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cliché)는 인쇄 연판을 뜻하는 불어로, 자주 쓰는 단어를 미리 조판해 묶어 놓았다는 데서 유래해 이제는 진부한 표현이나 생각을 뜻하기도 한다. 프랑스에서의 사정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특정 예술 작품이 틀에 박힌 형식일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
비판의 의도로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는 하지만, 정반대의 경우도 은근히 많다. '클리셰가 괜히 클리셰겠냐', '클리셰와 클래식은 한 끗 차이' 등 클리셰에 환호하는 반응도 흔히 볼 수 있어 의아함이 들곤 한다.
사실 조금만 찬찬히 곱씹어 보면, 이 반응은 전혀 의아할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 속에서 사랑받을 가치를 증명한 것이 바로 클리셰이니 말이다. 클리셰는 본디 환호받을 가치가 있다. 진부해서 싫어한다고 변명하기에 우리는 익숙함을 너무나 사랑하는 종족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클리셰를 싫어한다고 느끼고, 비판의 대상으로 보는 걸까?
공포 영화 <캐빈 인 더 우즈>(The Cabin in the Woods, 2012)의 주인공은 노인의 경고를 무시하고 외딴 오두막집으로 휴가를 떠나는 다섯 명의 대학생이다. 이것만 보면 여느 공포 영화와 다르지 않지만, 이들을 몰래 지켜보는 지하 연구소가 있다는 점만은 독특하다.
초반부터 존재감을 뽐내던 이 연구소는 영화가 진행되며 그 정체를 드러낸다. 이들은 원격 조종으로 오두막집의 상황을 통제하며 우리가 아는 공포 영화의 클리셰를 충족해 나가는 집단이다. 이들의 목적은 지하 깊은 곳에 있는 강력한 고대 신을 위한 의식을 성공시키고 그를 잠재우는 것. 연구소는 갖은 방법을 통해 주인공 일행이 시나리오대로 행동하도록 몰고 가며, 고대 신이 원하는 조건에 맞춰 제물을 바치고자 한다.
자극적인 만화 소재 같기도 한 이 독특한 설정은 공포영화의 클리셰를 설명한다. 딱 봐도 위험한 곳에 들어가고 딱 봐도 수상한 것을 건드려 죽음을 자초했다는 평까지 받곤 하던 공포영화 속 주인공들. 비이성적인 결정과 행동만 반복하는 바람에 동정과 공감을 받기보다는 '발암'이라며 욕을 먹어야 했던 주인공들이 여기서는 변명의 기회를 얻는다.
그들은 '하필 운이 없어' 괴물을 맞닥뜨린 것도 아니고, '멍청해서' 괴물에게 제 발로 찾아간 것도 아니다. 그들의 모든 행동이 불행을 위한 방아쇠로 작동하도록 이곳저곳 덫이 설치되어 있다. 이성을 흐리는 화학 약품이 뿌려지고, 집어 올리는 물건에 따라 어떤 괴물이 방사될지 정해진다. 그들의 비이성적임은 그저 인물의 특질이나 극단적 상황에서 발생한 극단적 감정 대신, 연구원들이 행하는 조작의 결과로 설명된다.
그렇게 고대 신을 잠재우는 의식은 순조롭게 이어지는 듯했으나-즉 주인공들이 순조롭게 죽어가는 듯했으나-'변수'가 생겼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영화의 전개는 예측불허로 흘러간다.
'예측불허로 흘러간다'는 장르 불문 각종 작품의 줄거리 설명에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 하지만 정말 예측불허로 흘러가는 스토리는 생각보다 많지 않은데, 그래도 이 영화는 정말 예측불허인 편이다. 파격적인 흐름이라서라기보다는, 후반부에는 그렇다 할 줄거리가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주인공들의 반란으로 연구소는 아비규환으로 변하고, 스플래터 무비에 준하는 잔인한 장면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이 점에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줄거리의 부재는 앞서 클리셰의 설명이라는 단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이기도 하다. 반란을 주도하는 인물은 마티. 본디 실없는 말만 해대다 금세 개죽음하는 광대 역할이었을 마티는 용케 살아남아 혼란의 소용돌이를 연구소로 옮겨온다. 함께 살아남은 또 다른 주인공 데이나와 함께 연구소의 괴물을 한 번에 방사하며 연구원들이 학살당하도록 내버려둔다.
