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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탄 Aug 18. 2022

<헌트> 내부의 적에 대한 균형 잡힌 통찰

1980년대를 만든 모두를 향한 질문

균형이 중요하다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은 언제나 각본, 성패를 책임지는 사람은 언제나 감독이다. 감독은 제작사의 입김 앞에서도 타협과 충돌의 맨 앞에 서야 하며, 시나리오와 현장, 배우와 소품, 촬영 구도까지 모든 것을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자리다.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에 균일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한다. 배우뿐만이 아닌 각본가 겸 감독으로서, 이정재가 영화를 찍을 때 가장 중심을 두었던 것도 바로 ‘균형’이었던 것 같다.      


이정재의 영화 감독 입봉작 <헌트>는 외양부터 다른 여름 대작 영화들에 비해 모자란 곳이 없다.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을 입은 듯한 배우들의 호연, 한데 모이기 불가능한 수준의 카메오 출연진, 액션과 사건을 흐트러짐 없이 뒤쫓는 이모개 촬영감독의 카메라워킹, 한국 느와르 영화음악의 일인자 조영욱의 묵직한 사운드트랙, 1980년대의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까지 묘사함에도 위화감 없는 현장 로케이션까지. 애초에 남성미가 가득 묻어나는 영화의 장인들이 모였다. 감독을 못해도 중간은 간다.     


그러나 이정재 감독은 모든 사람들의 공력을 적재적소에 기용하여 그 이상의 시너지를 만들어냈다. <헌트>는 배우의 감독 데뷔작이라는 색안경을 빼고 영화 그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상당히 출중한 만듦새를 선보이는 영화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은 역시나 잘 쓰인 각본일 것이다. 연출이 매끄러울 뿐만 아니라 각본 내적으로 인물의 갈등, 역사와 픽션, 액션과 드라마의 관계가 모두 절묘한 균형을 이루며 상호를 보완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양극화에 대한 비판


영화는 안기부의 내부 정보를 빼돌리는 고정간첩 ‘동림’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선정하고, 해외팀 차장 박평호(이정재 扮)와 국내팀 차장 김정도(정우성 扮)를 통해 그 목표를 뒤쫓게 한다. 두 사람의 부하직원들과 가족관계까지, 저울의 평형선을 맞춘 듯한 비중이다. 평호와 정도는 하나의 목표를 두고 서로의 약점을 치열하게 파고들며, 비밀에 대한 암시가 점차 드러남에 따라 관객은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몰입하게 된다. 이처럼 긴박한 사건 속에서 죄어진 심리는 총격전의 총성을 통해 발화되고, 절정에 다다를수록 인물 사이의 갈등은 보다 극단적인 세력 구도 속으로 빠져든다.     


감독이 인물의 균일한 비중 분배를 통해 <헌트>에서 논하려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균형을 어그러뜨리는 ‘양극화’다. 단적으로 박평호가 돌보는 죽은 동료의 딸 조유정(고윤정 扮)은 박평호를 향해 ‘독재자보다 나쁜 것은 독재자의 하수인’이라 말한다. 그만큼 이 영화의 등장인물 대부분은 한쪽의 극단에 서서 다른 극단을 색출해 없애려 혈안이다. 두 주인공부터가 1980년대 온갖 공포와 독재의 온상인 안기부의 소속원이며, 부하 직원들도 강압수사와 고문을 일삼기는 매한가지다. 반대편인 북한의 강경파 세력 또한 남측에 대한 증오로 가득하다. 아웅산 테러와 이웅평의 귀순 사건 당시 국민들이 느꼈던 공포를 생각하면, 7080 세대가 기억하는 북한은 실제로 안기부 못지않게 악독한 존재였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피카레스크물로도 읽힌다. 그러니 이 영화 속의 내부의 적이란 남파 간첩일 수도, 안기부 요원일 수도, 북의 수괴일 수도, 대통령일 수도 있다.


