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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탄 Sep 02. 2022

<노스맨> 인간은 왜 신화를 만드는가

삶이냐 복수냐 그것이 문제로다

로버트 에거스와 판타지


나는 로버트 에거스의 영화들이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홀대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리 애스터나 요르고스 란티모스처럼 화면 안에 의도적인 불균질함과 기괴함을 주는 것도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미신이 채 사라지지 않았던 시대를 배경삼아 특유의 음산함으로 승부를 거는 에거스의 스타일을 더 좋아한다. 무엇보다 판타지를 소재 삼음으로써 그 역사적인 기원에 편집증에 가까운 수준의 고증을 거치며, 인간의 내밀한 욕망과 두려움을 건드리는 방식은 고전적이면서도 세련미가 넘쳤다. <더 위치>에서는 세일럼의 마녀로 죄의식을 전가시키는 인간의 어둠을, <라이트하우스>에서는 등대와 인어 전설로 전복되어 가는 남성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지금껏 극장에서 보았던 적이 없었다.


에거스의 신작 <노스맨>은 분위기나 형식 면에서 포크 호러보다는 다크 판타지에 가까운 작품이다. 아울러 에거스의 작품 중 최초로 국내 극장에 걸리게 된 영화다. 하지만 그의 이전 두 작품이 영화팬들 사이에서만 화제가 되고 흥행에도 실패한 것 때문인지 유니버셜코리아의 마케팅 팀은 소극적인 것을 넘어 아예 기대를 버린 것으로 보인다(당장 다음 주에 개봉하는 <블랙폰> 광고가 더 많다!). 그렇기에 국내 인지도는 처참하기 그지없지만, 이대로 잊히기에는 <노스맨>은 너무나도 아까운 작품이다.


수많은 명품 배우들과 9천만 달러라는 거액의 제작비가 들었으나 <노스맨>의 양적인 스케일은 작다. 하지만 이것을 결코 제작비 낭비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에거스는 이 제작비를 가지고 은유가 아닌 직유법을 쓰려고 한다. 바이킹족의 폭력을 포함한 초기 중세의 생활상, 그리고 북유럽 신화의 이미지가 고증과 구전에 맞게 훌륭하게 구현되어 시선을 사로잡는다. <노스맨>에서 느껴지는 '에픽'함은 사람의 숫자를 양적으로 불려놓는 것에서 오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작은 인간에 대비되는 웅대한 풍광을 자연광으로 그윽하게 담아내며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인물간의 전투에 집중한 아트버스터에 가깝다. 무기 한 자루, 기둥 문양 한 줄기에도 어떠한 과장이 없다. 마치 그 시대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햄릿과 암레스, 그리고 바이킹


서기 895년, 아이슬란드 흐라픈지의 왕자인 암레스(알렉산더 스카스가드 扮)는 의붓삼촌 푤니르(클레스 방 扮)가 아버지 아우르반딜 왕(에단 호크 扮)을 죽이는 것을 직접 목도한다. 어머니 구드룬(니콜 키드먼 扮)까지 푤니르에게 빼앗긴 암레스는 일찌감치 복수라는 자신의 운명에 눈을 뜨며 왕국을 탈주해 스스로 바이킹으로 성장한다. 늑대 가죽을 뒤집어쓴 광전사가 되어 ‘베오울프’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원수인 푤니르를 죽이기 위해 그의 노예로 잠입하게 되고, 그 와중에 만난 루스 지역의 여인 올가(안야 테일러-조이 扮)와 사랑에 빠지며 함께 복수를 도모한다.


이 작품의 이야기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햄릿>의 원전이 되는 덴마크의 '암레스 전설'인 만큼 플롯과 캐릭터의 유사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노스맨>은 에거스가 공언했듯이 그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이고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일반 관객들에게는 다 아는 이야기의 재구성인 만큼 더러는 지루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를 뜯어보면 햄릿 못지않게 복수에 얽힌 복잡한 인과관계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화에 더없이 충실하면서도 그 신화가 있게 한 심리적 기원까지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에거스의 두 작품과 견주어도 모자람 없이 탁월하다. 현대까지 널리 사랑받는 작품을 고대 시대에 재현하는 데서 오는 특유의 비틀림과 바이킹의 광기가 이 작품을 훨씬 다채롭게 만든다.     


