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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Oct 24. 2019

사진과 빛, 그리고 자연이 품은 역사

테오 코트, <화이트 온 화이트> 부산영화제 상영특집(3)

*2019 부산영화제 상영특집(1), 부산영화제 상영 기대작리뷰입니다.

*아트렉처가 프레스로 참여한 취재리뷰입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128



"대상 세계의 시각적 현상들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 의미 있는 것은 느낌 그 자체로서 그것이 환기되는 배경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다."




1950년대 미국화단에는 색면 회화와 액션페인팅이 주류를 이루며 모더니즘 끝자락을 극단적인 유미주의로 장식했지만, 사실 절대적 추상의 과업을 이룩한 것은 1910년대와 1920년대의 화단을 주름잡았던 말레비치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의 대표작 <흰색 위의 흰색 사각형(white on white)>는 미국의 추상 화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지칭하곤 하는 일련의 숭고함도 엿볼 수 없고, 액션페인팅의 즉흥성과 혼돈 또한 느낄 수 없다. 그 작품은 절대적인 무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본 작품의 느낌은 절대적 공허, 삶과 세계의 무상성, 어떤 무한한 세계로의 이행, 그리고 극단적인 순수성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50년대의 추상이 숭고를, 60~70년대의 미니멀리즘이 내면을 읽어낼 수 없는 외피의 당혹스러움을 추구했다면, 말레비치의 추상은 극도의 허무주의, 극복할 수 없는 죽음과 無의 운명에 다름 아니었다. 그 하양은 우리의 삶의 모든 것들 뒤덮고 종착역을 가리킨다. 한편으로 그 하양이 우리가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이라면, 불완전한 인류는 그것마저도 끌어안아야 하리라. 또한 하양으로 뒤덮여짐으로써 우리의 삶이 새롭게 집필될 수 있는 하양의 캔버스가 되었다면, 인류는 또 다른 가능성의 희망이 열린 것이리라. 하지만 하양이 현존하는 모든 삶을 뒤덮고 새로이 집필할 만큼 그것은 가치 있는 일인가?



말레비치, 흰색 위의 흰색 사각형, 1918



이 같은 말레비치의 회화와 동명의 제목을 가진 테오 코트 감독의 <화이트 온 화이트>는 서구의 시선에서 결코 순일하지 않은, 추하게 보이는 세계에 그들의 교조적이고도 편협한 하양을 덧칠하여 그들만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려는, 그 폭압적인 덧칠을 폭로하는 극이다. 즉 말레비치와 유사한 작업이나 그 하양의 의미는 정반대라 할 수 있다. 차가운 겨울의 풍광, 우리는 그 혹독한 날씨에 얼어붙어 행동과 운동이 둔해진다. 이러한 겨울을 바라보는 살아 움직이는 일련의 시선에 기인한 것일까. 영화는 정적인 운동감이 강조된다. 대지주 파커가 소유한 널따란 대지를 포착함에 영화는 고정된 카메라를 필두로 마치 20세기 개척시대의 겨울 풍경화를 보는 듯한 롱숏을 펼쳐낸다. 이윽고 페드로, 사라, 아우로라와 같은 인물들의 등장에 서서히 영화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조차 대단히 수동적이다. 영화는 패닝 및 틸트를 통해서만 움직이기에 어떤 고정축을 벗어나지 않는다. 파커가 '소유'한 그 인물들은 마치 그 대지를, 또한 그의 통제로서의 카메라를 벗어날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줌인 또한 이와 같은 수동성을 강조하는 연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순수한 하양으로서의 원주민의 역사를, 백인들의 더러운 위선으로서의 하양으로 짓밟고 덧칠하려는, 멀리서 보면 하얗게 아름다운 롱 숏의 민낯에 깊숙이 다가가려는 움직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롱테이크도 이 같은 줌 인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그저 파편만이 남아있고, 그것이 재빠르게 흘러가며 담아내지 못한 시간들은 영화는 몸소 응축해내는 것이리라.