그들의 주변인물조차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독재에 맞서는 운동권 학생들은 계획 없이 혈기와 분노만 술주정으로 표출하고, 김정도의 아내는 박평호가 중정 시절 취조실에서 신경을 끊어버린 일화를 말하자 애써 외면하려 한다. 유신정권의 붕괴와 이어진 군사반란, 그리고 민주화 운동으로부터 3년, 소수의 강압을 피해 다수가 죄책감을 얻어야 했던 시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진정으로 비판하는 것은 독재자와 그 하수인뿐만이 아니다. 그들을 만들어낸 이념이, 보이지 않는 진짜 내부의 적이다.


(*이하 후반부 및 결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월동주 속의 동상이몽


주인공 박평호와 반동인물 김정도는 같은 듯 다른 인물이다. 초반의 두 사람 중 군 출신인 김정도는 상대적으로 과격해 보이고, 박평호는 13년차 요원답게 관록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각각 군납업체 목성사에 대한 김정도의 유착과 박평호와 조유정의 관계와 간첩 혐의를 파고들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관계는 서서히 역전되기 시작한다. 중후반으로 접어들수록 김정도는 오히려 단단한 분노를 보여주고, 감정의 혼란과 스트레스는 박평호 쪽으로 몰린다.


이 둘의 정체, 즉 남파 간첩과 소신파로서의 본모습이 교차편집되면서 같은 목표를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모습은 감정 변화의 정점이다. 평호에게는 정체의 탄로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일에 대한 회의감이 있었으며, 정도 역시 신념에 반하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환멸감이 있었으나 그것을 더욱 강한 집념으로 이겨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점에서 <헌트>는 그간 한국영화에서 비쳤던 안기부 소속 등장인물들의 무조건적인 악역화와 차별점을 둔다. 그들은 각자의 체제 유지를 위해 인간적인 본모습을 감추어야 하는 직장인이었고, 그 체제를 있게 한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그들에게 학살자이자 독재자의 하수인이라는 죄의 무게를 지게 했다.


또한 주변의 역사도 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83년의 한국 주변에서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긴장감을 못 이겨 3차 세계대전의 발화점이 될 만한 사건이 여럿 터졌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온갖 사건들뿐만 아니라 옆동네 영화 <비상선언>의 모티브 중 하나였던 소련의 대한항공 격추사건이 있었고, 소련에서는 컴퓨터의 오류로 인한 우발적 핵전쟁까지 일어날 뻔했다. 반대로 민주화운동의 학살을 지속적으로 합리화한 전두환 정부의 무기 또한 북괴라는 이데올로기였다.


박평호와 김정도 두 사람은 고위간첩 총책과 안기부 팀장이라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들 역시 국가의 이념에 휘둘리고 물들어 인간성을 상실해가고 있음을 일찍이 인지했다. 이들은 그것을 저마다의 방법으로 바로잡기 위해 움직였을 뿐이다. 그렇기에 정체를 들킨 박평호에게 김정도가 손을 내밀어 잡는 모습은 긴장감과 동질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평화라는 목표는 같아도, 가는 길은 다를 수밖에 없기에.


액션이 역사를 보완하는 시대극


역사를 재구성한 픽션인 만큼, 1983년에 실제 일어났던 사건의 시점은 영화 전개의 편의상 과하게 압축되어 혼란을 일으키는 측면이 있다. 남한 정권의 금전적 부패를 보여주는 장영자 비리 사건과 북한 정권의 부패를 보여주는 이웅평 귀순 사건, 양측간 냉전의 긴장감을 절정으로 끌어올린 아웅산 테러까지. 그 모두를 하나로 엮어낸다는 시도는 얼핏 번잡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헌트>는 역사 영화가 아니라 시대극이다. 이 모든 사건이 적어도 영화 내에서는 매우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훌륭한 각색이다. 이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남파공작원들의 국가 전복 음모다. 5공 독재정권이 집권 정당화를 위해 퍼뜨린 음모론의 주인공이 수면 위로 실체를 드러내는 모습은, 이 영화의 경우에는 역사왜곡이 아니다. 이근안의 고문 못지않은 이들의 무자비함은 남북의 이념 대립을 첨예하게 드러내는 장치이자 액션의 기폭제로 작용한다. 시대를 살아본 사람에게 이 전개는 다소 충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어리둥절하게 다가올 수 있지만, 이념이 만들어낸 공포와 부정의 시대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환기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영리한 선택이다.