암레스는 복수의 확신과 실행까지 가는 과정 내내 고뇌에 가득 차 있던 햄릿보다는 훨씬 직관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비록 진실이 드러날 때의 충격이 있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 그는 마치 복수에 경도된 것처럼 괘념치 않고 말보다 행동을 중시한다. 대규모 제작비가 든 영화인 만큼 에거스의 전작들에 비하면 깊이가 얕다고 볼 수도 있으나, 암레스가 이렇게 단호하게 행동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유언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시대가 살육과 약탈, 복수의 수행이 신화를 통해 권리화, 또 의무화되었던 바이킹족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작품이 아이슬란드의 장대한 풍광을 다루는 만큼, 그를 포함해 바이킹의 고향인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환경을 잠깐 돌아볼 필요가 있다. 모두가 잘 알듯이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환경은 겉보기에는 아름다울지 몰라도 문명이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이곳은 기본적으로 춥고 삭막하다. 오늘날엔 철강과 목재 산업(그리고 상상초월의 복지)으로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문명의 구성원을 먹여살릴 식량자원이 너무나 부족했다. 호수와 하천이 많은 반면 경작지는 부족했으며, 날씨 또한 냉대습윤 기후라 농사를 짓기 어려워서 낙농업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 최근에 북유럽 지역에서 '접대의 관습'이 없다는 사실이 소소하게 화제가 된 것도 결국 이러한 문화가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배경이 이렇다 보니 스칸디나비아의 민족은 살아남기 위해 넘쳐나는 철강과 목재로 무기와 배를 만들어 타 국가들의 약탈에 나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남이 일군 것을 빼앗거나 살육을 하는 것은 인간의 심리에 상당한 죄의식과 타격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군인, 용병이라는 직업적 관념에서가 아니라 문화 전체가 이러한 행위를 납득하고 인정해야 했다. 약탈이 일상화된 문명에는 자연스레 보복이 따랐고, 이에 따라 복수의 권리 또한 일상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 바로 '전투에서 죽어야 천국에 간다'는 전사 신앙이었고, 이것이 나아가 신화가 된 것이다.


전투에 앞서 광전사들이 버섯을 끓인 물을 마시는 것 또한 죄의식과 두려움을 잊기 위해서, 나아가 그 무아지경 속에서 신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였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광전사에겐 오직 싸움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작품은 암레스의 시점에서 환상과 현실 사이를 교묘하게 넘나들 수 있다. 원전을 의식한 듯한 문학적 대사와 미장센에 집착하는 듯한 쇼트와 롱테이크는 영화의 형식을 빌린 하나의 거대한 연극을 보는 느낌을 준다. 이 또한 신화를 보다 내밀하게 받아들였던 중세 초기의 인간심리를 훌륭하게 반영하는 연출이다.


(* 이하 후반부 및 결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후세를 위한 복수


암레스뿐 아니라 햄릿의 등장인물들을 적절히 비튼 캐릭터들도 매우 흥미롭다. 암레스의 아버지 아우르반딜 왕은 북유럽에서 신들의 아버지 오딘의 새라 추앙받는 전쟁까마귀라고 불림으로서 어린 암레스에게는 오딘의 현신과 같다. 하지만 동시에 북유럽 신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독일과 스웨덴 지역에서 까마귀는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죽은 자의 원혼이 깃든 새이기도 하다. 이는 햄릿에게 망령으로 다가오는 햄릿 왕과 정확히 일치한다. 광대 요릭의 해골 대신 등장하는 헤이미르(윌렘 데포 扮)의 썩은 머리는 햄릿의 번뇌와 그리움을 표출하는 매개물이 아니라 그에게 복수의 검을 계시하는 조언자의 역할을 한다. 그가 꺼내드는 검 '드라우그르(Draugr)'는 우리에게 게임 속 언데드 몬스터의 이름으로 유명하지만, 그 어원은 '기만'이라는 점에서 역시 햄릿과 암레스의 행동과 일치한다.


암레스의 히로인이라 할 수 있는 자작나무 숲의 올가는 햄릿의 여인 오필리어보다 훨씬 더 주체적인 여성상이다. 암레스와 올가는 곤자고의 비극으로 클로디어스의 마음에 독을 푸는 대신 환각버섯으로 사람들을 직접 자살케 하여 살에 와닿는 공포를 가져다준다. 이 역시 바이킹의 시대에 걸맞은, 보다 직접적인 복수방식이다. 두 여인에게는 광기가 존재하지만, 오필리어는 슬픔으로 미쳐버려 죽게 된 반면 올가는 투철한 신앙의 광기로 마술을 부린다. 지역과 작품 속의 행동, 그리고 자작나무라는 매개체를 생각할 때 그녀는 슬라브 신화 속 봄과 조화, 사랑의 여신 ‘라다’의 형상일 가능성이 높다. 남녀의 조화와 사랑 속에 아이들이 태어남으로서 미래가 예비되니 말이다.



