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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나Genna Aug 11. 2021

관종들의 시대의 자기표현법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자화상>

초보 관종의 딜레마 


“관심을 원하지만, 지나친 관심은 원치 않는다.” 모순적이지만 나는 타인의 관심에 대해 이중적인 마음을 갖고 살아왔다. 나라는 개인이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하고 도태되는 것도 슬프지만, 그렇다고 지나친 관심 속에 골머리를 앓고 싶지도 않다. 관심을 향한 기대와 두려움. 그 상충하는 감정들로 인해 원한다면 언제든 자기를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는 시대에 살면서도 늘 수동적인 미디어 소비자에 머물러 있었다.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창작활동에 돌입한 이상 관종의 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왜 글을 발표하는가? 읽히기 위해서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를 찾기 위해서다. 물론 창작 자체가 주는 즐거움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면 그 글은 일기장이나 노트북에 묻어둬도 충분하다. 글을 발행하겠다 결심하고 글을 쓰는 순간부터 나는 잠재적 독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내가 발표한 모든 글은 지금도 꾸준한 인내로 독자를 기다린다.


어디 글쓰기만 그럴까. 사진, 영상, 음악 등 형태를 불문한 모든 창작물은 관심을 바라며 만들어진다. 인스타그램에 쏟아지는 사진들, 유튜브에 넘쳐나는 영상들, 온‧오프라인의 각종 콘텐츠들은 오늘도 ‘많관부!(‘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의 줄임말)’를 외치며 유저들의 관심에 호소하고 있다. 그것이 받는 관심은 조회 수, 좋아요 수, 구독자 수 등으로 수치화되며 그 총량으로 냉정하게 가치평가를 당한다. 이에 모든 창작자는 관심을 쫓는 종자가 될 수밖에 없다.


처음으로 ‘관종들의 세계’에 입문한 소심 관종으로서 마주한 고민은 ‘어떻게 나를 표현할지’에 관한 것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내가 쓰는 언어에는 내가 담긴다. 주로 지식을 다루는 글쓰기를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경험, 생각, 철학을 거치지 않고서는 한 문장도 원활하게 조립되지 않는다. 결국 모든 창작물은 ‘나’라는 사람을 저마다의 방식대로 소리치게 되어 있었다.


어떠한 나를, 얼마큼, 어떻게 드러낼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종종 주저하고 머뭇거렸다. 자기표현이라고 해봤자 비공개 SNS 운영과 카톡 프로필 사진 바꾸기가 다였던 내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자기를 증명하는 세계에 들어왔으니 주춤거릴 만도 했다. 이건 너무 감정적인가? 너무 사적인가? 이거 너무 위선 아니야?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고? 이건 너무 염세적인데. 이건 너무 자랑이잖아! 등등. 내가 드러나는 지점마다 스스로를 검열했고, 이게 진짜 나인지 확인해야 했다.


창작물 속 ‘나’는 나의 여러 모습 중 내가 표현하고 싶은 나를 취사선택해 드러내게 되어있다. 문제는 이를 얼마나 진솔하고 담담하게 풀어가느냐였다. 나의 전체를 담을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내가 아니어서도 안 됐다. 온갖 감정과 생각을 토로하며 지나치게 솔직하고 싶지도, 과도한 연출로 행복하고 멋진 나를 꾸며내고 싶지도 않았다. 양극단의 선을 넘는 즉시 내가 민망하고 낯설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전면에 내세워 관심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쳐 가는 관문일까? 초보 창작자이자 초보 관종인 나는 여전히 조금은 헤매며 나를 표현하는 세련되고 적절한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생존전략으로서의 자기표현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여성 순교자로서의 자화상> (1613)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의 그림을 볼 때면 작가의 자기표현과 관련해 많은 귀감을 얻는다. 젠틸레스키는 17세기 초중반 바로크 시대에 활동한 흔치 않은 이탈리아 여성 화가이다. 피렌체미술아카데미의 높은 성별의 벽을 넘은 첫 여성 회원이었다. 여성은 정식 교육을 받을 수 없던 시절, 예술의 중심지 피렌체에서 인정받을 만큼 그녀는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젠틸레스키는 본인 작품에 자기 얼굴을 자주 등장시키는 화가였다. 성경·역사·신화의 장면이 그녀 작품의 주 소재였는데, 그녀는 종종 그림 속 여주인공의 외모에 거침없이 자기 모습을 그려넣었다. 이런 관행은 그 시대에 꽤 흔했지만, 대부분의 작가가 남성이었기에 그들의 모습으로 묘사될 수 있는 인물도 남성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혜성처럼 나타난 한 여성 작가가 상징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자신의 얼굴로, 그것도 빼어난 실력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그녀는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


