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으로 해체된 구원자 서사시
오늘날까지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믿고 있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고대 근동지역이라는 지정학적 근원과 유일신 구원자에 대한 갈망을 공유하고 있다. 셋 중 가장 오래된 유대교는 본래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민족종교에 불과했으나, 바빌론 유수와 이집트, 로마제국의 침략 등등의 외침을 통해 가혹한 박해를 겪는 동안 유대인들은 자신의 민속신앙을 점차 자신을 고난에서 구원할 초월적 존재의 가르침으로 변용하게 되었다.
그들은 생활의 원칙이 되는 교리문답서에 자신들의 구원자의 임재에 대한 열망을 담았고, 율법을 벗어난 또다른 구원자로서 역사에 현신한 예수 이래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탄생했다. 그리고 신에게 계시받은 예언자라는 모티브는 중동으로 건너가 이슬람교라는 또다른 거대 종교의 근간이 되었다. 이 구원자, 일명 메시아 신앙의 가장 유명한 특징이라면 본연의 종교 외의 신앙을 이단으로 배척하고 자신의 추종자에게도 때로는 가혹할 만큼의 엄격함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한 배타성으로 말미암은 종교적 갈등은 자연히 전쟁으로 번졌고, 십자군이라는 200년간의 거대 이벤트 이후에도 크고 작은 성전이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짚어볼 점은 근동지역의 지리적 변화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본 종교철학 강의 동영상에서는 척박한 풍토 속에서 사는 사람일수록 초월자의 구제를 갈망한다며, 그렇기에 유일신 종교는 대개 사막에서 탄생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이는 앞뒤가 바뀐 오해다. 텁텁한 먼지와 모래바람이 연상되는 지금과 달리 고대의 근동에는 꽤나 비옥한 땅이 많았다. '젖과 꿀이 흐르는' 성경 속의 가나안 평원부터가 이스라엘의 실제 지명이다. 하지만 상술했던 전쟁을 비롯해 유일신에 바치는 문명의 발전을 위해 인류가 그곳의 지력을 몇천 년간 끌어다 쓰다 보니, 지력과 수자원이 소진되면서 사막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가설이 힘을 얻고 있다.
문제는 그렇게 다다른 현대에서 종교가 실세(失勢)하기는커녕 현실에 맞물려 분쟁을 더욱 부추긴 사례가 오히려 늘어났다는 것이다. 지난한 영토 분쟁과 하루 생활의 고비까지도 넘겨야 했던 인간에게는 구원자의 존재가 더욱 절실해지고, 그렇기에 종교에 심취할 수밖에 없다. 조금 과장 보태서 말하면, 메시아 종교가 척박한 사막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 종교로 인해 비옥한 땅에 사막화가 가속되는 것이다. 이렇게 수천 년에 걸친 종교적, 지정학적 역설은 프랭크 허버트의 대하 SF소설 <듄> 시리즈의 주제인 '메시아에 대한 경고'의 모티브 중 하나이기도 하다.
드니 빌뇌브 감독이 막 <듄>의 메가폰을 잡았을 때, 그는 자신이 원작의 엄청난 팬이며 자신의 모든 작품을 <듄>을 위한 사전작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또한 목표가 원작소설의 2부격인 <듄의 메시아>까지 영상화해 시리즈를 총 3부작으로 마무리짓는 것이라고도 했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부터 그의 주의력은 칼라단의 소년 폴 아트레이데스가 외지 아라키스에서 겪는 사건들을 소설 그대로 표현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듄: 파트 2>를 보고 난 지금, 역시 드니 빌뇌브야말로 상술한 허버트의 사상을 표현하는 데 누구보다 걸맞은 연출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폴 아트레이데스의 비극은 그간 빌뇌브가 구축한 영화 속 주인공 서사의 집대성격이기 때문이다.
