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배움으로서의 영어 이야기
이른 아침, 영어 자격증 시험을 쳤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시험장으로 쓰인 중학교 앞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고사장에 도착해 지정된 나의 ‘A-01’ 자리를 찾아 걷는다. 나보다 일찍이 온 한 중년의 남자분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
시험을 앞두고 며칠간 안일해져있던 마음을 돌아보게 될 만큼 공부하는 그 모습이 뭉클하다. 자리에 앉았다. 그분의 모습에 자극을 받아 시험 전 핸드폰 속 mp3 파일 하나라도 더 열심히 듣는다. 교실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시험에 응시한다.
지금껏 영어라는 하나의 언어를 위해 많은 시도를 해왔다. 갖은 방법으로 영어 회화 공부도 하고, 최근에는 자격증 시험을 위해 매달려 공부하기도 했다. 수업을 듣기 위해 학원도 다녀보고, 인터넷 강의도 들어보고, 스터디를 하기도 했다. 어쨌든 모든 것이 영어 실력을 향한 발버둥이었다.
이십대 중반의 나는, 아직까지 영어에 갈증을 느낀다. 우리는 왜 영어를 공부할까?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대한민국은, 아무리 중국이 세계의 권력을 쥐고, 아랍어가 수능에서 인기 과목이 되더라도, 여전히 영어공화국이라 부를만 하다. 대한민국 안에서 살아가는 20대 중반의 내가 가진 영어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외국어에 대한 생각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해야만 하니까 하는 공부가 싫었다. 20대 초반의 나는 참 시대 반항적이었다. 사람들이 하니까 나도 하는 공부가 아닌, 분명한 목적을 가진 공부가 좋았다. 지금에서야 취업이라는 문턱 앞에 실력을 검증할 수단이 영어 자격증이라는 것을 몸소 깨닫고야 말았지만 20살, 21살의 나는 취업이란 먼 미래의 일일 뿐이었고, 나는 그저 ‘인간적으로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의 '인간적으로 멋진 사람’의 머릿속 스케치 안에는 영어가 늘 우선순위로 들어있었다. 아마 뭐든지 배움에 있어 선두에 있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영어 회화 앞에서 종종 무너지는 내가 부끄럽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선행되었던 것은 마음 속 저 깊이 끓어오르는 ‘멋진 사람’에 대한 열망이다. 자신의 생각을 모국어처럼 영어로 말하는 사람들이 멋져 보였다. 더불어 자신의 힘으로 한국에서 노력 끝에 실력을 쌓은 자들은 더 멋져 보였다.
언어라는 것은 한 번의 암기 끝에 모든 것이 해결되는 배움이 아니다. 그것에 모두가 공감하기에 한 언어를 끝내 정복한 자들이 세상의 그 어느 정복자보다 빛나보였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줄 알았다. 많은 시도를 했다. 늘 처음에 교재를 사며 이미 영어를 마스터한 사람처럼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하지만 끝내 나태해지는 나 자신을 보며,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만큼의 노력을 한 걸까, 가늠할 수가 없어진다.
그렇게 영어는 나에게 늘 정복해야할 산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다지 멀거나 터무니없이 높거나 억지로 해야만 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꾸준히 밀고나가지 못하는 성격 탓에 영어와 ‘밀당’을 하며 어느 시기에는 내 삶속에 스며들어 있다가, 어느 순간에는 멀어졌을 뿐. 영어는 늘 내게 정복의 대상이자, 곁에 있는 두 번째 언어였고,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삶의 대표적인 예시였다.
나는 아마 할머니가 되어서까지 영어 정복을 위한 여정을 계속할 것이란 예감이 든다. 나이가 들어서도 사람을 늙지 않고 빛나보이게 만드는 것은 오직 ‘배움’뿐이라는 것이 나의 철학이다. 특히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더욱 사람을 가치 있게 만든다. 비단 언어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공부는, 내면의 근육을 키우고 세상을 바라보는 깊이와 넓이를 다르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 시대에 영어 공부는 더욱이 그렇다.
언어는 이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 범위를 확장시킨다. 즉, 나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일이다. 어쨌든 아직까지 영어는 전 세계인의 공용어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 영어 하나만 무적이라면 살아남을 수 있다. 또한 각종 콘텐츠와 서적은 압도적으로 영어로 쓰인 것이 대부분이다. 구글 검색 엔진에서 영어 검색과 한글 검색은 결과로 나오는 양부터가 다르다. 이렇게 나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일, 그것이 나의 열망의 이유였다.
유럽 여행을 홀로 떠나 내가 마주한 세상은, 더 넓었고 웅장했고 아름다웠고 다양했다. 그런 광경을 보지 못하고 죽었더라면 너무나 슬펐을 것이다. 그런 세계를 나의 삶으로 끌어오는 일은 오직 언어 공부만이 가능하게 한다. 특히 많은 국가를 나의 삶과 닿게 하고 싶다면 영어가 최고다. 그렇게 영어 공부는 새로운 세상을 선사한다.