젠틸레스키는 왜 작품에 자신의 이미지를 차용했을까? 다양한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당시 피렌체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관심을 받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젠틸레스키의 초기 작품 중 그녀의 모습이 포함된 사례들이다


젠틸레스키는 1612년 피렌체에 정착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르네상스 천재들이 한바탕 휩쓸고 간 유럽의 미술계는 이미 다른 차원에 올라와 있었고, 비범한 신예로 북적이는 냉혹한 경쟁의 장이었다. 그녀와 동시대에 활동한 화가들은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van Rijn), 루벤스(Peter Paul Rubens),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등 서양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거장들이다. 그들과 같은 무대에 서서 예술 애호가들의 이목을 끌어야 했으니 실력과 더불어 적극적인 자기 홍보가 필요했다. 젠틸레스키는 그 치열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전파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단지 화가의 외양을 알리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젠틸레스키는 자기 이야기를 전하는 데에도 능통했다. 그녀가 특정 인물을 본인의 모습으로 그리기로 결정했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뚜렷한 의도 없이 편의상 자기를 그려넣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 중에는 대상에 자아를 투영해 본인에 관한 메시지를 던지는 경우가 많았다. 


세간의 관심을 받고 국제적 화가로 도약하느냐, 한 명의 천재 지망생으로 잊히느냐. 관심이 곧 생존인 혹독한 ‘관종들의 세계’에서 젠틸레스키는 자기라는 소재를 의욕적으로 사용하는 승부수를 뒀다. 젠틸레스키는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고 싶었던 걸까. 이를 알아보기 전에 그녀가 살았던 시절에 ‘자기표현’이 지녔던 중요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망


젠틸레스키의 시대는 ‘자아’와 ‘개인’의 개념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때였다. 이러한 흐름은 14세기 말에서 15세기를 거치며 서서히 진행되었다. 이 시기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중세의 신학적·철학적 권위에서 벗어나 보다 주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다. 이들에게는 자기 자신도 객관화의 대상이었다. 그만큼 깊은 자아 성찰을 통해 자기라는 존재를 뚜렷이 인지하려 했다. 그 결과 자서전, 일기, 편지, 소설 등 개인의 삶과 감정을 기록하는 작업이 활발해졌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 자아와 세계에 대한 객관적 탐구, 그리고 그것을 통해 발견한 개성의 표출. 이것이 르네상스의 핵심 정신이었다.


미술계에서도 개인을 주제로 삼은 예술이 부상하며 초상화의 시대가 열렸다. 15세기 이래 군주부터 부유한 시민에 이르기까지 ‘돈 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존재를 역사에 영원히 새기기를 원했다. 이들에게 초상화는 단순한 기록이 아닌 자신의 권력, 명예, 아름다움, 성격, 취향 등을 개성껏 표출하고 불멸의 상태로 각인하는 수단이었다.


이렇게 개인의 인생을 담을 만큼 정교한 초상화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회화 기법의 획기적 발전이 있었다. 바로 유화의 등장이다. 중세 미술에서 주로 쓰인 프레스코화나 템페라화는 원료가 빠르게 굳고 수정이 불가하다는 치명적 단점으로 인해 화가가 충분한 시간을 들여 대상을 묘사할 수 없었다. 그런데 15세기 초 얀 반에이크(Jan van Eyck)에 의해 유채의 활용이 본격화되면서 미술계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건조 속도를 조절할 수 있고, 추가 수정까지 가능한 유화의 발견은 그야말로 회화법의 혁신이었다. 덕분에 화가들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가 보는 세상을 자기 실력만큼 정밀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얀 반 에이크의 초상 | 얀 반 에이크 <아르놀리피의 결혼식>(1434)