영화 포스터



영화는 페미니즘과 후기식민주의적인 담론을 이끌어낸다고 볼 수 있다. 페드로는 사진작가다. 영화의 시작은 그가 파커의 아내가 될 사라의 사진을 찍으며, 그 거대하고도 삭막한 저택에 발을 내딛으며 시작된다. 허나 아내가 될 소녀는 대단히 어리다, 10대 중반으로 추측된다. 결혼하기에 너무도 부적절한 어린 소녀이기에, 소녀를 주축으로 한 결혼의 수동성이 폭로된다. 아이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아우로라뿐이다. 페드로의 말에도 그녀는 포즈나 표정을 쉬이 바꾸지 않는다. 파커의 충실한 심복에 다름 아닌 아우로라에게만 오직 종속된다. 아이는 오직 들을 뿐이며, 결코 발화하지 않는다. 초반에는 마치 언어장애 및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허나 그렇지 않더라도 소녀는 파커에 의해 입을 틀어막고 귀만을 열어놓는, 이 같은 장애를 앓아야만 한다. 영화는 사진촬영의 과정을 통하여 남성에 의해 여성이 귀속되는 당대의 역사를 고발한다. 페드로는 채광을 조절하고, 소녀의 포즈 및 표정을 통제한다. 홍조를 띠기 위해서 아우로라는 아이의 뺨을 꼬집는다. 아이가 처한 굴레는 가히 폭력적이다. 소녀가 끝끝내 철퍼덕 주저앉거나, 그 역겨운 운명에 구토하려는 장면만이 유일한 진실의 순간일 것이다. 허나 그 순간은 결코 사진으로 기록되지 않는다. 소녀의 이 같은 운명은 사진촬영 과정과 더불어 하양의 속성에도 기인한다. 사라의 몸에는 웨딩드레스가 강제로 입혀져 있다. 하양은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절대성에 상응하는 색채이기도 하다. 검정이 우리가 죽음으로서 다가갈 수 있는 절대성이라면, 하양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가늠할 수 없는 절대성으로서 언제나 우리는 삶 이전으로 넘어설 수 없다. 소녀의 하얀 웨딩드레스는 이 같은 넘어설 수 없는 운명의 속성을 지닌다.



영화의 한 장면



생명력이 피어나 마땅할 하양에는 소녀의 주체적인 생동함이 부재할 것이다. 그것을 입힌 아우로라와 파커에 의해서 소녀는 덧칠될 것이다. 때때로 자욱한 눈안개가 쌓이고 싸리눈이 휘날리는 영화의 풍경은 감독의 동향 시네아스트인 파블로 라라인이 구축한 미장센과 유사하다. 그것을 형성하는 태도도 유사할 것이다. 소녀의 역사나 후술할 원주민의 역사가 백인들에 의해 하양으로 덧칠되어 희미해져있는 그 현실을 드러내는 연출이리라. 영화는 단절이 도드라진다. 페드로는 초원에 널브러진 아우로라를 발견하고, 그녀를 안에 들이기 위해 파커의 집을 거칠게 두드린다. 하지만 그가 거느린 하녀가 가혹한 겨울의 추위에 쓰려져도, 주인은 무심하다. 파커의 집은 굳게 닫혀있어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다. 또한 극의 전체에 거쳐 파커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으며, 또한 파커의 몇몇 심복들 또한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내비치고 일방적으로 발화할 뿐이다. 그들과 쌍방의 소통을 행할 수 없다. 반려견을 언급하는 대화에서 도드라지는 개와 사람의 주종관계처럼, 파커와 그 내부에 종속된 사람들 간의 폐쇄성이 짙게 느껴진다.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그의 집, 창문조차 모두 막아놓아 빛도 스며들지 않는 폐쇄적인 그 집을 종들은 결코 넘어설 수 없다. 원주민 학살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 진위는 폐쇄성이 대두된다. 나무들이 빼곡히 솟아올라 학살의 진실을 가려낸 현장 속에서, 살인은 이뤄진다. 타인과 타인 간의 관계도 그렇다. 긴 탁자 속에서 두 개인들은 결코 하나의 프레임 안에 포착되지 않으며, 타인에게 닿기 위해서 또 다른 타인들이 필요한 실정이다. 영화는 이 같은 이중, 삼중으로 매개되고 번역되는 현장을 구축하여 진실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당대의 역사를 드러낸다.



