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서치의 힘
저는 프랑스 파리의 A학교에서 패션 디자인을 공부한 후, 영국 B대학교 대학원에서 패션디자인을 공부하면서 두 나라의 패션디자인 교육을 경험했다.
두 나라의 디자인 교육은 놀라우리만큼 달랐다. 마치 한국과 일본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프랑스가 감각과 장인의 기술, 스타일의 완성도를 중시했다면, 영국은 그 모든 과정의 출발점을 단 한 단어로 요약했다.
리서치(Research)
예전에 프랑스 영화를 '예술 영화'라고 하면서, 이해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영화로 풀어낸 영화가 많았다. 그 감정과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프랑스는 개인의 감정과 경험을 존중하는 교육 풍토가 있었다. 이것이 디자인 교육에서도 이어진다는 생각이다. 반면에 영국은 실질적이고, 논리적인 면이 강하다는 생각이다. 정성적인 면이 강한 디자인 분야를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영국 교육의 특징이었다는 생각이다.
대학원 입학 후 첫 튜토리얼 시간, 교수님이 내 스케치를 유심히 보더니 물었다.
“리서치는 어디 있나요?”
그 질문에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프랑스에서는 완성된 실루엣과 미감이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이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디자인의 형태보다 사유의 출발점, 즉 ‘왜 이 옷을 만들어야 하는가’가 먼저였다.
B학교의 수업 방식은 강의 중심이 아닌 튜토리얼(Tutorial) 중심이다.
학생 한 명, 교수 한 명이 마주 앉아 디자인의 방향과 리서치의 깊이를 논의한다.
이 일대일 수업 방식은 단순한 기술 지도가 아니라, 사고를 확장시키는 대화의 구조다.
튜토리얼 때마다 교수는 나에게 ‘리서치가 충분한가’를 물었고, 나는 그때마다 내 디자인의 기반이 얼마나 얕았는지를 실감했다. 프랑스 디자인 수업과 같이 창의적인 디자인 개발, 미장마쥬(mise en page), 실루엣, 미적인 수준 등은 그다음 판단이었다. 영국 튜토리얼은 디자인이 나오기까지 리서치를 통한 논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교수와 수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처음엔 단순히 자료를 찾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리서치가 디자인의 본질이라는 걸 깨달았다.
함께 공부하던 영국 학생들의 리서치를 보면 놀라울 만큼 넓고 깊었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1960년대 모즈 룩(Mods Look)을 주제로 삼으면,
단지 당시의 패션만 조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시대의 건축, 예술, 정치, 음악, 자동차 디자인까지 탐구했다.
패션은 시대정신의 일부이기에, 전체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는
형태 하나도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들의 리서치북은 마치 시대의 다큐멘터리였다.
신문 기사, 거리 사진, 광고 포스터, 당대의 회화와 영화 장면까지 —
그 모든 조각들이 디자인의 배경이자 언어로 재구성됐다.
이러한 훈련이 영국 디자이너들의 사고의 깊이와 넓이를 키우고,
결국 세계적인 패션 하우스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성장할 수 있는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영국의 대표적인 예술대학인 센트럴 세인트 마틴(CSM)과 왕립예술학교(RCA)의 프로그램은 모두 리서치를 중심축으로 설계되어 있다.
CSM에서 학생들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콘셉트를 발전시키기 위해 리서치를 수행하며,
그 결과물을 스케치북이나 기타 시각적 형태로 기록한다. 이 과정은 자기 주도적으로 진행된다.
한국 학생들이 CSM에 수업을 받을 때 힘들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잘 안 가르쳐 준다'는 점이다.
리서치 또한 자기 주도로 자료를 탐색하고, 기록하고 정리한 후 자기만의 생각을 만들어야 한다.
학생들은 수개월 동안 주제와 관련된 시각 자료, 텍스트, 인터뷰, 실험 결과를 축적한다.
그다음 단계에서야 비로소 콘셉트 스케치를 시작할 수 있다.
아이디어가 아닌, 근거에서 출발하는 디자인.
이것이 영국 디자인 교육의 핵심이다.
RCA의 경우, ‘Critical & Historical Studies’라는 교과목이 모든 전공에 병행된다.
패션 디자인을 하더라도 사회학, 미학, 정치학적 접근을 병행하여
자신의 작업이 사회와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스스로 서술하도록 요구한다.
이런 교육 환경이 영국 출신 디자이너들에게
“생각하는 디자이너(Thinking Designer)”라는 명성을 안겨준 이유다.
한 에피소드를 들은 적이 있다.
존 갈리아노가 학생 시절 학교 도서관의 책 한 페이지를 보여주면,
그가 “이건 어느 코너 몇 번째 칸에 있다”라고 즉시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방대한 독서를 통해 리서치를 생활처럼 익혔다.
그 열정이 결국 디올(Dior)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이어진 셈이다.
영국 출신 디자이너의 컬렉선을 보면, 서사가 있다.
그들의 디자인은 기존 디자인과는 다른 새롭다, 신선하고 때론 낯설지만
생각하게 만든다. 거기엔 서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서사는 리서치 교육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이 든다.
리서치는 결국 창작의 근육이다.
그것은 단지 자료를 모으는 기술이 아니라,
사물의 관계를 통찰하고 세계를 이해하려는 태도다.
디자인의 형태는 사라질 수 있지만, 리서치를 통해 만들어진 관점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관점이야말로 디자이너가 평생 가져야 할 진짜 자산이다.
그 서랍을 열고, 그 안의 시간들을 질문할 때 비로소 새로운 디자인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질문의 이름이 바로, '리서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