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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인사이트 Nov 28. 2024

어른들이 외면한 아이가 자라가는 법





세상을 향한 창이 하나뿐인 아이


 

아미코는 특이하다. 다정한 오빠와 차분한 엄마, 아빠랑은 다르게 수업은 빼먹고 맨발로 학교와 마을을 돌아다닌다. 좋아하는 아이 노리를 집요하게 따라다니지만, 그저 관심을 끌고 싶을 뿐 그 마음이 상대를 부담스럽게 할 것이란 것도 모른다. 누구도 남의 아픔을 집요하게 말하면 안 되고, 나는 좋아도 남은 싫을 수 있다는 공감을 계속 배워가야 하는 아이다.

 

아미코에게 오빠는 그 공감을 눈높이에서 잘 설명해 주는 다정한 사람이다. 그 연결고리로 세상과 연결되는 모습이 그려진다.

 

“네가 보기엔 난 뭐야? 오빠야? 괴물이야?”

“오빠야.”

“맞아. 아빠는? 아빠야? 안경잡이야?”

“아빠야.”

“그럼, 아까 만난 사람은 누구야? 엄마야? 점박이야?”

“엄마야.”

“그래, 그런 거야.”


이 예민하고 독특한 아이는 오빠를 통해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며 사회와 가까워진다. 하지만 의붓엄마가 유산을 한 이후 가정은 무너진다. 아미코의 마음은 오해받고 누구도 그를 돌보지 않는다. 엄마는 폐인이 되어 병원과 집을 오가고 아빠가 아이들을 돌보지 않으면서 오빠까지 불량배와 어울리며 변해버린다. 아미코는 그렇게 세상과 단절된다.

 

하지만 오빠를 탓하기도 어렵다. 그도 역시 아이이고 똑같이 부모의 방임을 견뎠을 뿐이다. 다른 점은 아미코가 자신의 속으로 들어갔다면 오빠는 집 밖으로 뛰쳐나가는 방식으로 두 삶의 궤도가 어긋나 버렸다는 것이다.






무관심에 입는 내상은 강하다.


 

영화 초반 아미코는 생일 선물로 한 쌍의 무전기를 받는다. 곧 태어날 동생과 할 스파이 놀이를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아이가 죽고 무전기는 쓸모를 잃는다. 이것은 더 이상 아미코에게 답을 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직간접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세상을 향한 무전기의 역할을 하던 오빠도 없는 이제 아이는 조용한 학대에 익숙해진다.

 

시간이 지나 아미코는 중학생이 되고 방임은 모습을 드러낸다. 교복은 냄새나고 제대로 된 신발도 없다. 몇분 새 산발이 되어 엉망인 집을 나서는 아미코의 모습에 참혹한 마음이 든다. 아이들의 아픔은 겉으로도 드러난다. 계절에 맞지 않는 옷, 제때 세탁하지 못하거나 몸에 맞지 않는 옷은 방임의 흔적이다. 하지만, 명확한 증거에도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아미코는 짝사랑 하던 노리에게 맞아 코가 부러지고서야 그 미움을 알고 이유를 묻는다. 그동안 누구도 자신이 싫은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미코가 처음으로 타인의 감정을 궁금해한 순간이기에 조금의 변화가 엿보이는 순간이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외상을 입은 후이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돌이켜보면 아미코에게 자신의 행동은 모두 자연스러운 것이다. 엄마가 왜 누워있는지. 아기는 왜 없는지. 오빠는 왜 집에 오지 않는지.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아무런 답도 듣지 못했기에 계속 물었을 뿐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이가 못된 장난을 친 거라며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그 속단은 마음에 내상을 입히고 방임의 상처는 귀신 환각과 환청으로 발현된다. 점점 커지는 환청을 듣지 않으려 아미코는 크게 노래를 부르고 다닌다.

 

아미코가 부르는 노래 가사는 발랄하지만, 불안과 상처를 그대로 투영한다. '귀신 같은 건 없어. 귀신은 다 거짓말이야.' 라는 아빠의 말을 따라하다가 그 끝에는 조금 무섭다는 본심이 튀어나고 만다. 이미 상처 투성이가 된 마음을 누구도 모른다는 것이 영화의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이다.


영화 말미 아미코는 할머니 집에 맡겨진다. 바다 위 환각들에 인사하던 아미코는 춥지 않냐 묻는 이웃 아저씨에게 웃으며 괜찮다고 외친다. 춥지 않다는 것일까, 귀신들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일까. 내내 아미코에게 다정하던 귀신들이 바다 건너로 아미코를 부르지만, 손을 흔들 뿐 가지 않는다. 아이는 이곳에서 살아갈 것이다.

 

조용한 비극을 내리 보았지만, 마지막 장면에 아미코에게 응답을 해줄 이를 만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아미코를 바라보는 할머니와 이웃들 안에서 아이가 잘 회복될 수 있길. 신발이 없어서 맨발로 다니는 게 아니라 맨발로 다니고 싶어서 신발을 벗던 아미코로 살아갈 수 있기를 상상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에 잘 몰입하는 편이지만 어린이가 나오는 이야기에는 유독 취약하다. 특히 보호받지 못하거나 아이가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언제나 무너지고 만다. ‘여기는 아미코’는 어른을 부끄럽게 만드는 영화다. 아이가 보는 반짝이는 세상을 지켜주지 못하는 어른들을 보며 느끼는 부끄러움과 참담함은 비수를 꽂는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이 여과 없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있는 아미코들의 무전에 대답해야 한다고. '여기는 아미코'는 동화가 아닌 삶을 사는 아이들에게 보내는 신호라고 믿는다.

 

영화는 여름의 무거운 공기를 그대로 담아낸다. 흐른 땀 방울을 담아내면서 계속 아미코를 쫓아가는 기분은 꿉꿉하다. 텅 빈 복도를 맨 발로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이 아이를 절대 잊지 말라는 듯이 환청처럼 귀에 맴돈다.

 

주인공 아미코는 방임과 정서적 학대를 견디지만,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 고통을 아이보다 크게 느낀다. 어린 시절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 일이 사실 별거였다는 것을 깨달을 때 겪는 낙차처럼 차라리 악쓰고 울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냥 살아가는 아미코에게, 귀신이 조금 무섭다고 고래고래 외치는 아미코에게 아주 시끄러운 응답을 해주고 싶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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