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을 선물받은 펠레우스
펠레우스는 아이아코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이아코스는 신들이 인정한 가장 경건한 인간으로 죽은 자들조차 재판할 수 있도록 저승의 재판관으로 임명된 존재였다. 그러나 펠레우스는 그러한 아버지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도 젊은 시절부터 끊임없는 실수와 폭력, 도피와 추방의 연속을 살았다. 그는 이복형제 포코스를 실수로 죽이고 아버지의 곁을 떠나야 했다. 고의든 아니든 형제를 죽였다는 사실은 펠레우스의 삶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겼고 그는 이 죄를 품고 타지로 떠났다.
그가 망명한 곳은 테살리아였고 그곳의 왕 악토르는 그를 받아들여 자신의 딸 안티고네와 결혼시킨다. 펠레우스는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또 다른 비극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수로 장인 악토르를 죽이게 된 것이다. 다시 그는 죄인이 되었고 또 다른 땅으로 도망쳐야 했다. 그는 아카스토스 왕에게 의탁했으나 이번에는 인간의 욕망과 음모가 그를 덮쳤다. 왕비 아스티다미아는 펠레우스를 유혹했지만 거절당하자 그가 자신을 욕보였다고 거짓 고발했다. 그 결과 펠레우스의 아내 안티고네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자살했고 그는 무장 해제된 채 산속에 버려진다.
이때 그를 구한 것은 인간도, 신도 아닌 중간 존재 켄타우로스 케이론이었다. 펠레우스는 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회복의 시간을 보내며 또다시 삶을 이어갈 힘을 얻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랑을 향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를 아내로 맞이하고자 했다. 신들은 예언을 통해 테티스가 낳을 아들이 아버지보다 위대한 존재가 될 것이라 하였고, 그 때문에 제우스도 포세이돈도 그녀를 피했으며 인간 펠레우스에게 그 운명이 맡겨졌다.
테티스는 여신이기에 쉽게 붙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불, 물, 바람, 사자, 나무, 뱀 등 다양한 형상으로 변하며 펠레우스를 거부했다. 하지만 네레우스의 조언을 따른 펠레우스는 끝까지 그녀를 놓지 않았고, 결국 테티스는 그와 결혼하게 된다. 이 결혼식은 신과 인간, 바다와 육지, 미래와 과거가 만나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결혼이 야기한 사건은 축복이 아닌 전쟁이었다. 에리스는 초대받지 못한 것에 분노하여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황금 사과를 던졌고, 이로 인해 파리스의 심판이 이루어지며 트로이 전쟁이 시작된다. 펠레우스는 아내를 얻었지만 동시에 세상에 전쟁을 불러오는 씨앗도 품은 셈이다.
펠레우스와 테티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킬레우스는 예언에 따라 평범한 인간의 삶을 살지 못한다. 그는 스승 케이론 밑에서 교육받았고, 여장을 하고 궁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의 계략으로 정체가 발각되고 트로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아킬레우스는 전쟁에서 위대한 전사로 이름을 떨쳤지만 결국 운명대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펠레우스는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테티스는 바다로 돌아가며 그의 곁을 완전히 떠난다. 신들은 그를 죽음으로부터 지켜주었지만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또 다른 고통이었다. 펠레우스는 끝내 죽지도 못하고 살아 있는 자로서 모든 상실을 기억하며 영생하게 된다.
펠레우스의 신화는 현대 문학에서 반복적으로 변형되어 등장하는 세 가지 구조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세대 간의 유산과 대물림, 죽은 자를 기억하는 산 자의 고통, 그리고 신적 존재와의 결혼이라는 격차 있는 관계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백 년의 고독』에서 부엔디아 가문은 마콘도라는 마을에서 수세대에 걸쳐 비슷한 이름과 운명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처음에는 새로운 시작이었던 마콘도는 점점 폐쇄적이고 고립된 공간으로 변모하고, 가문은 스스로 만든 신화를 감당하지 못한 채 몰락한다. 기억하지 못한 과거는 무의식 속에서 되살아나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만든다. 펠레우스가 자신의 죄와 아들의 죽음을 끝까지 기억함으로써 신화를 남겼다면 부엔디아 가문은 기억을 잃은 결과로 신화를 무너뜨린 셈이다.
할레드 호세이니의『연을 쫓는 아이』속 아미르는 친구 하산을 배신한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아간다. 그는 세월이 흐른 뒤 하산의 아들을 구하고자 하는 여정을 통해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용서를 구하는 삶을 택한다. 펠레우스가 포코스를 죽인 후 죄를 지운 것이 아니라 끝내 짊어지고 살아가며 아들의 삶과 죽음을 견딘 것처럼 아미르 역시 살아남은 자로서 죽은 자를 대신해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주인공 와타나베는 친구 기즈키의 자살 이후 연인 나오코와의 관계를 통해 죽음과 상실의 시간을 견딘다. 그는 기즈키와 나오코의 부재를 없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그들의 존재를 계속 떠올리는 삶, 즉 바움가르텐이 말한 삶과 삶이 아닌 것 사이의 림보 같은 상태로 살아간다. 펠레우스가 아킬레우스를 끝까지 기억하며 아들의 존재를 사라지지 않게 붙잡는 것과 같은 구조가 와타나베의 삶에도 반복된다.