<듄> 이전 빌뇌브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항상 거대한 세상 앞에서 존재론적 절망을 겪고 있었다. <시카리오>에서 엘패소 국경지대의 마약카르텔을 분쇄하려 임무에 자원한 FBI 요원 케이트는 오히려 미국 정부가 주도했던 더 큰 음모의 장기말로 전락한 자신의 무력함을 절감하고, <컨택트>에서 지구를 대혼란에 빠뜨린 외계인과 접촉한 언어해석학자 루이즈는 자신에게 다가올 비극을 끌어안는 모습을 보이며,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안드로이드 K는 인간들로부터 멸시받다가도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기억 때문에 정체성에 희망을 걸지만, 진실을 깨달은 뒤 빗속에 주저앉는다. 이 세 작품의 미학적 공통점은 주인공 너머의 배경을 먼 부감으로 잡는 화면이다. 개미만한 주인공들이 바꿀 수 없는 세상에 내던져진 채 거대한 풍파를 마주하는 그림은 경이를 넘어 탄식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이번 <듄> 시리즈, 그중에서도 <파트 2>는 기존 빌뇌브의 작품 속 화면과 차별되는 구석이 있다. 모래알만한 인간들이 화면을 빼곡히 채우고, 거대한 모래벌레를 타고 사막을 누비며 대규모 전쟁을 벌이는 모습이 펼쳐진다. CG의 질감과 음악, 구도까지 할리우드 최상의 수준으로 어우러진 연출은 가히 <반지의 제왕>에서나 볼법했던 질량감의 영상미를 펼친다. 그러나 그렇게 모인 군중의 집단행동이 가져오는 시네마적 카타르시스에는 위협이 잠재하고 있다. <듄>의 군중은 초인과 권력자의 충성스러운 도구가 되다가도, 어느 순간 그 앞에 선 초인을 역으로 대의명분 삼아 거대한 폭력을 휘두르는 존재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아이맥스 화면에서 수직과 수평을 넘나드는 온갖 장대한 명장면들은, 우주의 미래를 내다보게 된 한 소년의 내면세계에서 몰아치는 죄의식의 폭풍을 시각화한 것이나 다름없다.
전작의 주인공 폴 아트레이데스는 자신에게 겹겹이 싸인 출생의 비밀을 벗겨갈수록 좌절에 빠지는 인물이었다. 그 절정은 '퀴사츠 해더락'의 운명이란 인류를 번영으로 이끌 태생 목적과는 반대로 전 우주를 불길로 몰아넣는 전쟁의 수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폴에게는 아버지의 복수라는 목표가 있었기에, 그는 운명을 조기 종료하는 대신 프레멘과 접촉해 그들의 힘을 얻고 하코넨, 나아가 황제에게 도전하려 한다. 그렇게 자신을 둘러싼 운명의 모래폭풍을 제어하고자 하지만, 예언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고 오히려 그를 매개삼아 모래폭풍을 키운다. 폴 자신의 정체와 신성성을 부정하는 발언조차, 프레멘은 '진정한 구원자는 스스로를 구원자라 칭하지 않는다'며 도리어 숭배의 이유로 삼는다. 그들에게는 진실보다 믿음이 우선이다.
하코넨과의 게릴라전에서 돋보이는 활약을 펼치며 폴과 프레멘은 점차 서로에게 감화되고, 폴은 우슬, 무앗딥, 마디, 리산 알 가입 등등 영웅에게 으레 따라올법한 명예로운 이름들로 불린다. 창작물에서 이름이란 곧 그의 정체성이자 미래를 의미한다. 그가 걸어가는 길에는 연인 챠니와 함께하는 우슬로서의 길, 사막에서 물을 길어내는 무앗딥으로서의 길, 프레멘의 구원자 마디/리산 알 가입으로서의 길이 혼재되어 있다. 다만 본명인 '폴 아트레이데스'가 불리는 순간은, 베네 게세리트와 황실 등 폴의 정치적 적수들이 경계하며 지칭할 때뿐이다.
