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가 공식 SNS에 노키즈관에 대한 설문조사를 올린 걸 보고
플래시 대 퍼거슨 사건을 알고 있는가? 플래시 대 퍼거슨 사건은 플래시가 백인 열차 칸에 있다가 유색인종 열차 칸으로 옮겨가라는 차장의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사건이다. 플래시는 인종차별을 금지한 수정헌법 13조와 14조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연방 대법원은 '분리하되 평등한' 시설이라면 인종을 분리해도 평등 조항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이 판결은 흑백 분리정책을 법적으로 정당화했고, 이 법적 논리는 58년의 긴 세월 동안 유지되었다.
지금 시선으로 보면 이 판결이 얼마나 위헌적이고, 인권 침해적인지 모를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판결이 내려졌던 걸 보면, 그 당시에는 저 ‘분리하되 평등하면’ 결국 ‘평등’하다는 생각이 사회에서 상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전부터 이 지점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었다. 분리하면서 평등하다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최근에 중앙일보에서 영화관에서도 노키즈관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저 설문조사에 응한 이들 중 70% 이상이 노키즈관이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저 게시글을 보고 나는 저 질문을 다시 한번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 스스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토론 주제 중에 동성애자 찬반 이런 주제는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존재 자체가 찬반의 문제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나는 여성에 찬성, 반대합니다. 나는 장애인에 찬성, 반대합니다로 바꿔보면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학창시절 교양 토론 수업에서 본격적으로 토론을 하기 전에 교수님이 주의사항으로 하셨던 말씀이었다. 존재 자체가 찬반의 주제가 될 수는 없다. 그 말이 오래도록 나의 마음에 남았다. 노키즈존은 ‘아이’라면 아예 출입이 금지된 장소이다. 아이라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성인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없는데 말이다. 아이들이 공공장소에서는 지성과 예절을 겸비한 성인으로 짠! 하고 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나이로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데도 출입을 금지당하는 것이다.
노키즈존이 생겨야 한다는 근거 중 하나는 이것이다. 아이들이 너무 시끄럽고 예의 없게 행동에 주변에 민폐를 끼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 중에 예의 바르고 민폐를 끼치지 않는 아동은 없다. 아이는 본래 실수하기 쉽고, 주변 분위기를 읽는데 능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가 이성보다 더 우선인 존재다. 특정 연령대의 출입을 아예 금지하는 것은, 그 대상이 그 대상 다운 모습으로 있기를 거부한다는 것이고 이는 결국 존재를 지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중앙일보는 ‘존재’에 대한 찬반 논의를 게시물로 올린 것이다. 이것에 대한 기사들을 찾아보다가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과 부교수의 주장에 공감하기에 그의 주장을 인용해왔다.
“노키즈존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설치할지 여부로 접근하게 되면 프레임 자체가 설치하자는 쪽으로 답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런 부분을 고려하지 않고 '찬성이냐, 반대냐'라고 묻는 질문은 이 문제에 대한 성찰 가능성을 빼앗아버리는 위험이 있다.”
중앙일보 페이스북 계정에 올라온 설문조사 결과를 보고 예상한 결과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이 설문조사엔 아이들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일단 아이들이 페이스북 계정을 갖고 있을 리도 만무하고, 노키즈존의 정의부터 모를 가능성이 크다. 아이를 출입금지 할지 말지에 대한 논의에서, 그 직접적 대상이 되는 존재는 그 논의의 장에서 발언 하나 할 수 없다. 이 설문은 마치 백인들에게 흑인들을 출입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아닌가요?라고 물어본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제대로 항의할 수 없다. 아이는 당연히 투표권도 없고 그들의 말은 미숙하다는 이유로 제대로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노키즈존을 만든 사람들은 아동을 출입 금지해도 그들은 항의할 수 없고 "아, 그래요?"하고 돌아나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자. 영화를 볼 때 속된 말로 관크를 하는 사람이 아이뿐인가? 필자의 경험으로는 핸드폰을 계속 확인하는 사람, 계속해서 대화하고 웃던 커플, 의자에 신발을 벗은 발을 올리는 관객 등 성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하지만 이런 소수의 사람이 존재한다고 노성인(청년, 중년, 노인)존이 생기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의 의견을 내면 사회에 더 받아들여지는 존재이면서 돈을 내는 소비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즉, 노키즈존은 약자들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다. 역사상 흑인 전용 화장실은 있었지만 백인 전용 화장실이 없었던 이유와 같다. 분리를 하는 쪽은 항상 분리되는 상대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너희가 더러워서, 시끄러우니까, 미천한 존재니까. 홀로코스트 정책이 그랬고, 흑백 분리정책이 그랬다.
다시 한번 묻겠다. 평등과 분리는 함께 갈 수 있는가? 내 의견은 No다. 분리하는 쪽은 분리당하는 존재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그 존재를 소외시킴으로써 권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건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차별을 통해 쾌적함을 추구하는 노키즈존이 당연시 여겨지는 사회에서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돼서 뭔가를 결정할 때가 올 거다. 그때 서로 불편을 감수해가며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가 아니라, 간편하게 불편을 제거하는 사회가 되지는 않을까.”
<페미니즘 리부트> 저자인 손희정 문화비평가가 한 말이다. 현재 우리들은 성인으로서 이 사회의 기득권이라고 해도, 다쳐서 신체의 한 부분이 기능을 못 할 수도 있고, 언젠가 노인이 되면 분명 몸도 약해질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처지가 될 수 있다. 그때 우리의 존재가 쉽게 격리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일까. 노키즈존으로 손쉽게 불편을 제거하는 사회를 배운 아이들이 약해진 우리를 격리할 것이라 할 때 우리는 뭐라 항변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우리들 모두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라면서 수많은 민폐를 끼쳤을 것이고, 그 동시에 그만큼 많은 주변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노키즈존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개인적으로 내 마음이 아팠던 이유는 이 논의가 영화 ‘겨울 왕국’이 개봉하면서 활발해졌다는 것이었다. 이 영화는 명백히 아동을 타깃으로 한 영화이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한다는 디즈니 영화가 아닌가. 하지만 우리들이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길, 공간을 나눠 쓰길 거부한다면 아이들은 대체 어디서 꿈과 희망을, 배려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