허나 영화는 그러한 불투명한 세계에 빛을 비추는 작업을 수행한다. 2.35:1의 널따란 화면비로 비춰지는 영화의 연출이 대단히 갑갑하고, 또한 불투명함이 강조된다면, 4:3의 화면비로 페드로가 포착하는 사진의 순간은 답답한 프레임임에도 불구하고 투명하고 해방감 있게 느껴진다. 그것에는 칠레 티에라 델 푸에고 현의 개척자들의 삶이, 그리고 그들에게 딸려온 여성들의 삶이 생생히 녹아있다. 페드로의 시선은 지금까지는 그 시대를 객관적으로 포착하려는 태도로 느껴진다. 그의 뒤편에 눈 폭풍이 휘몰아쳐도 그는 사진 찍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다. 생생한 삶의 현장이 포착된 그 사진들을 말이다. 또한 원주민 학살의 진위를 드러낸 것도 그들이 높다란 나무들로 가득한 숲에 횃불을 쥐고 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밤과 숲의 속성을 빌려 야만성을 은닉하려 했지만, 결국 그들이 쥔 횃불에 의해 잔혹함은 폭로된 것이다. 또한 그 불은 노예화되어 성적으로 유린당하는 원주민 여성들의 삶을 드러낸다. 원주민 여성들은 사라와 마찬가지로 백인 남성들에 의해 옷이 입혀진다. 그 옷은 가죽옷 이긴 하지만, 곧 백인이 지니는 하양의 속성에 상응하리라. 백인들이 믿는 순수성, 그리고 그들의 존재를 은닉하려는 폭압적인 하양, 영화는 일단 지금까지는 그 폭로작업을 페드로의 시선을 통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과연 페드로가 일련의 사명감에 의해 생생한 삶의 현장이 드러난 사진을 찍은 것인지를 반문해봐야 할 것이다. 그가 눈 폭풍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찍은 그 장면은 대단히 경이로워 보였다. 하지만 페드로를 고용한 것은 파커다. 그는 결코 자의적으로 사진을 찍을 수 없다. 그는 처음을 자의적으로 사진을 찍는다. 파커의 명령 없이 사라의 사진을 찍는 것이다. 페드로 또한 파커와 마찬가지로 그 어린 소녀에게 대단히 역겨운 비윤리적인 욕망을 품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사라를 안타까워 한 것은 단지 그가 소녀를 소유할 수 없는 남성성의 좌절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예술과 아름다움의 이름으로 관능적이고도 외설적인 사라의 사진을 찍는다. 어깨끈이 살짝 내려가 있기에 어떤 행동의 이후 흐트러짐을 내포하고, 또한 소녀가 처한 잔혹한 상황과는 대단히 거리가 먼, 달콤한 잠에 빠진 순간을 포착한다. 이 같은 사라를 마주하는 페드로의 시점은 어떠한가. 사라의 방문에 페드로는 앉아 있다가 일어선다. 앉아 있을 때는 눈의 시선이 강조되었으나, 일어선 이후에는 그를 틸트로 포착하지 않아 하반신, 즉 욕망의 시선이 강조된다. 영화는 그가 직접적으로 소녀를 다루는 방식과 연출을 통해서 페드로의 타락한 시선을 고발한다. 페미니즘 및 후기식민주의 관점으로 폭로되는 티에라 델 푸에고의 역사는 페드로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본 장면을 통해서 페드로 또한 소녀에 대해 객관적인 역사서술이 불가함을 드러내고, 예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과연 비정치적인, 그리고 개인의 욕망과 무관한 아름다움이란 가능한 것인가. 페드로는 끝끝내 파커에 굴복하여 원주민 학살에도 동참하지 않던가. 그것은 욕망과 생존이 뒤얽힌, 즉 역사서술에 있어 필연적인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와 더불어, 이 같은 역사와 이념에 종속되는 예술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당대의 역사를 고발하는 그 시점은 무엇이란 말인가. 무관심적으로 거주민들을 포착하던 페드로의 찰나적인 객관성과, 그의 타락을 목도하고 사라에게 관심이 없는 아우로라의 기계적인 시선이 직조된 결과물이란 말인가. 허나 본 극에서 어느 누가 이 같은 생생한 풍경을 죄다 담아낼 수 있담 말인가. 결국 그들이 일련의 찰나성을 보인다 한들, 그것은 파편에 그치고 이를 다 모아도 역사의 총체를 집대성할 순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빌리는 것은 카메라와 자연, 그리고 빛에 다름 아니다. 사라는 사진이 찍히는 과정 속에서만 등장한다. 남아있는 것은 사라의 사진일 것이다. 영화는 사진을 둘러싼 그 순간을 객관적으로 추측하고 이를 통해 역사를 시청각화하는 것이리라. 아름답게 찍혔으나 불만이 많아 보이는 그 사진에는, 타인에 의해 정제된 미와 소녀의 수동성이 얽혀있다. 그 통제된 아름다움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소녀의 수동성은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를 영화는 거슬러가는 것이리라. 거주민들을 리얼리틱하게 찍은 사진은 굳이 그 과정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사진이 찍힌 연유로서 파커에게 종속된 페드로의 위치를 탐구할 뿐이리라. 회화라면 소녀의 찡그린 표정 까지도 주관적인 태도로 이상화할 수 있겠지만, 현실의 소녀는 아무리 내색하려 하지 않아도 불쾌한 표정이 드러나고, 사진은 이를 객관적으로 포착한다. 아무리 왜곡하고 조작한다 한들, 그 과정의 진실, 객관성이 사진에 녹아있는 것이리라.



