 상태로 오래 있다 보니 안에서 숙성된 것 같다. 맛이나 향도 순연해졌고 탕색도 어여쁘다. 내포성도 뛰어나다. 케냐 홍차를 다시 보게 된 시간이다. 아프리카 고원지대에 차밭이 있다고 한다. 한 번도 앞으로도 가볼 기회가 거의 없을지도 모르는 케냐에서 생산된 홍차를 이렇게 마시고 있으니, 영화적 영상의 아프리카 풍경이 갑자기 머릿속에 선연해진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케냐적 풍경이.
1차 시음
______
2차 시음
_______
Tea leaf rolling machine, Munnar Tea Museum in Kerala
찻잎 롤링 머신, 케랄라주 문나르 티 박물관 <출처 : 위키피디아>
Black tea produced using the CTC method
CTC 법을 이용하여 생산된 홍차
아삼지역 홍차나 케냐 홍차 및 스리랑카 홍차는 보통 잎을 따로 선별 후, 등급을 만들고, 다시 잎을 블랜딩 하거나 하여 맛을 균일하게 만든다. 고급 입차용의 차는 잎을 굳이 선별하지는 않는 듯. 우전이나 세작 등급은 그대로 차를 만들어도 맛의 변동이 크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등급이란 것은 생산자나 소비자의 편의를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엄밀하게는 생산자의 입장에서의 규격성 때문이다. 생산자나 또는 조합에서 등급체계를 정할 때 그것은 어느 정도는 이익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품질의 고급화라는 상품성도 포함된다. 물론 소비자도 이런 등급 표시 기호체계를 알고 있다면 훨씬 차를 구입하는 데 유용하고 편리하다. 왜냐하면 이미 정해진 형태에서 유통되는 차들이므로 모르면 그 자신이 일단 불편해진다. 그렇다고 개인이 맘대로 바꾸거나 폐지할 수도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복잡해 보이는 기호체계를 공부하는 것일 것이다.
반면, 한국·중국·대만은 입차를 주로 만들기 때문에 위의 사진에서 줄기에 표시된 절단 선처럼, 그렇게 차등 지어 등급이 나뉜다. 저 사진은 편의상의 등급이 그렇게 나뉜다는 표식일 뿐이다.
찻잎은 계절에서 절기마다 잎 나오는 속도나 크기가 변화한다. 계절 안에서 절기에 맞춰서 찻잎을 채취하므로 그 절기에 채취한 찻잎이 곧 하나의 등급이 된다.
물론 중국에서는 각종 차를 만들 때 각 차마다 새로운 등급체계를 만들어 적용하기도 한다. 절기를 더 세분화하여 등급 체계를 늘리거나, 찻잎을 선별하여 더 고급차를 만들어 등급을 추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차의 등급은 기본이므로 이것을 염두에 두고 다른 차들에도 적용하면 대략 찻잎의 등급 적용에 대한 이해를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다.
차나무 식생에서 온도가 맞지 않은 지역은 고도가 높은 곳이라서 차나무 자생이나 재배에 적합한 온도가 형성된 것일 거다.
차나무 산지 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