공부가 온전히 100% 즐거울 수 있을까? 공부만이 삶을 구원한다고 책을 쓰는 사람이야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다. 즉 나역시 공부를 하며 짜증나고 힘든 적이 많았고, 아직까지도 책상 앞에 앉아 집중하기 싫은 순간이 매일 반복된다. 그렇지만 공부만큼 확실히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드높이고, 내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공부로서 영어를 선택하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아주 괜찮은 일이다. 이제 한국에서도 영어를 정복할 수 있는 환경 조건이 주변에 널려있다. 쏟아지는 영어 콘텐츠와, 양질의 수업을 제공하는 학원들, 집에서 쉽게 인터넷 강의도 들을 수 있고 외국의 재미있는 드라마도 볼 수 있다.
사실 어느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수많은 영어 공부법 중 자신만의 길이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학창 시절 각자의 필기 방식이 있었고, 좋아하는 자습 방식이 있었다. 그런데 몇 달이 아니,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영어 공부에 오직 한 가지 왕도가 있을까?
분명한 것은 한국에서 영어 공부는 유용한 자원이 많다는 것이다. 어쨌든 자기 의지만 있으면 어디서든 값싸게, 무료로, 양질의 공부 환경을 만들 수 있다. 문제는 지속이다. 공부로서 영어를 지속하는 것이 얼마나 몸에서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지 모두가 잘 알 것이다. 쉬운 지식 체득이 없다는 것을 영어를 통해 깨닫는다. 며칠을 열심히 하다보면 ‘꽤 몸에서 영어가 익숙해진 것 같아’ 싶다가도, 혹여 무슨 일이 있어 하루 이틀을 쉬다보면 그동안 쌓아두었던 몸속의 영어 체감은 어디로 갔는지 다 휘발되어버렸다.
그렇게 다시 시작하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또다시 낯선 타국의 언어 앞에서 무너지곤 한다. 이 모든 과정을 다 겪어 내고도 영어 실력을 탄탄히 다진 사람들이 신기하기도 하다. 그렇게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고, 또 휘발되고, 다시 체득하고 그러면서 영어도 나의 하나의 언어가 되어간다.
어쨌든 20대 중반인 나에게 영어란, 사회에서 증명받기 위해 내야하는 과제물과 같은 존재가 되기도 했지만 나의 오랜 열망이라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영어로 자유롭게 소통하고, 영어를 배우는 사람들과 스터디를 이루어 자유롭게 토론하고, 영어 영상들과 원문들을 자유롭게 읽어 내가 누리는 지식의 세상을 넓혀가는 것,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짜릿한 배움의 결과가 아닐까.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단, 가슴만 두근거리는 것에서 멈추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한다!
앞서 말했듯, 과거의 나는 자격증으로서의 영어에 대해 몹시 회의적이었다. 아무래도, 이상적인 생각이 지금보다 더 강했던 20대 초반이었던지라 ‘남들이 다 한다고 외우기만 하는 토익 시험에 칠 생각은 없다고!’, ‘난 영어 말하기 실력을 키울 거야!’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패기 넘치던 소녀는 오늘 아침 토익 시험을 치고 왔다. 그래도,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직군을 향한 노력의 과정이 되었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했고 시험도 떨리지 않았다. 과거의 그때는 불확실한 미래에, 명확한 공부의 목적이 없었으니 더 자격증 공부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근본적인 영어 실력이 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껏 자격증을 위한 영어 공부를 해보니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다. 결국 회화 공부든, 문법 공부든, 고득점을 위한 스킬이든 모든 것이 영어라는 언어의 일부라는 것이다. 지금껏 회화를 위해 기초적으로 다져온 공부 탓에 언어로서의 영어에 대한 감각이 생겼다. 그러니 똑같은 양을 공부해도 고득점을 받는 문법 스킬을 빨리 이해하며 흡수할 수 있었고, 이 자리에 왜 이 품사가 오는지, 그런 공식처럼 쏟아지는 '정답을 위해 외우는 문법'에 대한 타당성이 금방 생겨났다. 또 회화를 위해 기초적으로 뼈대를 세웠던 영어 문법들이 결국 시험의 당락을 좌우하는 포인트가 되기도 했다.
어쨌든 공부의 목적은 달랐지만 영어를 공부하고 있는 시간들은 내 몸에 쌓이고 쌓여 언젠가 다른 곳에서 유용하게 쓰이기도 하고, 몇 년이 지나도 금방 떠오르는 정답이 되기도 했다. 결국 모든 것은 영어라는 언어를 쓰며 얻는 배움들이다.
이런 점들을 몸소 깨닫고는 그저 언어를 즐기기로 했다. 회화를 위해서든, 자격증을 위해서든, 문법이라는 좁은 분야를 위해서든 언어로서의 영어 공부를 즐길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배움들을 내가 그리는 이상향으로 이을 수만 있다면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영어는 내게 여전히 애증이자 정복할 산이자 가끔씩만 찾아오는 쾌감과 행복이다. 언젠가는 지금보다 더, 나의 세계가 영어를 통해 넓어지기를 그래서 더 많은 것들을 느끼고 사랑할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