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생 방석이 아니야

영어 바보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

by 구론산바몬드

나는 사립 남자 고등학교를 다녔다. 우리 학교는 남녀 공학 중학교와 붙어 있었고 운동장을 같이 사용했다. 야간에는 여고생이 중학교 교실을 사용했다. 우리가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있을 시간에 여고생은 수업을 받았다. 여고생들은 낮에 무엇을 할까 우리는 그게 늘 궁금했었다.


자율학습 시간에 감독 선생님의 눈을 피해 장난을 치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여고생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면 우리는 또 누가 짓궂은 짓을 했구나 하며 힘든 수험생활의 피로를 잊었다. 한날은 누군가가 풍선에 물을 넣어 여고생 교실 창문에 집어던졌다. 그럴 때면 여고 선생님이 씩씩거리며 우리 건물로 들어와 범인을 찾느라 한동안 난리를 피웠고, 우리는 모두 공범이 되어 침묵했다.


12월 학력고사를 얼마 앞두지 않았을 때였다. 우리는 여고 교실에 들어가 방석을 훔치기로 작당했다. 여고생의 방석에 앉아 시험을 치면 성적이 오른다는 미신이 팽배했던 때였다. 밤 10시 여고생들이 학교를 파한 시각 나를 포함한 3명이 중학교 교실에 숨어들었다. 채 5분도 되지 않아 우리는 방석 10여 개를 훔쳐 교실로 돌아왔다.


방석을 탐내는 친구들이 많았다. 모두 하나씩 차지하고는 이제 시험을 잘 칠 수 있을 거라는 비합리적 믿음에 흐뭇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의문을 제기했다. 이 방석이 여고생의 것인지 중학생의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곧 심각해졌다. 반드시 여고생의 방석이어야만 했다.


그때 친구 중 한 명이 문제를 해결해 주겠노라 했다. 영화배우 이미연과 소피 마르소를 비롯한 수많은 여자 연예인의 사진을 스크랩하는 것이 취미인 녀석이었다. 자기는 코가 예민하여 냄새만 맡아도 여고생의 방석을 골라낼 수 있다고 했다. 미심쩍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의 코에 우리의 운명을 걸었다. 방석에 코를 박고 킁킁 거리며 그는 10여 개의 방석 중 7개가량을 골라냈다. 다행히 내가 고른 방석도 그중 하나였다.


12월 내내 그 방석에 앉아 공부를 했고 학력고사장에도 가져갔다. 담임 선생님은 떨지 말라고 평소처럼 하면 된다 하셨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나는 떨지도 않았고 평소처럼 처참한 점수를 받았다. 여고생 방석에 대한 나의 믿음은 견고하다. 시험을 망친 건 친구 놈이 방석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다. 역시 사람의 후각은 믿을 게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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