대부분의 공포영화에서 죽음은 무작위로 일어난다. 따라서 인물의 사망은 불운에서, 또 생존은 행운에서 기인한다. 때때로 선한 인물만이 살아남기도 하지만 그건 영화를 외부에서 지켜보는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결과론적 관점이고, 영화 내부에서 그 인물이 선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마티가 살아남은 데는 나름 탄탄한 근거가 뒷받침한다. 마티는 평소 마약을 즐겨 했는데 그 덕에 연구소의 화학 약품 공격이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이성이 흔들리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상을 감지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또한 좀비에게 잡혀 끌려갔던 무덤에서 지하연구소로 통하는 길을 발견함으로써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을 찾고, 전기회로를 건드려 연구소 내 작동 문제를 일으킴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새 방어 겸 공격을 한다. 물론 이것도 우연에 우연이 겹친 일이니 운이 작용하기야 했겠으나, 운명의 주사위에 모든 걸 맡겨 놓은 채로 운 좋게 살아남고 운 좋게 연구소와 클리셰를 파괴한 것만은 아니다.
<캐빈 인 더우즈>의 기본 설정과 전반부 전개는 클리셰를 설명한다. 그리고 마티의 반란으로 시작되는 후반부 진행은 클리셰를 파괴한다. 마지막으로, 설명되고 파괴된 클리셰는 다시 세워진다.
오프닝 시퀀스가 주목할 만한데, 영화는 새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소 직원들이 수다를 떠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곧이어 이들은 실내 전동차에 올라타 핸들을 돌린다.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세발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한 인물이 떠오른다. 붉은 소용돌이무늬를 양 뺨에 그려 넣은, 새하얀 가면을 쓴 엽기적 인물이. 아무리 공포영화에 문외한이라고 하더라도 대중문화와도 척을 지은 게 아니라면 누구나 알만한 그 인물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이들이 여기서 일어날 사건의 조작자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핵심 기능도 갖고 있다. 바로 영화의 후반부에서야 드러날,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연구소 직원들은 영화의 첫 부분에서 앞으로 닥칠 일은 꿈에 모른 채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낸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경고에는 낄낄대며 조롱으로 응수한다. 수상한 낌새를 여러 번 느끼지만 모두 무시한다. 모두 공포 영화 주인공의 정석적인 모습이다. 심지어 한 연구원은 연구소가 보유한 여러 괴물 중 인어가 의식에 등장하는 것을 꼭 한 번 보고 싶다고 복선을 열심히 깔더니 결국 그 인어의 손에 죽는다. 이들은 이 <캐빈 인 더 우즈>라는 공포 영화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이들을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영화를 본다면 <캐빈 인 더 우즈> 또한 클리셰에 지독히 충실한 작품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도 결국 클리셰를 한 번 비튼 것에 의의가 있을 뿐, 클리셰에 굴복하는 그렇고 그런 작품 중 하나일 뿐인가?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글의 서론을 저렇게 쓰지도 않았을 것이고 애초에 여기까지 글을 쓰지도 않았을 테다.
오프닝 시퀀스만큼이나 눈에 띄는 것은 엔딩 시퀀스다. 더 이상 마티와 데이나를 죽이려 드는 연구원은 없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이 발생한다. 고대 신이 눈을 떴다. 본체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손이 땅을 뚫고 솟아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당장의 위기는 일단락되었다지만 앞으로 이어질 비극이 자명하니, 이 또한 공포 영화의 클리셰'답다'. 그러나 여타 결말과 다른 점은, 이것이 '배드엔딩'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대 신이 깨어나 거대한 손을 쳐들었고 인류는 곧 멸망할 것이라는데, 어쩐지 절망적이거나 두렵지 않고 오히려 통쾌하다. 시리즈물에 새로이 등장할 캐릭터를 기다리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그것은 그 결말을 마티와 데이나가 직접 선택했다는 데서 오는 쾌감이다. 그들은 무력하게 인류의 생존에 공헌하는 대신 주도적으로 인류의 멸망을 불러온다.
클리셰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도 비슷하다. 우리가 클리셰를 싫어한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 주도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클리셰에 휩쓸린 작품은 그러한 흐름이 왜 존재하는지 모르고, 이미 팬 홈을 따라 흐르고 또 흐른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괴물에 정신없이 쫓기고 쫓기는 공포영화의 주인공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캐빈 인 더 우즈>는 영화가 다시 주체로서 역할하며 주도권을 잡는다. 마티와 데이나가 연구원들에 놀아나다가도 결국 맞서 싸워 최종 결말을 얻어내듯, 영화도 클리셰에 휩싸이면서도 제 갈피는 스스로 잡는다. 영화를 쥐락펴락하던 조작자인 클리셰는 설명'되고' 파괴'되고' 재건'되어' 주도권을 잃는다. 주도권을 쥔 클리셰는 공포와 비판, 심지어는 비난의 대상이 되지만, 주도권을 잃고 피동문이 걸맞은 상태로 돌아간 클리셰는 우리가 오랜 시간 사랑해 온 그 이야기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