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되돌아 올 기억에 양보하며 감상하다

마이 생일 자축, 수브니르와 다석지

by 아란도


어느덧 또 생일이 왔다

나는 나의 시간을 감상하였다

지금 내 다탁은 갤러리다


텃밭정원 이름을 새로이 작업했다

작년과는 다르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수브니어, 수브니르 모두 같은 의미이다

편의상 수브니르 발음으로 했다


순수기억, 되돌아오는 기억,

삶의 모든 순간은

이 되돌아올 기억을 보증하며

진행된다


무엇이 되돌아올 것인가?

그것은 각자의 행위만이 안다

이 순간이 창의적인 순간이기를...

휘도는 와인처럼

우리는 매 순간 늙어 가고

매 순간 젊어진다


맛 좋은 와인이 되기까지

맛 좋은 차가 되기까지....처럼

부단히, 새로워진다


웃으니까

웃어지는 것처럼

삶도 그렇게 웃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은 지금이 끝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매 순간도 그렇게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




____


현재에서 우리는 대화를 나눴다.

항상 재화는 한계가 있고 그 안에서의 재분배의 문제가 있다.


내가 말했다.

나의 문제인식은 거기서부터라고.

어떤 공간이든, 모임이든, 그 무엇이든 그 안에서 통용되든 재화든 한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가 플러스되어야만 그 통용되든 재화 범위 내에서의 풍성함을 이룰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내가 고민하고 실행한 것은 바로 그 지점에서의 나의 마이너스다. 즉 창의다.

나의 창의가 마이너스될 때 그 어느 공간은 플러스된다. 그 과정이 진행될 때 인간의 삶은 풍요로워고 아름다워진다.

인간의 창의만이 세상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든다.

창의가 어딘가에서 솟구칠 때 세상은 이전과는 다른 세상으로 방향을 잡는다.

그와 나는 그 부분에서 나름대로 쿵짝이라는 손뼉이 마주쳤다.

오늘은 마이 생일에, 그는 그의 얘기로 나의 이야기를 하고 나는 나의 이야기로 그의 이야기를 한다.

우리 세상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오늘도 지구는 돌고 우리는 우리의 창작으로 하루를 풍요롭게 잠재웠다.


인간의 창의가 얼마나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그 무수한 시도는 여전히 저 먼 등대처럼 불을 밝히고 있다.

너무나 단순한 이야기, 다만 창의를 지속하고 이어가는 과정만이 고단한 밤고동소리 같은 것.

(나도 내 생일 외식하고 싶었다. 내가 내 생일상 차리고 사진 찍고 이러는 것 말고 차려준 것 먹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본다면 아마도 전혀 다른 글이 나왔을 것이다.


글과 사진을 남기는 이 작업 역시, 나에게는 마이너스 작업일 것이다. 그런데 어디선가는 또 플러 된다.

내일이면, '수브니르'와 '다석지'는 햇볕과 바람과 비와 사투를 벌일 텃밭으로 거야 한다.

그냥, 이렇게 나 혼자 타탁에서 감상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내 안에서 꼼지락거린다.

바깥에서 저 두 나의 작품은 햇볕과 바람에 해질 것이다. 늦가을이면 너덜너덜해져서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탁 갤러리를 떠나 나의 텃밭 갤러리에 전시되어야 한다.

그러자고 일주일간 틈틈이 작업했기 때문이다.

이름 부여하고픈, 의미를 주고픈 나의 마음 때문이다.


순수기억이 무엇인지 이쯤 되면 모두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는 나에게 기억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들에도 기억이 될 것이다.

되돌아오는 기억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 자신에게 온다.

그것은 한 장의 사진처럼, 스틸 컷처럼, 그 자신을 감싼다.

어느 순간에, 이 순간이 중첩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삶의 순간이다.

그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순수기억에 대한 무시와 오해로 더 이상 곡해하지 않아야 한다.

나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반복되는 패턴을 발견하여 이미 의도가 들어가 있다.

예술이라고 그러지 않을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하여도 되돌아오는 기억은 부지불식간에 오고, 비의지의 순간에 온다.

의지와 무의지에서,

무의지에서 의지로 나아가는 순간을 발견하게 되리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