또한 페드로의 부정한 욕망이 고발한 이후, 지금까지 지상에서의 시점 숏을 강조한 연출로부터, 하이 앵글 구도에서 세계를 관망하는 구도의 변주를 선보인다. 원주민은 태양이나 달을 바라보곤 한다. 그들로부터 빛이 쏟아져 나온다. 빛은 결코 현재적인 속성이 아니다. 빛은 과거로부터 거슬러오는 것이다. 그 하이 앵글은 당대의 역사를 포착할 빛의 시점에 다름 아닐지 모른다. 또한 파커가 소유한 대지로부터, 그들은 개척해야하는 황무지로 서서히 나아간다. 이전까지의 롱숏이 파커의 소유에 다름 아니었다면, 황무지의 롱숏은 파커의 소유가 아니다. 그의 대지는 파커의 의도에 의해 하양으로 덧칠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화가 포착하는 생생한 자연은 파커의 손길이 미처 닿지 못한 곳이다. 그것 자체만으로 아름답고 숭고하기도 하지만, 그 진위를 알 수 없는 영화의 익스트림 롱숏은 자연이 품은 역사에 상응할 것이다. 당대를 살아온 인류는 결코 그 시대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후반부에 페드로가 사격을 익히기 위해 자신의 집으로부터 파커의 대지로 진입하는 장면이 포착된다. 거기에서는 폐쇄성으로부터의 해방감이 도드라져야만 하겠지만, 파커의 사람으로서 원주민 학살을 위해 사격을 익혀야만 하는 폐쇄성에서 폐쇄성으로 이행하는 갑갑함이 강조될 뿐이다. 어떻게든 벗어날 수 없는 파커의 대지에 살아가는 이들은, 그들과 주인이 행한 야만적인 핸드 헬드의 실상을 진술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무관심적이고도 객관적인 시선에서만이 가능할 것이다.




영화는 사진으로부터 역사를 유추하고, 또한 빛과 자연이 야만의 시간을 몸소 간직했으리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연의 일부로서 그들이 학살한 셀크족의 망령이 흰 옷이 덧입혀진 채로 나타나며, 자연은 비극의 역사를 품고 있으리라는 믿음을 줄곧 견지한다. 또한 개척을 합리화하는 선전사진을 찍는 결말의 롱테이크로 백미이다. 그것은 영화가 남겨진 사진들을 토대로 역사를 파헤치고 재구성하려는 태도를 보여줌과 동시에, 이 같은 왜곡과 이상화를 일삼은 서구가 비서구를 하양으로 덧칠하는 역사가 얼마나 긴 시간을 토대로 진행되었는지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씬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덧칠된 하양 위에서, 망각되고 휩쓸려가버린 것들의 시간은 쓰여질 수 없다. 그것을 덧칠한 주체들의 시간만이 묘사된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페드로는 이 같은 야만의 역사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순일한 하양으로부터 생명력이 태동했을 티에라 델 푸에고의 역사, 허나 그곳에 백인들이 순수라 주장하는 위선적이고도 고압적인 하양이 덧입혀진다. 이는 백인과 비백인,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은 온당 자신들의 하양으로 그 세계를 뒤덮지 못했다. 희끗희끗 남아있는 어떤 얼룩들을 영화는 횃불을 들고 조심스레 뒤따라간다. 이윽고 그것을 벗겨내어 그들의 하양이 대단히 가혹했다는 것을 폭로한다. 그 가혹한 하양, 거기에는 서구의 모든 역사가 내포되어 있다. 식민주의와 남성우월주의, 그리고 이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당대 인류의 역사, 그것은 덧입혀진 하양에 의해 변색되고 일부 지워졌을지라도, 분명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인 진실일 것이다.




글_아트렉처 에디터_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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