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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진 May 12. 2020

아이 웨이웨이

아이 웨이웨이 Ai Weiwei

권력이 예술 활동을 방해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에게는 2014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있었다.


아이 웨이웨이. 반정부 예술가로 불린다. 2015년 살아있는 위대한 작가 1위에 올랐다.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100인 예술가에 들었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블로그 운영했을 때 세계적 작가는 아니었다.

(좌) 쓰촨성 지진으로 잃은 아이들, 사진:Paula BronsteinⓒGetty Images (우)베이징 올림픽 스타디움 새의 둥지 ⓒwikipedia

2008년 5월 12일 쓰촨 성 지진이 일어났다. 사망자 6만 9천 명, 부상자 37만 명이 나왔다.  중국은 8월 베이징 올림픽에 주력하고 있었다. 웨이웨이는 새의 둥지"Bird's Nest"라는 새로운 스타디움 건설 자문을 하고 있었다. 정부는 지진 피해를 알리기보다 스타디움 홍보에 열을 올렸다. 웨이웨이는 정부의 부실한 조사를 알리기 위해 봉사자들과 함께 지진 지역으로 가 인터뷰했다. 정부가 숨기는 아이들 사망자 수가 오천명이 넘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인터뷰 기록과 영상들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

지진으로 사망한 아이들 이름ⓒhttps://miesby.wordpress.com/2013/04/19/artist-ai-weiwei-pt-2/

2009년 블로그에 지진으로 사망한 5385명 아이들 이름과 생일을 올렸다. 중국 공안은 블로그를 강제로 내렸다. 함께 지진 현장을 찾았던 자원 봉사자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아이 웨이웨이 <해바라기 씨들>2008 도자기, 테이트 모던 ⓒWikimedia

손대지 마시요. 전시장에 들어서면 자주 보는 문구이다. 그러나 이 작품 <해바라기 씨들>은 밟고 올라갈 수 있다. 어떤 관객은 진짜인지 입에 넣어본다. 2010년 테이트 모던 터빈홀을 들어서자 해바라기 씨들이 1000평방 미터 바닥을 덮고 있었다. 150톤 넘는 무게, 1억 개가 넘는 해바라기 씨들었다.


탄광에서 캐낸 큰 덩어리를 물레방아로 빻아 쪼갰다. 물에 섞어 진흙처럼 만든 후, 해바라기 틀로 찍었다. 징더전 마을은 베이징에서 천 킬로미터 떨어진 도자기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5, 6년 이상 도자기 굽는 일을 한 사람들이었다. 마을 사람들 1600여 명이 모여 해바라기 씨를 하나씩 손으로 색칠했다.

테이트 모던 터빈홀 2010ⓒTate Modern

마오쩌둥은 루이 14세처럼 자신의 이미지를 태양으로 표현했다. 마오쩌둥은 말했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바라보듯 모든 중국 인민은 나를 바라봐야 한다." 마오쩌둥 집권기에 빈번한 굶주림으로 어려운 시기가 있었다.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은 해바라기였다.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해바라기 씨 위에 올라선 사람들 ⓒIndependent news

씨앗은 정치적 억압의 상징이다. 동시에 씨앗은 작은 것도 나누는 나눔의 상징이다. 작은 씨앗들은 음식의 희망, 친절함의 희망이다. 웨이웨이의 해바라기 씨 작품은 먹을 수 없다. 보기에 살아있는 씨앗 같으면서도 죽음의 씨앗이다. 거대한 씨앗 숫자와 웅장함, 그 안에 들어있는 모순은 중국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2011년 2월 런던 소더비에서 해바라기 씨의 일부 100킬로그램이 낙찰되었다.

Sunflower seeds 2010ⓒAi weiwei

2009년 8월 웨이웨이는 청두에서 구금된 동료의 재판 증언을 하러 갔다가 경찰들에게 구타당했다. 이후 두통이 심해지고 9월 뇌출혈로 쓰러졌다. 2010년 노벨상 후보자 류샤오반 석방을 요구하다 두 달 동안 자택 연금을 당했다. 중국 공안은 예고 없이 굴착기를 밀어 그의 작업실을 철거해 버렸다.


2011년 4월 베이징 국제공항에서 홍콩으로 가려다 중국 정부에게 여권을 빼앗겼다. 80일간 구금당했다. 50여 명 경찰들이 웨이웨이 작업실에서 노트북과 하드 드라이브를 가져갔다. 예술계와 인권 지도자들이 웨이웨이 석방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4년 후 2015년 7월 다시 해외 활동의 자유가 주어졌다. 여권을 돌려받고 베를린으로 떠났다. 베를린 국립 예술 대학교는 몇 년 동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객원 교수를 맡는다.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천안문 광장, 파리 에펠탑, 베니스, 백악관 등 세계 유명 관광지 앞에서 오른 손가락과 발을 내밀어 사진을 찍었다. <원근법 연구 Study of Perspective> 연작이다.


사진 속 가리키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닌 건물이다. 우리 가치는 타인이나 권력 기관에 의해 부여받은 것이 아니. 우리는 우리 스스로 계속 표현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반어적으로 말하고 있다. 빌딩만 가리키고 있는 이유는 사람들은 변할 것이고 움직일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구명조끼로 덮인 베를린콘르트 하우스 기둥 ⓒGettyimageskorea

웨이웨이는 수백만 명의 난민 인권 옹호에도 관심을 가졌다. 시리아와 이라크 난민들 레스보스 섬을 거쳐 유럽으로 왔다. 난민이 착용했던 조끼 1만 4천 개를 레르보스 당국에게서 제공받았다. 조끼로 베를린 콘체르트 하우스 기둥을 덮었다.

구명조끼로 덮인 베를린 콘트르 하우스 기둥ⓒ Gettyimages

"난민의 위기는 없다. 단지 인간의 위기가 있을 뿐이다. 난민을 다루면서 우리는 인간 기본적인 가치를 잃었다. 불확실한 시기에 우리는 관용, 동정심과 서로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 웨이웨이 -


아이 웨이웨이 <He Xie> 2014 베를린 마킨 그로피우스 바우 전시회 ⓒGettyiamges

3200개 도자기로 게 모양을 만들었다. 그 위에 색칠했다. 작품 제목인 He Xie는 '조화로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중국 공안이 겉으로 내세우는 '조화로운 사회의 실현'과는 반대로 인터넷 검열하는 현실을 풍자했다. 



웨이웨이는 행동과 예술 사이에 존재한다. 어떤 행동이 예술이고 아닌가? 그 경계를 흐리게 한다. 정치적인 메시지를 소셜미디어에 내뱉는 표현들은 사회적 부조리를 상징과 은유로 표현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개인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나온 것들이다. 그는 말한다.



예술에 대한 나의 정의는 항상 똑같았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
새로운 의사소통의 방법에 관한 것이다.
박물관에 전시하거나 벽에 거는 일은 결코 아니다.

 예술은 국민의 중심에서 살아야 한다.








참고문헌

https://publicdelivery.org/ai-weiwei-he-xie-cra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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