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방문하다.
“내 소망은 죽어서도 영원히 사는 것.”
‘안네의 일기’의 저자 안네 프랑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안네의 일기.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유대인 탄압과 홀로코스트가 횡행하던 시절, 그 불합리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10대 소녀가 남긴 기록. 단순히 당시의 시대상과 은신처에서의 삶의 방식을 기록한 것뿐만 아니라, 작가를 꿈꾸던 소녀가 자기 자신과 꿈, 그리고 미래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전쟁은 왜 일어나는지, 왜 모든 사람은 화합해서 살아갈 수 없는지에 대한 고뇌가 적혀있는 이 책은 일반적인 전쟁문학 이상의 가치를 갖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나는 어린 시절 이 책을 굉장히 좋아했다. 당시로써는 그저 나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는 또래 소녀의 글에 흥미를 느끼고 동경했으며, 한편으로는 가엾게 여겼다. 어린 마음에 안네를 따라 일기장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일기를 쓴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 책은 내가 당시의 역사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나치 독일이 인종차별과 국가주의를 앞세워 저지른 만행들과, 나아가서는 ‘세계’라는 접두어가 붙을 정도로 큰 규모로 행해진 두 번째 전쟁에 대해서도.
얼마 전 가족여행 도중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타이트하게 짜여진 일정 속에서 실질적으로 베를린을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불과했지만, 하루 종일 쉴 틈도 없이 돌아다녀도 모자랄 정도로 볼 것이 많았다. 파리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랜드 마크가 있는 것도, 로마처럼 고대 문명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도 아니지만, 독일은 20세기 이후의 근현대사에 영향을 많이 끼친 나라였고 베를린은 이에 대한 인상적인 유적지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도시였다. 냉전의 상징이자 독일의 분단에 대해 알 수 있는 베를린 장벽과 기념박물관, 체크포인트 찰리, 독일 전체의 랜드 마크로 손꼽히는 브란덴부르크 문, 국회의사당을 비롯해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화려한 양식의 건물들. 시선을 사로잡는 수많은 볼거리 속에서도 가장 인상 깊게 남았던 것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었다.
2차 세계대전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대량 학살)로 인해 목숨을 잃은 유대인들을 추모하고, 저들이 저지른 과오를 결코 잊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남겨놓은 공간. 번화한 도심 한가운데에 위치했음에도 어쩐지 동떨어진, 다른 세상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주었던 그곳에는 수많은 콘크리트 비석들이 있었다. 무릎 높이에 불과한 것부터 5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비석까지. 어떤 글귀도 그림도 새겨져 있지 않았지만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는 공간. 화창한 베를린의 하늘과 대비되는 삭막한 진회색 적막 속에서 저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는 것은, 분명 홀로코스트라는 말과 그 비석들이 기억하고자 한 역사의 무게일 테지. 아니, 나치 독일에 의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유대인은 600만 명에 육박한다. 그 모든 삶들을 나 한사람이 온전히 헤아릴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문득 어린 시절에 읽었던 안네의 일기가 떠올라서. 죽어서도 영원히 살고 싶다던 소원대로 자신의 책 속에서 열두 살의 나이에 멈춰 영원히 살아가게 될 소녀가, 좋아하는 남자아이의 말에 기뻐하고 부모와의 마찰에 슬퍼했으며 전쟁은 왜 일어나는지, 왜 모든 사람은 싸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지에 대해 고찰하던 속 깊은 소녀의 이야기가. 종내에는 수용소에 끌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이야기의 결말이 떠올라 버려서. 과거의 비극을 기록해둔 그 공간은 내게 있어 더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콘크리트 비석들만이 끝도 없이 이어진 공간의 한가운데에는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자료를 모아둔 전시관이 있었다. 조명마저도 어두워 이곳을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숙연한 기분을 느끼게 하던 이곳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역사적인 배경부터 당시 유럽의 모습, 유대인 탄압의 실태를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도중, 그리고 직후에 나치가 저들의 악행을 감추기 위해 많은 자료를 파기한 와중에 홀로코스트로 인해 세계 각국에서 발생한 희생자 수를 1명 단위까지 자세하게 나타낸 자료나 그 많은 희생자들의 이름과 간단한 내력을 기록해둔 자료들을 보면서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아마 그만큼 독일이 자신들의 과오를 잊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뜻이겠지. 또한 유럽 전역에 퍼져있던 유대인 절멸 수용소(유대인에게 강제부역을 시키던 노동 수용소와 달리, 정말 유대인을 ‘절멸’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수용소를 뜻한다.)와 가스실에 대한 자료도 대단히 인상 깊었다.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탈출하는 데에 성공한 생존자의 음성을 들으면서, 스스로가 노동 가능한 인력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노동할 수 없는 인력은 즉시 가스실 행이었으니까.) 아이는 나이를 올려 말하고 노인은 나이를 내려 말해야만 했다는 자료를 보면서, 또다시 이전에 읽었던 ‘안네의 일기’의 비극적인 결말이 오버랩 됨과 동시에 안네뿐만 아니라 수용소에서 희생당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대인들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전시관을 다 둘러보았을 즈음에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슬픔과 아픔,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와 함께 전쟁은, 이런 비극은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근대사와 2차 세계대전에 관심이 있다면, 또는 안네의 일기를 비롯한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창작물을 인상 깊게 본 적이 있다면. 아니,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만약 베를린에 들를 기회가 생긴다면, 잠시 시간을 내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 방문해 보는 것은 어떨까? 두 번 다시 반복되어선 안 될 피로 얼룩진 과거의 민낯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큰 교훈으로 다가올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 아픈 과거를 넘어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고,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을 현실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그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덤으로 자신들의 상흔을 은폐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올곧게 마주한 독일의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는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