자기표현의 욕구와 향상된 기술력이 맞물리면서 초상화는 종교화에 버금가는 예술 장르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한스 홀바인(Hans Holbein)과 같은 16세기 화가들의 역할이 컸다. 초상화는 화가들의 핵심 수입원이 되었고, 초상화 실력이 화가의 인기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그렇기에 화가의 자화상은 아주 트렌디한 자기 홍보 수단이자, 화가의 개성을 강하게 표출해 화가 자체에 대한 관심을 일으킬 수 있는 매개체였다.


젠틸레스키는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 일단 젠틸레스키는 뛰어난 실력의 여성 화가라는 사실만으로 바로크 미술계에서 특별한 위상을 점했고, 게다가 당대인들의 시선을 끄는 미모의 소유자였다. 또한 이미 10대부터 제법 굴곡진 인생을 살아와, 전달하고자 하는 뚜렷한 메시지까지 갖고 있었다. 이에 젠틸레스키의 초상은 어디서 등장하든 강력한 스토리텔링의 힘을 발휘했다.



강인하고 담담한 자기표현법


젠틸레스키는 주로 여성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렸다. 우리에게 알려진 57점의 작품 중 49점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거나 남성과 동등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성을 많이 그렸다는 단순한 사실보다 더 주목할 지점은 젠틸레스키가 여성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40년 넘는 활동 기간 동안 화풍의 변화도 있었기에 그녀의 묘사를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 활동 초반에는 강인하고 도전적이고 대범한, 심지어 폭력적인 여성을 자주 등장시켰다.


젠틸레스키가 여러 번 반복해 그린 여성 중에는 『구약성서』 「유딧기」의 주인공 유디트가 있다. 유디트는 조국을 정복한 아시리아의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미인계로 유혹하고, 그의 목을 칼로 베어버린 신화적 여성이다. 카라바조를 비롯한 저명한 화가들의 오랜 사랑을 받아온 주제이다. 그중에서도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는 가장 강렬하고 극적인 연출로 유명하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1614~20)


당대인들은 이 작품을 보며 크게 세 가지에 놀랐다. 첫째로 여성의 실력이 이렇게 훌륭할 수 있다는 사실에, 둘째로는 그림의 과격성과 잔인함에, 마지막으로 유디트의 모습이 화가 자신을 너무 닮아 있어서다.


 작품 속 유디트는 아주 결연한 표정으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적장의 목을 쓸어버리고 있다. 한껏 앞으로 기운 몸을 통해 그녀가 매우 적극적으로 살해에 가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혈로 적셔진 침대는 너무나 사실적이라 등골이 오싹할 정도다.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는 그동안 그림에 등장해온 여성의 전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의 신체만 봐도 여성에게 기대되는 가냘픈 몸이 아닌 근육으로 다부진 몸이다. 어떤 두려움이나 소극성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전의 유디트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만큼 강인하고 잔혹한 여성을 보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그 여성이 화가 자신의 모습으로 그려졌다는 사실이 더욱 흥미를 자극했다. 젠틸레스키는 왜 이토록 대범한 여성에게 자기 얼굴을 입혔을까. 소문으로라도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그림에 그녀의 개인사가 얽혀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카라바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1598~99). 여기서 유디트는 앳딘 얼굴에 두려움 가득한 표정, 몸을 뒤로 젖힌 수동적 자세를 하고 있다.


젠틸레스키는 로마 전역을 시끄럽게 한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피렌체에 오기 전부터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1593년 로마에서 나고 자란 젠틸레스키는 화가였던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Orazio Gentileschi)의 가르침 아래 17세부터 화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바로 아버지의 동료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에게 성폭력을 당하며 깊은 상처를 입고, 원치 않은 법적 공방에 휘말렸다.


