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없는 1등

영어 바보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

by 구론산바몬드

빅터 세리브리아코프는 학창 시절에 선생님에게 ’ 바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선생님은 빅터에게 ”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노동“이라며 단순 노동을 권하고, 실제로도 단순 노동자의 삶을 산다. 그 후 군대에 갈 무렵 IQ 테스트에서 무려 161이라는 점수를 받으며 자신에 대해 완전히 다른 관점을 갖게 되었고, 그의 삶 또한 바뀌게 된다.


이 실화를 바탕으로 《마시멜로 이야기》의 저자 호아킴 데 포사다는 후속작인 《바보 빅터》에서 빅터의 생애를 픽션을 가미해 감동적으로 구성했다. 훗날 멘사의 창립 회장이 된 그의 생애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왜곡된 자아관을 형성하게 되고, 이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지배하게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목도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모든 사람은 다 나름의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회구조와 제도권 안에서 그것이 채 발현될 기회를 갖지 못하여 영원히 사장되는 것은 아닐는지.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나는 무던히도 아둔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운동장에서 단체 율동을 배운 적이 있다. 구령대에 선 선생님의 동작을 따라 하며 배웠는데, 선생님은 마이크를 손에 들고 있어서 한쪽 팔로만 율동을 하셨다. 나도 따라 한쪽 팔로만 열심히 따라 했다. 그러다 주위 친구들이 두 팔로 율동을 하는 것을 보았다. 나만 선생님의 시범 동작을 곧이곧대로 한 팔로만 따라 했던 것이다. 나만 그랬을까. 설마.


한날은 산수 시험에서 부등호로 나타내는 주관식 문제가 있었다. 가령, 10은 5보다 크다고 하면 '10 > 5'로 쓰는 단순한 문제였는데, 수업시간에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답을 적는 순간 혼돈이 왔다. 부등호가 입을 벌린 쪽이 큰 숫자인지, 화살표 마냥 가리키는 쪽이 큰 숫자인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민 끝에 반대로 썼고, 그 쉬운 열 문항을 죄다 틀려 버렸다.


그렇다고 빅터 세리브리아코프의 사례처럼 어느 날 내가 놀라운 천재성을 가진 것을 발견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영화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지만 초등학교 6학년 무렵 딱 한 번 그랬던 적이 있다. 사전 예고도 없이 선생님은 좌석을 시험 대형으로 옮기도록 하고 산수 시험을 치르게 했다. 나는 평소 70점을 넘기지 못했는데 그날은 어인 까닭인지 문제가 술술 풀렸다.


이튿날 선생님이 K군과 내 이름을 부르면서 둘 다 한 문제만을 틀려 공동 1등이라고 했다. 평소의 내 실력을 잘 알고 있는 학급 친구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다행히도 K군과 내가 틀린 문제는 다른 문항이었던 까닭에 의심을 불식시킬 수 있었다. 그 시험이 산수 영재반 학생을 뽑는 것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K군과 나를 비롯해 3등을 한 S군, 이렇게 우리 셋은 일주일에 세 번씩 방과 후에 남아 특별 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물론 수학적 재능은 두 번 다시 발현되지 않았고, 한 학기 동안 영재반에서 나는 엄청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수업에서는 매번 많은 양의 과제를 내주었고 또 매시간 시험을 쳤다. 일찍 집에도 가지 못하고 과제와 시험에 허덕이는 것은 무척 고역이었다.


K군과 S군은 나중에 각기 서울대와 서강대에 진학했다. 그것을 보면 내가 산수 영재반에 들어가게 된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우연인지 실감하게 된다. 훗날 법대를 나와 변호사가 된 K군이 카톡 메시지를 보내왔을 때 읽지도 않고 슬그머니 삭제한 것은 자격지심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산수 영재반 선발 시험을 생각할 때면 이런 생각이 든다. 1등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재수 없는 1등도 있다.

이전 03화우천시에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