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보람차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출근했으나, 사무실 분위기는 냉랭함 그 자체였다.
담당임원은 그룹 실세로 소문난 고압적 인물이었다.
서류를 집어던지는 것은 예사이며, 인사권을 전횡했으며, 부하들에게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는 일도 다반사였다.
임원방에서 보고를 마친 직원들이, 마치 조선시대 왕을 알현하고 나오듯 뒷걸음질 쳐 나오는 웃지 못할 장면도 여러번 목격하였다.
해당임원에게 잘 보일 궁리만 하느라,
새로 온 경력직원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이는 없었다.
2~3일 간 분위기를 관찰한 나는 낙담하였다.
M&A 업무에 한창 재미를 느끼고 있었고,
마침 이 회사도 여러 Deal 계획이 있다고 있다고 하여 포부를 갖고 입사했는데,
딱딱하게 굳은 시멘트 같은 조직에,
새로 굴러 들어온 돌이 자리잡을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쿵쾅거리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나에게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과장님, 안녕하세요. 휴가 다녀오느라 이제 인사드립니다.
저 M&A 업무 너무 배우고 싶은데 많이 가르쳐 주세요.
오래 기다렸습니다."
송 대리는 현업조직에서 일하다가, 1년 전 M&A 실사 때문에 기획실에 합류한 직원이었다.
딜이 끝난 후에도 기획실 남아 여러 건의 M&A 실사를 진행했지만, 아무도 업무를 가르쳐주지 않아 혼자 꾸역꾸역 실무를 해왔다고 했다.
다른 직원들과 달리 생기있는 그의 모습에 호감이 갔다.
그는 재무/회계/법무 등에 약했지만, 적극적인 질문과 공부를 통해 관련지식을 빠르게 습득해갔다.
우리 둘은 형제처럼 붙어 다녔고, 퇴근 후엔 소주 한잔 기울이며 고민을 나누곤 했다.
기획실 전체회식이 있던 날이었는데, 옆 팀 고참직원이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따르고 나에게 원샷을 강요했다.
처음 한 두잔은 억지로 마셨으나, 연속되는 요구에 내가 난색을 표하자 그는 막말을 퍼부었다.
명확한 이유는 없었고 그냥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 나는 몇 개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상사들의 신임을 얻고 있었는데, 그게 싫었던 모양이다.
그때 갑자기 송 대리가 나섰다.
아무 이유 없이 동료를 괴롭히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고참직원에게 대들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졌지만, 송 대리 덩치가 산만해서인지 게임은 싱겁게 끝났다.
송 대리는 성격 상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한다고 했다.
그 덕분에 학창시절에도 불량학생들을 처단(?) 하느라
곤욕을 치뤘다고 했다.
본인 꿈을 얘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웃기 때문에,
아주 가까운 친구 몇을 빼고는 얘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에게는 본인의 꿈을 공유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나의 꿈도 물었다.
나는 '200명 규모 기업의 CEO가 되어, 직원들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답했다.
3년이 흘러 나는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그리고 3년이 더 지난 지금 '180명 규모 기업의 CEO'가 되었다.
송 대리는 정책/행정을 공부하기 위해 KDI대학원에 진학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에는 글로벌 경험을 쌓기 위해 미국법인 주재원이 되었다.
귀국 후에는 본격적으로 정치의 문을 두드릴 예정이었다.
건강검진에서 종양이 발견되었고,
서둘러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수술은 잘 마쳤으나 항암치료가 필요할 수 있다는 소식을 추가적으로 전해왔다.
마음이 복잡했다. 체격도 건장했고, 늘 에너지 넘쳤던
송 대리가 아플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지리산 정상 천왕봉을 반나절만에 올랐던 우리였다.
많이 힘들텐데, 지금은 해줄 수 있는 것이 딱히 없다.
빠른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일 밖에는.
그리고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다.
나의 꿈은 이루었으니, 송 대리 이제 너의 꿈을 이룰 차례야!"
이 글을 쓰고나서 송 대리를 만났습니다. 다행히 종양을 조기에 제거하여 추가적인 항암치료는 필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는 또 다른 큰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소망을 품고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그의 앞 날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