세간의 관심은 피해자인 젠틸레스키를 향했고, 재판은 그녀의 ‘순결’ 여부를 밝히는 것에 집중되었다. 타시가 정말로 그녀를 강간했더라도 그전에 이미 성경험이 있었다면 타시의 행위가 죄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7개월의 재판 끝에 타시의 유죄가 밝혀졌으나 선고는 끝내 집행되지 않았고, 젠틸레스키는 이미 문란한 여성이 되어 있었다. 재판 후 1개월 만에 그녀는 가난한 피렌체 화가와 결혼하며 쫓기듯 로마를 떠나 피렌체로 왔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 삶을 시작하며 그녀는 굳은 결의를 다졌을 것이다. 피렌체에서 그녀는 화가로서의 성공을 이루고, 개인의 명예도 회복해야 했다. 좋지 않은 상황에서 그녀는 정면 돌파하는 방법을 택했다. 스캔들이나 트라우마의 그늘 아래 파묻혀 있기를 거부하며 오히려 자신의 어두운 경험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개입시켰다.


피렌체에 정착한 첫해에 젠틸레스키는 첫번째 「유디트」를 완성했다(두 버전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가 있다. 하나는 1612년, 다른 하나는 1614~20년 사이에 그려졌다). 작품을 본 이들은 백이면 백, 유디트에 화가의 자아가 이입되어 있다고 믿었다. 홀로페르네스는 젠틸레스키가 당한 폭력의 실체를 표현하고, 유디트는 그 폭력을 직접 심판하는 작가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읽혔다.


대중의 해석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젠틸레스키는 반복적으로 유디트를 주제로 한 또다른 작품들을 발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숨에 가장 화제성 있는 화가에 등극했다. 그 결과 피렌체에서 활동한 지 3년 만에 자신을 향한 자극적 관심을 화가로서의 존경과 작품을 향한 관심으로 바꿔놓았다. 자신을 숨기거나 거짓 자아를 꾸미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 실력으로 자기 삶과 의지를 표출하며 이룬 성과였다.


젠틸레스키 <알렉산드리아 성녀 카타리나로서의 자화상> (c.1615~17)


「유디트」가 극적이고 강렬한 자기표현이었다면, 「성녀 카타리나로서의 자화상」은 담담하고 차분한 버전이다. 카타리나는 4세기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한 성인으로, 젠틸레스키가 자주 그린 인물 중 하나다. 손에 들린 종려나무 잎과 못 박힌 수레바퀴를 통해 그녀가 성녀 카타리나임을 알아볼 수 있다. 기독교 미술에서 종려나무 잎은 순교자를 상징하며, 못 박힌 바퀴는 순교 당시 그녀의 사형 도구였기 때문이다.


전설에 의하면 카타리나는 로마 막센티우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에 저항하다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았다. 끝까지 저항하자 황제는 못이 박힌 바퀴로 카타리나를 찢어죽이려 했다. 그런데 바퀴가 그녀의 손에 닿자마자 부서지는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카타리나는 결국 참수형에 처했지만, 그녀 손에 부서진 수레바퀴는 그녀의 강단과 신념을 상징하는 성물로 남았다. 젠틸레스키에게도 고문의 경험이 있었다. 타시와의 다툼 때 재판부는 타시가 아닌 젠틸레스키의 손톱을 찌르며 고문했다. 끝까지 고통을 참고 피해를 주장한다면 고발의 진실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이상한 이유에서였다.


젠틸레스키의 카타리나는 고통에 분노하고 몸부림치는 여인이 아닌, 고통을 차분히 감내하고 마침내 극복해낸 여인으로 보인다. 고문의 당사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침착한 표정에 절대 꺾이지 않을 강한 눈빛을 하고 있다. 그녀의 손에는 부서진 바퀴가 들려 있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있었으나 결국 부서진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를 죽이려 했던 나무 바퀴다. 사실 이 그림은 ‘젠틸레스키의 모습을 한 카타리나’인지 ‘카타리나의 모습을 한 젠틸레스키’인지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두 자아가 혼재되어 있다. 젠틸레스키는 관객이 두 여인을 구분하지 않고 카타리나라는 프리즘을 통해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기대했을 수도 있다.