김만중의 『구운몽』에서 양소유는 꿈속에서 모든 이상적인 것을 누리지만 결국 그것이 환상임을 깨닫고 출가하게 된다. 테티스를 얻기 위해 사투를 벌인 펠레우스는 결혼에 성공하지만 그녀는 끝내 곁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상적인 존재와의 결합은 인간에게는 일시적인 환상일 뿐이며 꿈처럼 스러질 운명이라는 점에서 두 서사는 명확한 구조적 유사성을 가진다. 현실에 다시 돌아와야만 하는 인간의 조건, 그 회귀는 곧 신화적 결합의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그럼 펠레우스가 받은 영생은 정말로 상일까? 표면적으로 보자면 신들은 그를 용서했고 여느 인간이 받을 수 없는 영생을 획득했다. 하지만 그간 겪은 고초, 아들을 잃은 슬픔을 영원히 반복하면서 살아야 한다. 망각이 없는 영원한 삶. 오히려 이것은 기억의 감옥 안에 갇혀 영원히 고통을 받는 징벌이라는 개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흔히들 말한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축복이라고. 이 축복이 사라진 영생. 과연 진정한 상이 맞을까?
그럼 왜 신화에서 그는 신의 용서를 받았으며 이를 상이라고 하는 것일까? 먼저 용서의 개념부터 살펴보자면 우리는 흔히 용서라는 것을 범한 죄에 대하여 소급 적용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들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용서가 현재에서 미래로 흐르는 시간대를 의미한다. 즉, 과거에 저지른 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부터 그 죄에 대하여 더는 벌을 내리지 않고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는 일종의 석방의 개념에 더 가깝다. 따라서 신화 속 용서는 죄가 없어짐이 아니라 이제 죄값을 다 치뤘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럼 왜 이를 두고 신의 입장에서는 상이라고 하는 것이며 굳이 이런 상을 내렸을까? 여기에서 포인트는 기억이다. 굳이 왜 그의 기억이 살아남았어야 했을까? 그 이유를 우리는 그의 아들 아킬레우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에 대한 답은 폴 오스터의 장편 소설 바움가트너가 알려준다. 산 자와 죽은 자는 연결되어 있으며 이 연결로 죽은 자의 의식이 살아 있다. 이때 연결된 산 자가 죽으면 먼저 죽은 자의 의식은 영원히 소멸된다고 폴 오스터는 바움가트너의 입을 빌려 말한다.
따라서 그의 기억은 이미 죽은 아들인 아킬레우스를 후대에까지 살아 있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펠레우스가 영생을 얻었다면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덕분에 제우스가 항의하는 것이 귀찮아 한꺼번에 쓸어버린 트로이 전쟁 이후에도 그의 명성이 소멸하지 않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것이 아닐까? 이 논리로 따지자면 그가 받은 영생은 부모의 입장에서 고통 감내를 할 정도로 매력적인 상이었으리라.
당시에 영웅의 아버지가 펠레우스만 있던 것도 아니고 심지어 그는 죄인의 몸이었는데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굳이 그가 선택되었을까? 이는 기독교적인 관점을 투사해 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흔히들 그를 두고 가장 경건한 인간의 아들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가장 경건한 인간은 그의 아버지인 아이아코스를 말한다. 즉, 아버지의 경건함에 대한 상으로 그가 선택되었다고 보는 것이 기독교적인 관점이다. 세상의 부모들에게 꽤 섬뜩한 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자식을 위해서 해야 할 것이 돈만 많이 버는 것이 아님을 신화는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돋보이는 점은 용서의 아이러니가 시간의 역설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영생을 얻은 자는 분명하게 펠레우스이다. 그러나 아들의 명성에 가리워져 직접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지 않은 사람에게 펠레우스는 꽤 낯선 인물이다. 따라서 기억이 삶이라면 실질적 영생은 펠레우스가 아니라 그의 아들 아킬레우스일 것이다. 이 또한 아이아코스가 그에게 대물림한 선물처럼 아버지의 삶을 대가로 받은 하나의 축복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살아남은 자는 끝까지 기억을 견딘 자다. 펠레우스는 그렇게 아들의 이름을 역사로 남겼다.
펠레우스의 삶은 죄와 상실, 고통과 기억, 사랑과 전쟁의 연속이었다. 그는 살아남았지만 그 삶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고, 오히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로서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바로 그 고통이 있었기에 아들의 이름은 세상에 남았고 신화는 완성되었다.
펠레우스는 용서받았지만 잊지 않았고 살아남았지만 쉬지 못했다. 그리고 신은 그에게 시간을 주었다. 그 시간은 고통의 반복이자 기억의 연장이었으며, 아킬레우스를 역사 속에 고정시키는 가장 인간적인 방법이었다. 신화는 우리에게 말한다. 진정으로 기억하는 자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이야말로 죽은 자를 살아 있게 만드는 유일한 방식일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