역사를 알아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단점 외에도, <헌트>의 액션의 질은 훌륭하지만 다양성 측면에서는 조금 평이하다고 할 수 있다. 공간이나 규모 면에서는 점차 커져가지만, 감독 고유의 인장 같은 스타일이 크게 도드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간 한국에서 선보였던 대부분의 첩보물이 절도 속의 화려함을 보여줬던 맨몸 액션에 비중을 할애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헌트>의 액션은 고수의 관록이 느껴지는 총기 사격으로 상대를 철저히 쓰러뜨리는 마이클 만식 총격전을 제대로 보여준다는 데서 충분히 합격점을 얻을 만하다. 늘상 권총만 가지고 쏴대던 액션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 M16 소총을 제대로 파지한 채 도심 속에서 사정없이 격발하는 모습은 고전적이면서도 꽤나 신선하다. <히트>의 오마주인 동시에 1980년대 배경의 <쉬리>를 보는 반가움이랄까.


특히 영화적으로 좋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액션 장면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박평호와 김정도의 사내 난투극이다. 이것은 이 영화가 총격전 외에 유일하게 보여주는 일대일 맨몸 액션이다. 서로를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두 인물이 서로의 치부를 건드리다 한데 뒤얽혀 싸우고, 계단을 뒹굴며 떨어지는 모습으로 끝난다. 이때 포스터의 모습처럼 북측의 박평호는 위에, 총을 쥔 남측의 김정도는 아래에 있다.  단발의 총성으로 죽일 수 없도록 복잡하게 얽힌 두 사람의 관계성과 최후를 암시하는 미장센이다. 비교적 깔끔한 김정도에 비해 어깨 솔기가 터져버릴 정도로 심한 몰골이 된 박평호의 모습에서 두 사람의 심리상태를 얼추 비교할 수 있기도 하다.


둘째는 클라이맥스인 방콕에서의 테러 장면이다. 그간 숨겨 왔던 양쪽의 동상이몽이 폭주함에 따라, 영화는  사람이 목표하는 바가 무엇인지 관객들도 알아채기 어렵도록 어지럽게 연출한다. 이데올로기를 통한 사람들 사이의 혼란과,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없는 사람들도 속절없이 죽어나가야 한다는 메시지에 들어맞는다. 평화 통일을 위해 대통령을 죽이려다 모두를 살리기 위해 대통령을 살려야 했던 평호, 대통령의 명령으로 무자비한 학살의 주범이 되고 대통령을 죽이기 위해 자신도 죽을 각오를  정도,  사람의 삶과 죽음이 "  있어"/ "살고 싶었나?"라는 대사를 통해 교차하는 순간 또한 인상적이다.


고민과 통찰이 만들어낸 수작


<헌트>를 두고 이정재 감독을 향해 ‘왜 그동안 이 정도의 연출력을 숨겨오고 있었냐’는 감탄과 찬사 섞인 성토가 많다. 사실 배우라는 아우라를 거두고 감독으로서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4년간 부던히 노력했을 모습을 생각하지 못한 말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영화감독이라는 직책은 그만큼 어렵다. 그중에서도 정서적인 응분이 가득 쌓인 80년대를 재조명해야 하는 영화라면, 조금만 잘못 만들어도 웬만한 영화 이상의 정치적 공박에 시달릴 것이다. 요즘의 관객들은 이념이 만들어낸 신파에 넘어갈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무래도 그러한 깊은 걱정이 ‘감독으로서의 차기작은 당분간 없다’며 이정재가 손사래를 치는 이유일 것이다. 영화를 통한 과다한 정치적 해석과 이념 갈등 조장에 대한 두려움, 역사의 죄인이자 속죄자의 모습을 어떻게 그려내야 하는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의 양극단을 균일하게 비판하는 모습은 영화에 공들인 시간과 고민, 노력 말고도 이정재라는 개인이 지닌 고유의 통찰력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이 영화로 비로소 감독이자 배우 이정재의 팬이 된 나로서는, 그가 꼭 차기작을 연출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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