상이한 방식으로 젠틸레스키를 표현하는 ‘유디트’와 ‘카타리나’이지만, 두 여인 모두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같다. 오히려 스스로 고통을 처단하고 억제하는 통제자의 모습이다. 고통을 이기고 전설로 남은 것은 그녀에게 고통을 준 대상이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 아마 이것이 젠틸레스키가 말하고 싶은 바였을 것이다. “내게 고통을 안긴 것들에 나는 굴하지 않아. 두고 봐, 고통을 꺾고 전설이 될 나의 모습을.” 젠틸레스키의 자화상은 그 자체로 훌륭한 예술품이자 그녀 삶의 투지를 표명하는 대변인이었다. 



기억되고 싶은 나


화가의 길을 나설 때부터 젠틸레스키의 삶은 원치 않은 소용돌이와 소문으로 얼룩졌다. 그 경험은 필연적으로 그녀의 작품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화가로서 관심을 받는 데 이를 영리하게 역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개인사라는 프레임 속에서만 기억되기를 원치는 않았던 것 같다.


젠틸레스키는 타인의 가면을 쓰고 말하는 방식을 자주 사용했기에, 그녀의 초상에는 항상 그림 속 모델이 얼마나 젠틸레스키를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그녀다운 모습이자 가장 기억되고픈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 있다면 아마 이 그림일 것이라 추측한다.


젠틸레스키 <회화의 상징으로서의 자화상>(1638)


이 작품은 그림을 그리는 젠틸레스키의 역동적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다. 화가들이 작업중인 자기 모습을 그릴 때에는 주로 이젤 앞에 앉아 근엄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구도를 사용한다. 그래야 화가의 권위도 표현하고, 본인 얼굴을 관찰하며 그리기에도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림 속 젠틸레스키는 헝클어진 머리에 반쯤 몸을 뒤튼 채 관객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는 듯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다. 회화를 즐기는 고상하고 우아한 모습이 아닌, 팔을 걷어붙이고 거침없는 붓질을 이어가는 전문가의 자태다.


상징과 비유를 좋아하는 그녀가 그저 현실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이런 자화상을 남기진 않았을 것이다. 그림 속 화가는 젠틸레스키의 현실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상과 꿈을 드러내는 존재였다. 먼저 왜 작품의 제목이 「회화의 상징으로서의 자화상」인지부터 살펴보자. ‘회화’란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당시 ‘회화를 의인화하면 이런 모습일 것’이라고 통용되는 정형화된 이미지가 있었다. 이러한 이미지는 이탈리아 도상학자 체사레 리파(Cesare Ripa)에 의해 구체화됐다. 다음은 그의 책 『도상학(Iconologia)』((1603)에 등장하는 ‘회화’의 외형에 관한 설명이다. 


회화의 알레고리(La Pittura)
'회화'는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의 머리는 완전히 검고 부스스하며 여러 갈래로 꼬여있다. 창의력을 보여주는 반달 같은 눈썹을 지녔고, 그녀의 입은 귀까지 연결된 천으로 덮여있다. 그녀의 목에는 가면이 달린 금 목걸이가 걸려있다.  - 체세라 리파의 『도상학』 중

젠틸레스키의 자화상은 ‘회화’의 도상을 닮았다. 천으로 입이 덮여 있다는 부분을 제외하면 젠틸레스키는 거의 완벽하게 자신을 ‘회화’의 전형으로 표현했다. 얼핏 보면 여느 화가의 일상적 모습이지만, 그 안에는 이 여인이 바로 ‘회화’의 화신이라는 과감한 자기소개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시도에는 역시나 그녀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이점으로 작용했다. 리파가 설명하는 ‘회화’의 외관이 일단 여인이라는 점에서, 다른 남성 화가들은 아무리 뛰어난 실력이라도 ‘회화’를 본인으로 묘사할 수 없었다. 성공한 여성 화가가 거의 전무하던 시절에 이런 시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젠틸레스키밖에 없었고, 그녀는 다시 한번 이 점을 잘 활용했다.


