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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인사이트 Sep 16. 2019

'못생겨도 괜찮아'의 시대는 지났다

외모에 관한 관점에 대해서

 

현재의 우리 사회를 표현하는 말로 매번 등장하는 것 중 하나는 ‘외모지상주의’이다. 사실 이 말은 틀린 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고? 외모지상주의는 현대사회가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쳐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사람들은 잘생기고 예뻐지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요즘엔 과학이 발달하고 많은 정보들이 알려져 있어 그나마 정상적인(?) 방법들을 이용하지만, 과거에는 소위 ‘민간요법’이 많이 행해졌다. 기생충을 먹어서 영양분을 빼앗게 해 살을 빼거나 납 성분을 얼굴에 발라 창백하게 만든다. 심지어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젊은 처녀들을 죽여 그 피로 목욕을 했다는 엘리자베스 바토리에 관한 이야기도 있을 만큼 ‘미’에 관한 관심은 시대를 막론하고 늘 뜨거운 화두였다.


그러나 너무나도 당연하게 모두가 하나의 미를 추구하며 달려가던 과거와는 달리 요즘의 사회는 이런 ‘아름다움’에 대해 조금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여전히 수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워지고 싶어하면서도 어딘가 의문을 품는다. ‘이게 정말 올바른 길인가?’

 

 

주인공 ‘르네’는 말 그대로 평범한 여자이다. 평범한 얼굴, 평범한 몸매, 특별할 것 없는 일상만이 반복된다. 그녀는 늘 예쁜 여자들을 동경하며 그들의 삶을 살고 싶어한다. 거울을 볼 때면 위축되고 한숨만 나온다.


그러던 어느 날 운동을 등록한 르네는 운동 중 넘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부딪힌다. 다행히도 크게 다친 곳 없이 눈을 뜨는데,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다. 얇은 허벅지, 가늘어진 팔, 그리고 엄청나게 예뻐진 얼굴까지. 모든 것이 르네가 원하던 모습 그대로의 완벽한 여자로 바뀌어 보이기 시작한다.

    

 

완벽한 외모로 인해 자신감을 얻은 르네는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일과 사랑 모두 술술 풀려간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인지 바뀌어 버린 그녀의 태도에 친구들은 떠나가버리고 설상가상 또 다시 문에 머리를 박고 쓰러진 그녀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버린다.


다시 평범해진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면서 르네는 너무나도 서럽게 눈물을 흘린다. 그녀가 성취한 모든 것이 외모 덕분이라 여겼기 때문에 외모가 사라지면 그 성취들도 사라지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가치와 외모의 사회적 가를 동일시 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외모의 가치와 스스로의 가치를 동일시 하곤 한다. 예쁘고 잘생겨지면 일이 술술 풀리고 주변 사람들의 태도도 달라지지 않을까 상상한다. 물론 첫 만남에서의 첫인상은 외모가 특출 난 사람이 더 좋을 가능성도 높다.


첫 만남에서는 그 사람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에 유일한 정보가 그의 외관이다. 본능적으로 외모를 보고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스치듯 한번 본 사람보다는 이야기를 나누어보거나 늘 주변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 더 중요한 것은 자명하다.

   

 

나의 학창시절에 잠시 다녔던 학원이 있었다. 그 곳에서 친구 한 명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친구를 보고 나의 관점을 180도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친구는 객관적으로 화려하고 수려한 외모는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일까 처음 그녀를 대면했을 때 별 다른 관심이 없었고 눈에 띄지 조차 않았다.


그런데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이성과 동성을 가릴 것 없이 그녀를 따르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나 또한 함께 있으면 어딘지 기분이 좋아지는 매력이 있던 그녀와 함께하는 학원 생활이 즐거웠고 그녀의 행동들에 시선이 머무르기 시작했다.

 

한참 외모에 대한 관심이 가장 많을 청소년기였기에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인간관계에서 수려한 외모의 영향력에 대해 더욱 과장되게 생각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성관계에 있어서는 거의 확실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 나는 그녀를 만난 이후로 한 사람의 ‘매력’이란 것은 외모에 한정되는 작은 개념이 아닌 무궁무진한 세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오직 르네에게만 아름답게 변한 그녀의 모습이 보이고 그 외의 인물들에겐 그녀의 모습이 본래 그대로 보이게, 심지어 관객에게조차 르네의 원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제까지의 영화들은 주인공의 외모를 실제로 바꾸어버렸다. 못난이 주인공이 아름다워진 후 인생이 바뀐다거나 영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Shallow Hal)’처럼 못난 여자를 남자주인공의 눈에만 아름다워 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로 인해 관객들도 외모가 바뀐 여자주인공을 보게 되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을 볼 뿐이다.


반면 ‘아이 필 프리티’에서 르네는 겉모습이 전혀 바뀌지 않는다. 달라진 건 그녀의 자신감과 성격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외모 탓에 불가능 할 것이라고 여겨졌던 모든 일들에 성공한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아름다워졌던 거라면 관객들은 그녀의 매력을 또 다시 ‘외모’에 집중시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외모’라는 속박을 지우고 나니 그 이외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이 영화가 ‘예쁘지 않아도 괜찮아’를 말하기 위해 과도하게 ‘언프리티(Un-Pretty)’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냐 묻는다. 사실 영화 속에서 르네의 모습과 행동에서 그러한 부분이 많이 강조된 것은 사실이다. 오히려 ‘예쁘지 않음’을 너무 강조해버려서 마음이 편하지 않던 장면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그리 밉지 않은 건 조금은 서툰 방식이었지만 기존의 영화들처럼 ‘예쁘지 않아도 괜찮아’를 말한다기 보단 ‘냥 이게 나야’의 뉘앙스였기 때문일 것이다. 미묘하지만 이 둘 사이의 차이는 매우 크다. 전자는 나의 단점을 인정하는 뉘앙스라면 후자는 외모가 어떻던 장점이나 단점이 아니라 그냥 ‘나 자신’인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르네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화장품 발표식에서 연설을 한다. 그녀는 ‘우리는 그냥 우리다’라고 말한다. 그 자리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평범한 르네의 친구부터 화려한 외모를 가진 업계 관계자들까지 다양하다. 그럼에도 그들 모두는 그녀의 말에 감동하고 호응한다.

   

 

영화 ‘금발이 너무해(Legally Blonde)’에서 여주인공은 아름다운 금발의 미인이지만 남자친구에게 너무 금발이라는 이유로 차인다. 금발의 미녀는 무식할 것이라는 편견 때문이었다. ‘아이 필 프리티’는 외모가 사회적 기준에서 못난지 아름다운지에 관한 사실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쪽이던 그로 인한 사회적 편견과 그 편견에 스스로를 가두는 사람들에게 외모는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라 그냥 성격처럼 한 사람의 특징에 불과한 것이고 편견에 가두어지지 말라고 말한다. 외모가 어떻든 극복할 수 있어! 라기보단 굳이 외모에 집중하지 않게 한다.

 

요즘엔 직업이 여러 가지거나 취미도 전문적으로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사회에서 요구되는 것도 한가지 일만 잘하기 보단 일명 ‘멀티 능력자’를 원한다. 더욱 까다로워졌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 만큼 나의 또 다른 매력을 많은 이들에게 알릴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된다. 당장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기란 사실 힘들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가장 먼저 보이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다만 외모가 어떻든 그것으로 한 사람의 다른 부분까지 판단해버리지 않고 다른 매력과 장점들을 봐줄 수 있는 세상으로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며, 또 그러길 바란다.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김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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