(* 이하 내용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프레멘의 전사 무앗딥의 명성은 하코넨에게도 위협으로 감지되고, 무능한 라반 대신 아라키스의 지휘권을 인계받은 페이드 로타 하코넨의 무자비한 보복이 계속되자 폴은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생명의 물을 마시고 퀴사츠 해더락으로 각성한다. 남부의 근본주의자들 한가운데서 교리의 힘을 넘어서는 예지력을 선보이며 지도자의 권리를 획득할 때, 그는 죽은 아버지의 반지를 끼고 스스로를 '폴 무앗딥 아트레이데스'라 외친다. 자신이 내다본 수많은 미래 중 프레멘을 억압하는 황제와 하코넨의 적으로서 전쟁에 나서는 미래를 선택한 것이다.
이후 폴의 행적은 사막 위에서 모래벌레를 피해 걷는 모래걸음 대신 모래벌레가 대지를 뚫건 말건 평소대로 천천히 걷는 위의 이미지와 같은 모습으로 상징된다. 한마디로 그는 거칠 게 없는 괴력난신이다. 은하계 내에서 사용이 금기시되는 핵무기뿐 아니라 모래벌레를 전술병기로 응용하는 군사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발현하여 전쟁을 순식간에 종료시키고, 하코넨 남작과 황제의 대전사인 페이드 로타까지 죽이며 황실 전복에 성공하는 등 모든 상황은 폴의 예상과 전략대로 흘러간다.
그러나 이런 위대한 승리를 거둔 폴에게서 성취의 감정은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예언을 바꾸려던 노력의 허망한 실패감과, 결과를 알지만 이행할 수밖에 없던 자의 무력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자신의 적이자 사실 외할아버지였던 하코넨 남작을 죽일 때는 폴의 성씨인 '아트레이데스'의 기원이 되는 고대 그리스 왕가의 혈통이 연상된다. ‘아트레우스의 후손’이라는 뜻의 이 가문은 그리스 신화 속 최고의 명문가였던 동시에 가문원끼리의 존속살해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아트레이데스 가문이 보관한 핵무기를 얻었을 때, 폴은 '파괴할 수 있는 자에게 진정한 힘이 있다'는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번역이 조금 이상하게 되었는데, 원문은 “He who can destroy a thing has the real control of it.”, 풀어 해석하면 ‘무언가를 파괴할 수 있다면 그 무언가에 대한 진정한 통제권을 가진다’라는 뜻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표현하는 듯한 이 대사는 아이러니하게도 폴 자신의 처지를 요약하는 대사이기도 하다. 황제를 폐위하고 적을 완전히 몰락시켰음에도 그 자신의 운명과 예언을 파괴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예언에 대한 통제력이 너무 강하기에 문제’라는 거니와의 대담에서 알 수 있듯, 퀴사츠 해더락이 된 폴 자신의 예지력과 전지성이 너무 완벽했기에 자신 역시 그 예언에 갇혀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폴의 내적 고민은 개의치 않고 예언의 실현을 곁에서 목도한 프레멘의 믿음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다. 원작의 2부 <듄의 메시아>에서 마주할 그의 결말까지 감안하면, 폴은 운명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졌으나 그 능력 때문에 도리어 운명에 지배되고 만, 전형적인 그리스식 자기 실현적 비극의 주인공이다. 더 슬픈 것은, 그리스의 영웅들과 달리 폴은 모든 비극을 미리 알면서도 자유의지가 망실된 채로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다소 전개가 빠르고 설명되지 않은 구간이 있음에도, 전작부터 차근차근 쌓아온 서사와 복선, 그리고 티모시 샬라메의 압도적인 연기 때문에 성장과 파멸의 동반 서사는 관객에게 오롯이 전달된다. 프레멘의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피를 토하듯이 외치는 폴의 모습은 미래를 아는 자의 거침없는 자신감과 동시에 운명에 굴복한 자의 체념을 호소력 있게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제위 등극을 반대하는 랜드스라드 세력을 이단으로 규정하며 '낙원으로 보내라'는 한 마디를 내뱉을 땐, 홀로 지옥을 걸어 들어가는 듯한 폴의 외로움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수많은 미래들 중 그가 포기하게 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가장 편안해질 수 있었던, 그 또래의 청년이 꿈꿀 법한 연인 챠니와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 폴을 바라보다 못한 여인 챠니의 선택은 영화만의 각색이다. 원작 소설에서 차니는 황제가 된 폴이 이룰란 공주를 정실으로 삼은 후에도 첩으로 남지만, 영화에서 그녀는 폴의 성전을 완연히 거부하고 아라키스에서 외톨이의 길을 간다. 이것은 폴의 환상 속에서 성전의 양상을 소개하듯 폴에게 미소를 짓던 모습과는 정반대다. 1편의 도입부에서 '또 누가 우리를 억압하러 올 것인가'라며 게릴라전의 선두에 서던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과 탄압받던 동족이 이제는 정반대로 우주 전체의 압제자가 된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복수의 길을 저버린다. 그녀의 선택은 무조건적인 숭배에 대한 경고라는 소설의 주제를 더욱 부각한다. (운명을) 파괴할 수 있는 자, 운명에 대한 진정한 통제력을 지닌 자란 곧 챠니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자유의지를 통해 뒤바뀐 행적이 후속작에 미칠 영향이 결코 적지 않기에, 영화판 3부작의 총체적 흐름이 어떻게 재해석될지도 기대되는 대목이다.