젠틸레스키는 이 작품에 가장 화가다운 자신의 모습을 새겨넣었다. 어떠한 사적 서사도 남기지 않고, 오직 한 화가의 자아만을 담았다. 그녀는 아마 그녀를 따라다니는 풍문들과 ‘피해자’라는 꼬리표로부터 일평생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이력에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녀가 넘어서야 할 장벽이기도 했다.


‘나를 영원에 새겨 후대에 남긴다면 어떤 모습을 기록할 것인가?’ 젠틸레스키는 화가로 남기를 원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소음을 소거한 채 화가로서 평가받고, 화가로서 영원히 존재하길 원했으리라. 그래서인지 이 자화상에서는 한 여인의 직업적 열성 뒤에 고이 숨겨진 “나를 화가로서 기억해달라”는 간곡한 호소가 들리는 것 같다.



나라는 존재가 당신에게 닿기를


젠틸레스키의 인생에서 관심은 꼭 필요하면서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관심은 양날의 검이 되어 그녀에게 명예도 주고 상처도 입혔다. 그 가운데 그녀는 항상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목소리를 냈고, 작품을 통해 자신의 진심이 사람들에게 닿기를 바랐다. 물론 작품으로 그녀의 전부를 알 수는 없다. 누구나 자기에게 유리하게 자기를 해석하고 드러내기 마련이니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 그래서 애써 기록으로 남긴 그 말들을 지금 우리가 400년의 시차를 극복하고 듣고 있다는 사실이다.


글을 쓰며 발견한 희열도 여기에 있었다. 혼자의 생각으로 끝났다면 무(無)로 사라졌을 말들이 기록되는 순간 유형의 실체가 되어 평생 만나지 못했을 누군가에게 닿는다. 시공간을 초월해 나의 세계를 보여주고, 언제든 새로운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기록이 지닌 신비함이다. 다만 기록의 주체도, 대화를 시작하는 주체도 나다. 내가 표현한 내가 영원히 남을 것이고, 내가 표현한 나로 사람들은 나를 기억하고 대할 것이다. 고로 이 대화의 진정성은 나에게 달려 있다.


글을 쓰면서 나의 세계에 관심을 갖고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이들이 있음을 안 순간부터 ‘나’를 더 진지하게 돌아보았다. 적어도 나를 경청해주는 이들에게 거짓과 위선으로 나선다거나 알아들을 수 없이 어지러운 말들을 무책임하게 내뱉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내게 더 관심을 쏟으며 흘려보냈을 만한 생각과 경험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진짜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 고심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더 이해하기도 했고, 무수한 생각에 묻혀있던 진심을 발견하기도 했다.


좋든 싫든 모든 창작자는 자신을 팔아 얻은 관심을 먹고 산다. 자신의 재능, 생각, 경험, 매력 그 모든 것이 창작물에 담겨 창작자를 표명한다. 작품 속 나는 현실의 나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닐 것이기에 그 만남이 허황되지 않도록 가능한 ‘진짜 나’를 가장 멋진 방법으로 새겨넣고 싶다. 젠틸레스키의 그림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자신이 전하고픈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 밤낮 골치 아파하며 그 방법을 찾고, 온 재능을 다해 그려나간 그녀의 시간들이 작품과 함께 보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내가 보는 세계와 나의 생각들을 한 문장 한 문장 정성스레 써내려가려 한다. 그렇다면 아주 작은 관심만 받게 된다하더라도 큰 의미가 남을 것 같다. 이것이 이제 막 관종들의 세계에 뛰어든 병아리 작가인 나의 생존전략이자 스스로에게 하는 초심의 다짐이다.



참고문헌


Bissell, R. Ward. Artemisia Gentileschi and the Authority of Art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9).

Garrard, Mary D. Artemisia Gentileschi: The Image of the Female Hero in Italian Baroque Art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8).

Treves, Letizia. Artemisia (The National Gallery Company Ltd, 2020).

Williams, Holly. "The artist who triumphed over her shocking rape and torture". BBC Culture. Retrieved 16 April 2020 (27 August 2018).

리하르트 반 뒬멘. 개인의 발견. 최윤영 옮김 (서울 : 현실문화연구, 2005).

이수진 (2020).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의 작품에 나타난 여성 이미지의 특성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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