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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비 Mar 13. 2022

[서평]이야기에서 ‘운명’을 다룰 때

베르나르베르베르의 <심판>  written by 이담

베르나르 베르베르 <심판>



 베르나르베르베르의 희곡 「심판」은 한국의 웹툰 <신과 함께>라는 작품처럼 죽은 사람의 삶의 무게를 판단하는 법정 사후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사후세계의 법정에서 아나톨은 자신의 변호인 카롤린과 공소를 제기한 베르트랑의 법정다툼 끝에 유죄를 받게 된다. 유죄 판결의 가장 큰 근거는 ‘주어진 섭리에 따르지 못한 삶’이라고 재판관 가브리엘은 명시한다. 인간의 삶은 25프로의 카르마와 25프로의 유전, 나머지 50프로의 자유의지로 만들어지는데, 아나톨은 이 카르마와 유전에 따르지 않은 삶, 즉 정해진 운명에 따라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소포클레스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 

 

 고대 그리스 신화부터 현대까지 수많은 작품들이 신이 준 인간의 운명과 자유의지의 대립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의 대다수는 신탁 혹은 신의 대리자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 인간이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하여 던지는 메시지들은 신이 준 운명을 인간은 자유의지로 거스를 수 있는가, 운명은 어떤 것인가, 또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아름다움에 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야기 속 인간은 유한한 자신의 생에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한계에 부딪힌다.      



가벼운 유죄판결의 근거



 그렇기에 이 작품의 가장 큰 괴리는 바로 이 유죄 판결의 근거 그 자체에 있다. 이 극은 다른 운명을 다룬 작품들과 달리 주인공이 죽고 나서야 운명에 순응한 삶을 살았는지 아니었는지를 따지기 때문이다. 삶을 이타적이고 도덕적인 잣대에 두고 평가하지 않고 정해진 운명대로 살았는지에 초점을 두고 평가한다. 그 정해진 삶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아나톨의 삶은 정해진 연인이 있었고, 배우로 성공해야 했다. 하지만 아나톨은 판사가 되었고, 원나잇으로 만난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의 삶에 대한 유죄 판결은 독자에게 그 정해진 운명의 무거움이라던지, 자유의지의 긍정이라던지 어떠한 중요한 것도 담고 있지 않다. 그냥 정해진 길을 ‘벗어났다’가 큰 잘못인 셈이다.      


 게다가 이미 인간의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요소의 반이 자유의지라고 설정해 두었다면, 자유의지를 가지고 운명을 거스른 아나톨은 왜 유죄인가. 그리고 고작 그 중요한 운명을 알려주는 지표가 인간의 욕망, 직감, 꿈과 같은 모호한 것들이라는 점에서 운명의 중요도는 현저히 가벼워진다. ‘이야기’에서는 적어도 그것이 내 운명이라고 깨달을 만한 계기들이 있어야 한다. 물론 실제의 삶에선 어떤 보이지 않는 욕망, 직감이 강하게 느껴질 때 그것을 운명이라고 단정지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과 직감이 중요한 역할을 할 때는 인물이 ‘어떤 삶을 삶아가는가’에 대해 다룰 때이고, 이 작품은 죽은 인간이 살았던 ‘삶’을 판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삶이 어떤 무게의 운명을 가졌는지, 그래서 그렇게 살지 않았을 때 왜 유죄가 되는지 에 대한 설득이 있어야 한다.



이야기에서의 운명



 하지만 이 작품의 운명은 가볍기 그지없다. 가브리엘은 고통의 강도가 클수록 가치가 있다고 말하며 견딜 수 있을만큼의 적당한 패널티를 조합하여 적당한 ‘운명’을 만들어낸다. 알코올 중독자의 부모, 가난한 나라, 질병, 열악한 직업들의 강도를 고려하여 적당히 가미한다. 어떠한 이유도 없이 단편적으로 고통을 재고 설계한 삶을 그대로 살고 죽기만 하면 ‘삶의 형벌’을 피할 수 있다니. 삶의 고통을 자신이 선택했다는 점에서 삶을 형벌이라 부르는 이 작품의 생각에 동의하기 어렵다.      


 적어도 판결받아야 할 삶이라면 이 이야기에서 운명은 우리에게 바꿀 수 없는 거대한 힘으로 묘사되어야 한다. 그리고 운명은 항상 그렇게 그려져 왔다. 많은 삶들이 그 결말이 비극적인 것을 아는데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삶들은 전쟁, 폭력의 대물림, 인연 등으로 다양하다. 주어진 선택권의 바깥을 고르고 싶지만 그러한 기회들이 쉽게 오지 않는다. 그러한 좌절과 슬픔의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많고 이유를 찾아 탓할 길도 없어 인간은 신을 찾았고, 이 비극적 삶을 신이 정해준 삶, 운명이라 불러왔다.



방향을 잃은 결말



 그리고 작품은 전반 내내 왜 그의 삶이 유죄인지에 대한 내용으로 전개되다 갑자기 아나톨은 다시 태어나기 직전 판결에 항소하고, 재판관이 되길 선택한다. 대신 재판관이었던 가브리엘이 그 ‘삶’을 살아가기로 한 결말로 끝이 난다. 

 이 결말은 갑자기 운명에 대한 주제를 삶이 어떤 것인지로 방향을 급하게 틀어버린다. 아나톨은 고통으로 가득찬 삶을 다시 살고 싶지 않아하고 가브리엘은 그 모든 고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인간의 육체를 그리워한다. 각 인물들은 자신의 삶을 선택했지만 독자들은 갑자기 이 작품의 길의 방향을 놓쳐버리고 만다.   


    

 좋은 작품들은 우리에게 단순한 결론을 내리게 하지 못한다. 그만큼 우리의 삶은 딜레마로 이뤄져있기 때문이다. 그 딜레마 속에 갇힌 우리는 각자의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작품도 독자를 딜레마에 가두긴한다. 하지만 그 딜레마가 얄팍하기 그지없다. 운명대로 살지 못했다고 벌을 받는 일부터 붕 뜬 이 작품이 던지는 삶은 불행인가, 축복인가에 대한 질문은 마지막에 날리듯 우리에게 던져진다. 삶의 긍정, 부정 여부를 따지기 위해서는 그 삶이, 운명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느냐에 대한 고민이 담겨져 있어야 하지만 그런 것들이 부재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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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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