폴과 챠니 외에도 <듄: 파트 2> 속 등장인물의 서사는 여러모로 전작과의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베네 게세리트의 계획에 시시각각 두려워할 만큼 아들과 남편을 끔찍이 아꼈던 제시카는 각성을 거쳐 텔레파시를 얻은 뱃속의 딸과 광기 어린 대화를 나누며 아들을 매개물삼아 열성적인 전도사가 되고, 끝내 자신에게 좌절감을 안겨줬던 스승 모히암 대모를 오만하게 내려다본다. 냉철함과 실리를 중시하고 동족을 아꼈던 프레멘의 리더 스틸가는 계시를 본 뒤 신봉의 대상인 폴조차 말리지 못하는 광신에 젖은 우주 지하디스트 전사가 되어 있다. 기습으로 아라키스를 되찾았던 하코넨 남작은 역시 기습으로 무너진다. ’약자는 사막이 처리한다‘던 과거의 대사 그대로, 호흡기와 영양소 탕에 생명을 의존하던 남작은 사막의 개미들에게 처리당한다.
시각적으로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포스터와 예고편을 차지한 모래벌레 '샤이 훌루드'들의 존재다. 외지인의 입장을 견지하는 1편에서 그들은 한 마리 한 마리가 빌딩만한 차량을 먹어치우고 사막의 지형을 바꿔버리는 자연재해이자, 이빨을 갈아 만든 단검 크리스나이프만으로 추종자의 울음을 자아내던 미지의 존재, 즉 아라키스의 신이었다.
그러나 폴이 프레멘으로서의 본격적인 삶을 시작한 본작에서 샤이 훌루드의 위상은 사뭇 달라져 있다. 그들은 여전히 거대하고 강력하며 보는 것만으로도 경외감에 젖게 하지만, 프레멘의 진동발생기와 갈고리, 가마 등을 통해 이동수단이자 시체 처리 수단, 움직이는 초대형 전술병기 등등으로 '기능'하게 된다. 또한 프레멘이 모래에서 양식하는 어린 모래벌레 유충은 부족의 지도자인 대모의 각성 수단이 됨으로써 수명을 다한다. 모래벌레들은 사막의 창조자로서 추종의 대상인 동시에, 추종자들의 생존과 전쟁의 승리를 위해 도구화되어 있다.