암레스와 올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과 딸 중에서 딸이 왕위에 오르는, 즉 처녀왕(Maiden King)이 된다는 예언도 역사와 풍습을 되짚어볼 때 꽤나 재미있는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이것은 오늘날 유행하는 페미니즘과 성역할의 역전 구도를 중세에 끌어온 것이 아니다. 중세에도 이러한 처녀왕 신화가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당장 바이킹들만 해도 여전사를 따로 지칭하는 방패 처녀(Shield-Maiden)라는 단어가 있을 만큼 남녀간 성역할에 큰 구분이 없었다. 당연히 경우에 따라 여성도 부족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자식이 부모의 이름을 물려받는다는 고대의 풍습을 되새길 때, 또 작품의 시작점이 서기 895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노스맨>의 처녀왕은 10세기 중반 러시아 일대를 지배한 ‘키이우의 올가’에서 모티브를 얻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역사학자들 가운데서도 그녀의 출생이 슬라브계인지 스칸디나비아계인지 분분한 것을 영화가 잘 파고든 경우라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녀 또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아 남편인 대공을 죽인 자들을 상대로 희대의 복수극을 달성한 전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결국에는 마지막까지 복수가 중요하다. 암레스가 올가와 헤어지는 것도 결국 자신의 복수가 뿌린 거름으로 생겨난 또 다른 복수를 거둬야 함이다. 



암레스의 적이자 알레고리의 한 축을 담당하는 푤니르는 단순히 일차원적인 복수의 목표가 아니다. 그가 왕을 죽인 것도 왕의 배다른 동생이자 사생아로서 흐라픈지에서 짐승 취급을 받고 있는 자신의 삶을 무시해온 것에 대한 복수에 해당한다. 그 대가로 왕국을 잃어버리고 양치기로 전락해 버리지만, 그 와중에도 직접 가사노동을 하면서 아내와 자식들을 끔찍이 아끼는 모습을 보이며 정체를 숨긴 암레스를 좋게 대우해 준다. 어떤 의미에서 푤니르는 암레스의 또 다른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암레스에게 하나하나 잃어가면서 포효하는 모습은 간악한 본색이 드러난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이후 아내와 아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결투를 신청함으로써 그는 원수이자 동시에 복수자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아버지를 위해 시작한 암레스의 복수 또한 이 시점에서는 자신의 후손을 위한 싸움이 된다. 


암레스와 푤니르의 최후의 결투가 벌어지는 화산은 ‘헬의 문’이라 표현된다. 북유럽 신화에는 여러 가지 사후세계가 존재한다. 발할라가 천국이라면, 헬은 북유럽 신화 버전의 지옥 중 하나이자 그곳을 다스리는 여신의 인명이다. 그런데 헬의 가장 큰 특징은 ‘칼로 죽지 않은 자’가 가는 지옥이라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바이킹의 태도를 되새길 때, 헬의 문은 오히려 복수의 운명에서 도피한 자에게 열리게 된다. 암레스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푤니르와 결투를 벌이면서 지옥의 문 앞에서 천국으로 승천하는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비극이어야 할 이 장면이 발키리의 승천을 통해 웅장하게 그려진다.


반면 푤니르는 결국 아우르반딜 왕의 목을 베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암레스의 검에 참수당하는 비극을 맞는다. 결투에서 똑같이 칼을 맞고 죽었는데 왜 비극이냐 묻는다면, 검에 살고 죽는 바이킹들도 참수형을 기꺼워했기 때문이다. 바이킹들은 죽을 때 머리와 몸이 분리되면 시신이 온전치 못해 발할라에 들지 못한다고 여겼고, 오히려 오딘이 그러했듯 목 매달려 죽는 교수형을 기꺼워했다. 푤니르가 아우르반딜의 숨통을 끊고 나서도 굳이 목을 친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그러니 어쩌면 <노스맨>의 진정한 악역이자 복수자는 푤니르를 비극에 빠뜨린 거트루드에 해당하는 구드룬이라 할 수 있다(재미있게도 구드룬 역시 <니벨룽겐의 노래> 속에서도 남편을 셋이나 바꿔가며 딸의 복수를 실행했던 여인의 이름이다). 단순히 아버지의 죽음을 의심치 않고 숙부와 재혼한 왕비가 아니라 숙부에게 복수라는 독을 풀어 아버지를 죽이게 한 장본인이다. 그녀의 배경 서사 또한 비극적이기는 만만치 않다. 약탈자들 사이에서 성노예로 팔려다니다 왕의 자식을 낳았다는 이유로 왕비가 되었으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왕 대신 푤니르에게 왕좌를 차지할 것을 간청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들에게 알려주는 동시에 자신의 새 남편이 되어달라 말하며 자신의 죄를 공유하고 대물림하려 한다. 그리고 여인을 죽이지 않겠다는 암레스의 검에 가슴을 찔리면서 환희에 찬 채 죽고 암레스에게는 근친살해의 죄의식을 부여한다(예로부터 검이 남성성, 즉 남근을 상징한다는 점을 볼 때 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완성이다).


