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막 대학에 입학했던 새내기 시절, 1년 정도 출신 고등학교가 있는 지역에서 지원해 주는 학사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서울권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을 위해 지역에서 마련한 기숙사인데 저렴한 가격에 시설이 좋아 나름 경쟁이 치열했던 것 같다. 나를 포함해 운이 좋아 들어간 몇몇을 제외하곤 소위 명문대에 다니는 학생들이 많아서인지 영재가 많았으면 하는 어른들의 바람인 건지 기숙사 이름이 '영재관'이었다.
갓 스무 살이 된 나는 모 여대에 다니는 굉장히 성실한 언니와 한 방을 쓰게 되었는데, 당시 이런저런 이야기들도 많이 나누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배운 게 참 많았다. 알람 소리를 듣고도 침대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나와 달리 언니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등교 전 영어 공부까지 하고 가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완벽해 보이는 언니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었는데, 원래 진학했던 대학을 한 학기만 다니고 반수를 해서 지금의 여대에 들어간 것이었다. 굉장히 의아했던 게 처음 갔던 대학이 커트라인도 높고 인지도도 더 있었다는 거다.
사정을 알고 보니 첫 학교는 특별 전형으로 들어갔었기 때문에 괜스레 열등감도 들고 전공도 본인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점이 많았었나 보다. 여하튼 지금의 학교에 만족하는 걸 보니 다행인 것 같긴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고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과 진학 상담을 하는데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매우 인상 깊었다고 했다.
그러더니 언니는 갑자기 책상에 볼펜을 집어 세우면서,
"전공을 선택하는 것 때문에 그때 내가 엄청 고민이 많았거든. 근데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 자 여기 볼펜이 서 있는데 (집고 있던 볼펜을 놓으면서) 이렇게 탁 놓으면 어느 방향으로 떨어질지 모르겠지? 모든 방향이 가능성이 있지. 지금 네가 그런 상황이지 않을까?
만약에 볼펜이 처음부터 이렇게 기울어져 있었다면 얘는 여기로 밖에 못 가. 이런 상황이라면 고민을 하지 않았겠지.. 어떤 한 가지 뚜렷한 재능을 타고난 천재들은 그냥 그 길밖엔 안 보이는 거야. 오로지 그 길밖엔 갈 수가 없지.
우리들은 범인(凡人)이지만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
다르게 말하면
어떤 일을 어떻게든 해낼 수 있다는 거야.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알았지. 아, 내가 천재는 아니지만 내가 어느 길을 택하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리고 또 어쩌면 지금의 선택이 긴 인생에서 이렇게 괴로워할 만큼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고. 여차저차해서 대학에 들어갔고. 어차피 그 당시에는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을 죽어도 몰랐을 거야. "
언니의 이야기를 들었을 당시에 나는 확고한 꿈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아 그럴 수 있겠구나, 재밌는 비유네. 이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대학 생활과 졸업 이후 꿈을 재설정하고, 크고 작은 길들을 선택해 나가면서 그 이야기를 해주신 선생님의 의도를 알게 되지 않았나 싶다. 나 자신을 천재가 아닌 범인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어찌 보면 참 냉정한 이야기지만 그 선생님께서는 학생의 현 상황을 명쾌하게 짚어준 게 아닐까.
어렸을 적에는 꿈을 정하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누구나 그걸 이룰 수 있다고 배웠었다. 꿈을 최대한 빨리 정하고 성실하게 공부하는 것, 그것이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학생상이었던 것 같다. 또 대학만 가면 그 이후의 인생이 꽃길처럼 펼쳐질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는 걸 알기까지는 대학 진학 후 딱 2년이면 충분했다.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직업명을 댄다. 그래서 이제는 질문을 다르게 한다. 꿈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게 뭔지 한 문장으로 이야기해 봤으면 좋겠다고. 그럼 대답이 제각각이다. 세계일주부터 시작해서 돈 많이 버는 것, 연애하는 것 등등 또 어떤 학생들은 '없다'라고 한다. 그럼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 아무거 나라도 괜찮으니 이야기해보자고 한다.
일찍부터 꿈을 정한 아이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많은 학생들이 고민하고 방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걸 보고 어른들은 그러면 안 된다고 너의 재능을 찾으라고 재촉하곤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볼펜처럼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최대한 많이, 멀리 둘러보고 그래도 주저하고 있다면 위의 볼펜이야기를 들려주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미래의 내 직업을 억지로 정하는 데 시간과 정성을 쏟는 것보다는 지금 내가 잘하는 것, 재밌는 것에 집중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거창한 게 아니더라도 말이다. 먹는 걸 좋아하고 맛을 잘 구분한다면 그것에 몰두해도 좋고, 친구들 상담을 잘해준다면 상담 기법 책을 읽어봐도 좋고..
모든 사람이 천재일 순 없다. 비록 평범한 사람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아름답고 수수께끼 같은 길들을 찾아나갈 수도 있다. 우리는 '영재관'에 살았던 비영재였지만 나도, 함께 살았던 언니도 나름의 길을 잘 찾아나갔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