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외반증이라지만 소건막류같은데?
오래간만에 우리 집이 게스트하우스로 바뀌는 날이었다. 멀리 사는 이모가 방문하는 날, 헐레벌떡 이방 저 방 뛰어다닌 게 문제인지는 아직까지 이해 안 되지만... 하필 그날 갑자기 찾아온 반갑지 않은 발가락 통증은 생각보다 컸다. 통증을 못 참는 내 성격에 매우 티를 덜 내려고 했으나, 아마도 티가 안 날 수는 없었을 것 같다.
수시로 아픈 새끼발가락 부근은 어디가 아픈 건지 머리까지 삐쭉 서게 만드는 엄청난 위력을 가져서 심장이 덜컹거릴 정도였다. 겨우 참아낸 통증이 날이 갈수록 본색을 드러냈다. 더 자주 세게 와닿았다.
양말을 신고 슬리퍼를 신어도 맨 뼈가 바닥을 세게 누르며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압정 위를 걷는 듯이 얇게 붙어 있는 발살을 쑥쑥 쑤셔대는 통증과 아무리 친해지려 노력해도 너무 낯설어 병원을 찾아갔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히 걸어야만 하는 달팽이
작은 공간에서도 여러 번의 이동을 밥 먹듯이 하는 매우 급한 성격의 소유자인 나는 내 몸이 나를 이렇게 잡아둘 줄 생각도 못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사람과는 조금 다르게 장애를 가진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됐고, 그 누구보다 할머니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할머니는 너무 많이 사용해서 닳아버린 팔다리의 연골뿐만 아니라, 손가락과 발가락 역시 옆으로 삐쭉 튀어나온 뼈가 있었고, 손가락은 세월의 풍파를 제대로 맞아 휘어질 때로 휘어져버렸었다.
희고 고운 손, 손등에는 굵고 얇은 주름이 몇 가닥씩 선명하게 줄을 잇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린지 수시로 만져주고 파스에 의존하며 약을 먹고 예쁜 장갑으로 씌우곤 하셨었다.
나는 그걸 예사로 생각했다. 할머니가 되면 다 저렇게 된다고 생각했고, 내가 느끼지 못했던 아픔 고통 통증이었기에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얼마나 힘들게 견뎌내며 이 악물고서 살아갔는지를... 할머니만큼은 아니겠지만 비슷한 통증을 느껴보니 확실히 할머니의 짜증과 억척과 한숨이 친근하게 여겨졌다.
삼십 대 중반에 처음 겪는 관절염의 고통
예약환자가 줄줄이 이어서 들어가는 동네병원 정형외과, 다음 주 예약까지 꽉 차 있는 일정으로 당일 날 죽치고 앉아 이름을 부를 때까지 가만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환자로 진료 상담을 기다릴 뿐이었다. 몰려오는 잠을 깨보려 주변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살펴봤다. 어떤 할머니가 무릎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연신 손으로 쓰다듬고 계셨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었다. 나는 나쁜 짓을 한 사람처럼 눈을 피해 다시 폰으로 눈길을 돌렸다.
한 시간을 넘기기 직전에 이름이 불려졌고, 나는 의사 선생님께 하소연하듯이 내가 느끼고 겪은 아픔을 토로했다. 검사부터 하자길래 또 기다리고 촬영하고 기다리고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렸고 나는 친절하지만 태연하게 말하는 의사 선생님의 반응에 씁쓸해졌다.
무지외반증 초기네요. 검은 부분이 염증이에요.
나 : 왜 이런 병에 걸린 걸까요?
의사 : 발가락 뼈가 그렇게 생긴 거예요...
나 : 제 나이에도 이런 경우가 많나요?
의사 : 그럼요. 우선 주사 맞고 치료해 봅시다.
나 : 평생 이대로 살아야 하나요?
의사 : 이대로 멈추는 경우도 있고 더 심해지는 경우도 있어요.
무지외반증을 검색해 봤으나 내 증상은 새끼발가락이었다. 소건막류라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었다. 허나 의사 선생님은 무지외반증이라 했으나 반박할 여지를 두는 건 어려웠다.
엄마 닮아 칼발이라서 걸음도 잘 걷고
너는 발 하나는 참 잘 생겼다!
