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현 감독이 10년 만에 들고 온 <사냥의 시간>의 아이들은 전작인 <파수꾼>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파수꾼>의 아이들이 고등학생이었던 것에 비해 <사냥의 시간>의 아이들은 20대 중반의 나이로 보이지만, 그 차이는 유의미한 것은 아니다. <사냥의 시간>은 장호(안재홍)와 기훈(최우식)의 투닥거림으로 시작한다. 10년 전의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벌였던 그러한 투닥거림. 준석(이제훈)이 출소하여 상수(박정민)를 만나 돈을 갚으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은 <파수꾼>의 구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거친 욕설을 섞으며 협박하는 이제훈과 눈을 내리깔되, 거절의 의사를 확실하게 내비치는 박정민의 구도. 윤성현 감독은 캐릭터를 구축함에 있어서 전작에서 많은 것을 차용함은 물론, 전작과 차이를 두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파수꾼>의 아이들은 10년이라는 시간을 겪어, <사냥의 시간>으로 다시 찾아왔지만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10년이라는 시간 자체. 더 정확히는 10년이라는 시간이 만들어 낸 공간의 변화이다. 왜 사이버펑크일까, 왜 포스트-아포칼립스일까에 대해 답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지하고 싶은 것은 <파수꾼>의 고등학교가 10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폐허가 된 대한민국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이다. <사냥의 시간>은 조금도 성장하지 않은 아이들이(또는 사회로부터 성장을 억압받은 아이들이) 변화한 공간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담는다.
지난 목요일 <사냥의 시간>이 넷플릭스를 통해 처음 공개되었을 때, 인터넷을 통해 좋지 않은 평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덕분에 영화에 대한 기대를 내려두고 감상하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느낀 것은 기대보다 괜찮다는 단상이었다. 곧, 영화에 대해 제기되는 비평들과 나의 감상 사이에 어떤 이질감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것의 정체를 깨닫기 위해서는 영화를 다시 한번 볼 수밖에 없었다. 연이틀 영화를 감상하게 된 나는 여전히 <사냥의 시간>이 세평 이상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하며, 현재 영화에 대한 지적은 다른 관점에서 제기되는, 일종의 오독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르 영화로서 <사냥의 시간>을 바라보았을 때, 느끼는 실망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냥의 시간>이 액션 영화의 장르적 쾌감을 충실하게 부여하는 임무나 스릴러 장르로서 하나의 탄탄한 세계관을 구축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뜻하지 않은 이 영화의 변호인이 된 나로서 이야기하고 싶은 점은, 장르영화에서 바라보았을 때 보이는 실패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꽤나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지점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기껏 잡은 도망자들에게 5분 동안 도망갈 수 있을 만큼 도망가라는 문제의 그 대사. 정확하게 그 대사를 기점으로 영화는 이등분된다. 그 대사를 기점으로 유희의 주체가 되었던 아이들은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개연성의 부족으로 지적되는 한(박해수)의 목적성. 한은 원하는 것이 없다. 문제가 되었던 CCTV의 하드디스크는 진작 손에 넣었고, 아이들이 훔쳐간 돈을 찾는 것도 아니다. 한에게는 아이들을 굳이 쫓아 죽일 이유가 없으며, 반대로 다 잡은 아이들을 굳이 살려줄 이유도 없다. 무목적성은 유희의 이음동의어이다. 한은 도망친 아이들을 사냥하는 유희의 주체이고, 아이들은 사냥당하는 순간까지 끝없이 도망가야 할 유희의 대상이다. 아이들은 분명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파수꾼>에서 아이들은 투닥거리면서 유희를 즐기는 주체였다. 10년 후에 준석이 교도소로부터 출소했을 때도, 아이들은 10년 전 그때처럼 그들의 유희를 즐기고 있었다. 주지했듯이 변한 것은 10년이라는 시간이며, 그 시간이 어떠한 작용으로 만들어낸 한국이라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공간으로 진입할 것을 강요한다. 봉식(조성하)의 대사처럼 아이들이 머물렀던 전자의 공간은 법이라는, 사회라는 테두리가 적용되는 공간이라면, 그들이 진입할 새로운 공간은 그곳으로부터 단절된 어떠한 곳이다. 어느 순간 아이들은 유희의 주체에서 유희의 대상이 되었고, 한의 그 대사를 통해 그들은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다.
아이들이 진입한 새로운 공간은 관계의 역전을 기대할 수 없는 곳이다. 그 세계에서 한은 영원한 유희의 주체이며, 아이들은 영원한 대상이다. 영원히 쫓기는 사냥감은 결코 사냥꾼을 공격할 수 없다. 관계의 역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동시에 영화가 액션 영화로서 장르적 쾌감을 주기 어렵다는 말이 된다. <사냥의 시간>에서 준석과 장호, 기훈은 끊임없이 도망칠 수밖에 없고, 그들은 결코 사냥꾼을 죽일 수 없다. 그것은 한에게도 마찬가지인데, 봉수 역시 한이 아이들을 도망가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굳이 본인의 손으로 한을 죽이겠다고 선포한다. 한은 언제까지나 봉수에게 유희의 대상이며, 한은 결코 그 관계를 전복할 수 없다. 아이들이 진입한 세계는 폐쇄적이고 수직적인 공간이며,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한이 준석의 손으로 죽음으로써 통쾌함을 관객에게 주기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사냥의 시간>은 스릴러나 액션 장르의 영화보다는 유희의 주체에서 대상으로의 진입을 강제하는 한국이라는 사회에 놓인 청춘에 대한 우화에 가깝다.
오독의 잘못을 관객에게 돌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며, <사냥의 시간>이 훌륭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상업영화가 다수의 관객들을 설득하지 못하는 것을 관객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은 안일하며, 거만하다. 분명 영화의 캐릭터들이 주고받는 정서에 공감하기 어려우며, 캐릭터를 구축함에 있어 몇 가지 설정들은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이를테면, 대답을 하지 않고 자는 척을 하는 장난을 좋아하는 장호의 모습은 캐릭터를 부여하기보다는, 마지막의 이별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작위적인 설정 이상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굳이 영화에 대한 변호를 자처하는 것은 유튜브라는 공간에서 주로 등장하는, 개연성이라는 단 하나의 기준만으로 영화를 평가하는, 새로운 종류의 영화 비평의 유행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개연성이나 장르 영화의 문법에서 바라보았을 때의 <사냥의 시간>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는 분명 다를 것이라 믿는다. 동시에 다양한 관점의 가능성을 파생하는 비평의 역할을 믿는 사람으로서, <사냥의 시간>은 보다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영화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