작품 전체에 도사린 프레멘의 광신의 근간이 되는 숙원도 샤이 훌루드와 연관지어 보면 하나같이 모순투성이다. 프레멘의 숙원은 아라키스를 폴의 고향 칼라단처럼 물과 숲이 가득한 낙원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숙원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추종의 대상인 모래벌레는 아라키스에서 모조리 사라질 수밖에 없다. 영화 속에서 물에 빠지면 얼마 안 가 죽는 유충을 봐도 알 수 있듯, 모래벌레에게 수분은 치명적인 독성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샤이 훌루드가 모래에 흩뿌렸던 스파이스도 사라지게 되니, 스파이스 중독자였던 프레멘은 집단 금단 증상과 함께 본연의 교리와 문명적 정체성을 잃게 될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런 프레멘의 생태학과 정체성이란 아라키스 토착민족으로서 자연스레 생긴 것이 아니라, 베네 게세리트가 수천 년에 걸쳐 종교적으로 양성한 퀴사츠 해더락의 군세에 지나지 않는다. 즉 이들의 신앙은 처음부터 전쟁능력을 증폭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본 리뷰에 앞서 설명한 일신교의 유래와 영향력을 되짚는다면 기묘한 데쟈뷰가 느껴지지 않는가? 사막 행성을 낙원으로 만들 목표로 온 세상을 사막화로 이끌고 전쟁에 중독되어 가는 지하디스트의 모순이란, 역사 속의 어느 종교전쟁에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모든 영화의 원작소설이 그러하겠지만, 프랭크 허버트가 써냈던 <듄>은 1권만 해도 두 편의 영화보다 더욱 방대하고 복잡하다. 소설은 수많은 화자들을 내세워 그들 각자의 생각과 행동, 계략들을 다층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 모두가 하나의 결말로 귀결되는 순간은 다소 갑작스러움에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거기에 첫 선을 보인 이후 거의 모든 스페이스 오페라 창작물에 영향을 끼쳤는데도 여전히 고유한 독창성을 유지하고 있는 아라키스와 은하 세계는 또 어떠한가. 파트 1, 2 합쳐 6시간도 안 되는 분량 안에 이 모두를 완연히 녹여내기란 보통 힘든 작업이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는 시간대를 압축하면서 곁가지를 쳐내고, 등장인물 일부의 활약상도 삭제하며 주인공의 서사에 집중하는 선택을 한다. 그 덕에 후속편 역시 전작과 마찬가지로 원작의 전개와 주제의식과 가공의 세계의 핍진성을 또렷하게 살려냈다. 물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의 고뇌에 상당량의 러닝타임을 할애한 탓에 새로 추가된 악역 등장인물들의 비중과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덜한 것이 아쉽다. 오스틴 버틀러가 분한 페이드 로타 하코넨의 활약은 그 중에서 나름 돋보이는 편이지만, 그마저도 똘끼 넘치는 사이코패스이자 능력 있는 대적자로서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크리스토퍼 워컨이 연기한 샤담 4세도 비주얼적으로는 노회한 황제의 모습이 잘 살아나기는 했으나, 원작에 비하면 비중이 지나치게 축소된 탓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다행히 드니 빌뇌브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할 <듄의 메시아> 각본을 집필하고 있으니, 이만한 완성도의 스페이스 오페라 시리즈를 목말라하는 팬이라면 다시금 후속작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듄> 시리즈의 재발굴과 흥행은 문화예술적으로도, 또한 정치적으로도 기묘한 타이밍을 맞춘다. 2000년대를 강타하여 20년간 득세해 왔던 슈퍼히어로물이 점차 현실의 고민을 잊고 파워 판타지의 충족과 상업 수단으로 전락해 가는 가운데 나타난 <듄>은 영웅주의에 대한 경고를 심도 깊게 표현한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몰고 왔다. 그리고 <파트 2>가 개봉한 현재, 극장 너머 현실 세계 속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오랜 종교전쟁이 다시금 본격화되어 전쟁피해의 소식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잘못된 지도자들과 그들을 향한 무조건적인 믿음 때문에 집단이 몰락하는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고, 이는 지금 이 시점에도 국가를 불문하고 현재진행형인 비극이다.
그렇기에 60년 전 <듄> 시리즈가 던졌던 질문은 조금도 녹슬지 않았고, 거장의 손으로 더욱 날카롭게 세공되어 우리 앞에 던져졌다. 수만 년 후의 미래 세계에 나타난 인공 메시아에서 비롯된 장대한 비극은, 지금도 모래 위에서 적의 피를 잉크삼아 쓰여나가는 중인 신화들에 대한 슬픈 알레고리로 읽힌다. 프랭크 허버트의 계시와 같이, 현실에는 무결점의 영웅담도 진정한 메시아도 없다. 그러나 그들을 위한 희생은 너무나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