평발에 가까운 할머니와는 다르게 나의 엄마는 칼발에다 올챙이 발가락이라 무좀 생길 일도 발바닥이 아플 일도 없었다고 한다. 다행히 나 역시도 엄마의 발을 닮은 덕분에 삼십 평생 발에 대한 염증 걸릴 일은 거의 없었다. 더구나 민감한 발바닥 덕분에 굽의 높이와는 상관없이 나는 구두와 벽을 치고 살아온 사람인데... 내가 무지외반증이라니!?
물리치료가 아닌, 주사를 맞고 가라 했다. 보통 우리가 맞았던 따끔한 주사가 아니었다. 살을 파고드는 두꺼운 주삿바늘의 심지가 우지근하고 뻐근하게 발가락을 향해 들어왔었다. 으악.....! 배갯잎을 꽉 부여잡고 눈을 질끈 감고 있어도 두려움의 크기는 사그라들지 않았었다. 주사의 공격은 그래도 많이 길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기며, 한시라도 빨리 병원 곁을 떠날 생각뿐이었다.
다음 일정을 잡는 것도 무서웠다. 평생 이렇게 주사를 맞으며 살아야 하는 것도, 수술을 하는 것도 둘 다 너무나 마주하기 싫은 현실이었다. 할머니는 어떻게 3개월에 한 번씩 관절과 허리 주사를 맞으며 견뎌내신 걸까... 대단하다고 여겨지면서 안쓰러워졌다. 그 힘든 시간을 이겨냈는데도 더 나아지는 거 없이 오히려 침대 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돼버린 게... 속상할 따름이었다.
제가 할머니 대신 아프게 해 주세요.
이런 마음으로 기원을 올렸었는데 진짜 그 마음이 통한건지, 아니면 할머니의 아픔을 같이 느끼고 싶었던지는 모르겠으나 근래 부쩍 다치고 아픈 일이 많아졌고 할머니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 내가 아프다 해서 할머니가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고 기억이 완전하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하다 보니 더 안 좋은 상황인 건지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건지 도무지 혼란스러운 입장이나... 할머니의 아픔을 같이 느끼고 있다고 여기니 한편으로는 괴로운 마음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더 이상 미루지 말 것! 그리고 후회하지 않기!
우리에게는 고질병이 있다. 하지 못했으면 하지 못한 대로 후회를 하고, 했으면 한 대로 무모한 도전에 대한 비난을 상황이나 사람에게 돌리곤 한다. 허나 우리는 머뭇거리다가 생각에 머물다 지워버린 것들이 많을 테다. 우리가 그렇게 다음으로 미루는 사이 병마는 우리의 삶에 갑자기 찾아오곤 한다. 그렇다고 생각학 막무가내로 하다가는 예상치 못한 사고로 큰코다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지만 시간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많이 걷지 않는 게 좋겠고 절대
맨발로 다니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에게 뭘 해야 할지 물어봤더니 걷는 게 무리가 될 수 있다고 웬만하면 많이 걷지 말라고 했다. 안 그래도 일반인의 체력에 비해 월등히 부족한 운동량을 가진 내가 만만하게 할 수 있는 산책조차 이젠 내 삶에서 빠지고 말았다. 성급한 내 성격 탓에 집안에서도 수시로 움직이는 나의 일상도 변했고 더욱더 엉덩이 뗄 일 없이 침대가 오히려 편한 입장에 처해졌다.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나는 절망적이었다. 운전을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됐고, 직업에 대한 선택의 폭 또한 좁혀지고 말았다. 체력이 있다면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이제 내 몫이 될 수 없었다. 더 이상 좋아하는 사람들과 발맞춰 걸을 수 없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절뚝거리며 다니는 내 모습이 한심스럽게 여겨졌고 더 이상은 '무리'할 수 없는 할머니와 같은 입장이 돼 버린 것이었다.
이모와 나눴던 이야기가 내게 실감 나게 돌아왔다. 다리가 성할 때 괜찮을 때 다니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에 대한 말을 했었거늘... 더 이상 돌아다니는 게 두려워진 상황에 서글픔이 몰려왔다. 나이가 무슨 소용인가. 우리에겐 '갑자기'라는 얄궂은 운명이 찾아올 수 있으니까. 할 수 있을 때 가능한 해보는 쪽으로 선택하기를 바라본다.
나 역시 완치까지는 바랄 수 없겠지만... 빨리 낫고 싶다. 그래야 할머니가 필요할 때 도와줄 수 있을 테니까... 아픈 몸으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는 건 명백한 진실이다. 빨리 건강해지자. 밥도 잘 먹고 약도 잘 먹고 주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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