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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빠들의 쇠퇴에 관하여.

'빠순이' 15년 차의 요즘.

by 아트인사이트


131.jpg Photo by David von Diemar on Unsplash

흔히 말하는 ‘빠순이’ 경력 대략 15년 차.

빠순이란 단어에 담긴 비하 의도를 싫어하지만, 얼마나 열혈한 팬 생활을 했느냐에 대한 보편적이고 간단한 지표로는 저것만큼 직관적인 표현이 없는 듯하다. 내 모든 시간과 마음과 돈을 바쳐 좋아했노라고, 그 열정을 수치화할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없으니 그냥 나 빠순이요~ 하고 말아버리는 거다. 물론 내가 사생활에 집착하며 스토킹하거나 라이벌을 욕하는 ‘그’ 사전적 단어의 빠순이는 아니지만 말이다.


케이팝 아이돌 붐이 일고, 인터넷 중심 팬 문화가 절정에 이르던 2000년대 초반부터 누군가의 팬이 되길 자청했다. 사실 스스로 선택 했다기 보단, 그쪽이 먼저 나를 ‘덕통사고’ 시켰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한때 2세대 아이돌의 주축이었고, 네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소속사의 간판이었으며, 한류 진출까지 성공적으로 이뤘던 ‘어떤’ 아이돌의 팬이라는 게 나의 오랜 정체성 중 하나이다.


다른 아이돌을 좋아했다면 더 편했을 텐데,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춤과 노래를 더 잘해서 어디 내놔도 안 부끄러울 실력을 가졌다던가, 그래서 여전히 남들에게 인정받는다거나, 돈 많은 소속사의 푸시를 받아 여전히 방송에 잘 나오고 있다거나 하는. 울오빠들도 그런 아이돌이면 더 좋았을 텐데, 부끄럽게도 현실은 한 멤버의 대형사고와 그 외 자잘한 잡음들로 벌써 오래 전 ‘잊혀진’ 아이돌이 됐을 뿐이다.



20220305191109_ifugfaxu.jpg Photo by Kevin Schmid on Unsplash

누구보다 온전히 내 세상을 차지하고 있던 이가 점점 약해지는 모습을 보는 건, 말 그대로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다. 이에 난 ‘쇠락’이란 표현을 쓴다. 물론 갓 스물로 데뷔한 탓에 그들은 여전히 젊고 꿈 많은 30대 청년들이지만, ‘아이돌’ 혹은 ‘연예인’으로서 갖는 사회적 지위와 파워는 이미 많은 부분 주저앉았음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쇼비즈니스 세계에서 살아남을 매력과 권력이 거진 소멸됐고, 그럼에도 연예인이란 직업을 버리지 못해 어정쩡한 위치에서 숨 붙이는 그들을 볼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속상함을 느낀다.



20220305191613_acikqqer.jpg Photo by Rob Simmons on Unsplash


당사자인 다섯 명 멤버는 제각각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들어오는 일거리의 수준이 대폭 낮아졌음에도(최근 학생 감독 졸작품에 출연했다) 성실히 일하고 있다. 연기에도 노래에도 춤에도 큰 재능이 없던 사람이었지만(물론 외모와 기럭지엔 상당한 재능이 있었다) 타고난 상냥함과 정성으로 일을 계속 받는다.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해 하며 바쁜 스케줄 없이 적당히 느긋한 삶을 즐기고 있다.


또 한 명은 사업을 시작했다. 연예인일 때의 사회적 지위를 꽤나 즐기는 듯 해보였던 그는, 아마 일정 수준 이상의 자리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 같다. 신년을 맞아 본인이 차린 회사 건물에 팬들을 초청해 작은 이벤트를 가졌는데, 나름 대표님 소리 듣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딘가 마음이 놓였다. 세상물정 깨치기 쉽지 않은 일을 첫 직업으로 삼았던 사람이 나름 번듯한 회사를 차리기까지 얼마나 고군분투 했을지, 굴욕적이고 아쉬운 순간을 겪진 않았을지. 그런 대견한 마음이 문득 들었다.


다른 두 명은 여전히 영광 속에 산다. 오래 전 짧게 스쳐갔던 전성기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자존심 굽힐 줄 모르고 철없는 사람이란 소문을 많이 듣는다. 그렇게 ‘급’에 대한 이해관계 충돌로 제안 온 일을 거절한 후 남는 건 스케줄 없는 연예인의 고독뿐이어서,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답답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내려놓을 수 없는 그 시대의 영광이 얼마나 달콤했던 지를 알기에 차마 쓴 소리가 나오진 않는다. 분명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도 결과적으로 고여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속상하다.


마지막 한 명은 타고난 팔자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가장 무능한 멤버였음에도 가장 수려한 외모로 인기를 독차지했던 멤번데, 지독한 사회면 사고를 치고 난 뒤에도 여전히 가장 ‘잘 나가고’ 있다. 나는 개인의 성공이 곧 팀의 자양분이 될 거라 믿으며 이 사람의 독주를 응원해야 할지, 아니면 솔직하게 부럽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당장 욕하며 내쳐도 시원찮을 멤버지만 또 팀의 일원이라 생각하면 차마 관심을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다.



20220305191252_ufzznuaa.jpg Photo by Graydon Driver on Unsplash


아이돌의 정체성은 곧 팬 개인의 정체성과 동일시 대해진다. 내 오빠의 ‘병크’ 때문에 나도 고개를 수그려야 할 일이 생기는 것이다. 15년여의 팬 생활 중 무려 10년을 그 수치 속에 살아왔는데, 그럼에도 ‘탈덕’하지 못했던 이유는 역시 내가 ‘을’이기 때문이다. 팬심이란 모든 게 ‘무조건’ 속에 이뤄지는 애정이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부족해졌더라도 조건 없이 포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 수없이 배신당했음에도 이상하게 유지되는 끈끈한 의리 같은 것이 마음을 거두지 못하게 해버리는 것이다.


차곡차곡 무너지는 내 아이돌의 쇠퇴를 지켜보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담담히 시간이 흘러 지금까지 왔다. 주는 것 하나 없이 오히려 뒷목 잡을 일만 만들어주는 철없는 울오빠들이지만, 계단을 내려오는 길조차 함께 가고 싶은 이 마음이 바로 팬심이 아닐까 싶다.



박태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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