하지만 암레스는 오이디푸스이되 오이디푸스처럼 목적을 잃고 떠돌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또 다른 아버지인 푤니르와 기꺼이 동귀어진을 택하려 한다. 죄의식을 이기며 죽은 구드룬과 화해하도록 돕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복수에 밀어넣은 신화다. 그녀 또한 자신의 칼에 죽었으니 오딘의 전당에 들 것이라는 신화.  


인간은 왜 신화를 만드는가


신화를 만드는 것은 결국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것들이 있으며, 그 중 가장 넘기 힘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질병과 전투, 기근이 끊이지 않던 시대 죽음은 지금보다 더욱 가까이에 있었다. 신화가 단순히 옛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사에 직접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여러 신화마다 제각각 다르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은 끔찍한 예언을 극복하려다 오히려 예언을 완벽하게 성사시키면서 비극과 교훈을 안겼다. 이집트 신화에 종속된 이집트인들은 삶보다 죽음 이후의 삶에 집착하며 하늘과 땅 밑에 닿기 위해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북유럽 신화의 경우, 그들은 비장함으로 두려움을 이겨냈다. 가장 완벽한 죽음은 피와 강철로 가득한 전투 속의 죽음이었다. 최후가 처절할수록 그것은 곧 영광의 천국 '발할라(Valhǫll)'로 이르는 길이었다. 특히 신화의 결말을 장식하는 신들의 대전 ‘라그나로크(Ragnarök)’는 새로운 세계를 예비한 대전쟁이라는 점에서 기독교의 아마겟돈과 유사하지만, 아마겟돈을 멸망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이는 기독교와 달리 바이킹들은 세계의 종말을 자신의 전사(戰死)와 동일시했다. 신들 또한 파멸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검창을 들고 전장에 나섰기 때문이다.



<노스맨>에는 벗어날 수 없는 복수의 운명을 기꺼이 마주하고 정복하러 나서는 인간의 장엄함이 있다. 복수로 인해 닥쳐올 죄와 죽음을 긍정함으로써 삶을 완성하고 승천을 이루어내려는, 바이킹의 관념을 그 어떤 미디어매체보다 탁월하게 다뤄냈다. 야성과 이성이 공존하는 신화의 남성성과 여성성 모두에 집중하면서 둘의 결합이 주는 역사의 흐름 또한 엿볼 수 있다. 특히 북유럽 신화와 풍습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는 진정으로 환상적인 걸작이 될 것이다. 인간이 만든 복수의 알레고리와 비장한 해갈, 극한의 현실 고증으로 오히려 신화에 핍진성을 부여하는 비주얼, 심장박동을 형상화한 듯 웅장한 북소리로 가득한 음악까지.


물론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암레스를 비롯한 <노스맨>의 등장인물 모두의 행동이 미신에 매몰되어 있고, 그렇기에 너무 야만적이고 구차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와 그들의 차이는 더 나은 문명의 수혜자라는 사실뿐이다. 우리 역시 은연중에 미신을 인정하면서 야만성을 숨기고 있지 않은가? 나는 비록 무종교인이나, 종교를 믿는 이유는 단순히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완성하기 위해서라고 믿는다. 참람한 세상 속에서 한 인간으로 살아가며 끝내 그 종착점인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그리고 후손의 기억 속에 자신의 이야기를 그 신화와 나란히 이어나가기 위해. <노스맨>은 신화에 허우적거리면서도 그 안에서 떳떳하게 나아갔던 인간상으로 하여금 ‘인간은 왜 신화를 만드는가’에 대한 대답을 주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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