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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나Genna May 13. 2021

비오는 날의 무기력함 벗어나기

오귀스트 르누아르 <우산>

날씨가 기분을 좌우할 때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이들의 감성에 잘 공감하지 못한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낭만적일 때도 있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일단 집을 나서면 비는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별다른 짐이 없어도 최소 한 손에는 휴대폰, 다른 손에는 가방을 들고 다니는 내게 우산은 또 하나의 성가신 짐짝이다. 원래도 그리 반가운 존재는 아니었으나 생활에 불편한 수준이었던 비가 어느 순간 내게 정서적인 영향을 주고 있음을 발견했다. 


비 오는 우중충한 날씨가 나를 가라앉힌다고 느낀 때는 두번째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였다. 그때  주로 원룸 자취방에서 하루 종일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했다. 소화해야 할 공부 분량이 절대적으로 많았고, 곧 있을 수업에서 교수님의 질문 공세로부터 살아남아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컸다. 새벽부터 일어나 깨알 같은 글씨로 된 원서를 읽어내려가다보면 금세 어둑어둑해지다 깊은 밤이 찾아왔다. 할 일은 쌓여 있는데 하루는 금방 저물었다. 시간에 쫓기는 나날이 이어지니 마음은 늘 조급하고 갑갑했다. 쉼터가 되어주는 사람들은 있었으나 어쨌든 세상살이는 오롯이 혼자 견디는 몫이었다.


시간의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어서였을까. 언제부턴가 날씨의 흐름에 예민해져 있었다. 햇빛 창창한 날에는 그나마 마음도 화사했다. 반면 짙은 하늘에서 우두둑 비가 떨어지는 날에는 기분에까지 검은 먹구름이 드리웠다. ‘나는 왜 사서 고생일까? 내 미래는 어떻게 될까?’ 괜한 ‘현타’와 앞날에 대한 걱정까지 피어올랐다. 비 오는 스산한 날이 계속될 때면 마음도 날씨와 함께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감정 기복이 없다고 자부하며 살아온 나에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환경에 따라 기분이 변하는 경험은 낯설고 꺼림칙했다. 그때의 감정이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인지 지금도 비 오는 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 비 오는 날이란, 귀찮고 성가신 일이 생기거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력감이 찾아오는 그런 날이다. 그러나 인생이 늘 화창할 수만은 없기에 자연의 순리처럼 돌아오는 무기력한 날들을 견디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비 오는 날의 설렘?


르누아르 <우산>(The Umbrellas, 1881-86)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의 「우산」 속 풍경은 얼핏 보면 축제의 한 장면으로 착각할 만큼 경쾌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중앙에 반쯤 가려진 여자가 하늘을 확인하며 우산을 펴는 것을 보면 이제 막 비가 오기 시작한 듯하다. 파리 시민들은 모두 동일한 색채의 파란 우산을 꺼내들고 각자의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겹겹이 겹쳐진 우산들은 마치 하늘로 팡팡 튀어오르는 모양새다. 비 오는 거리의 칙칙하고 무거운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림 속 인물들에게서 옅은 미소와 함께 알 수 없는 설렘이 묻어난다.


비 오는 날의 설렘이라.


런던 내셔널갤러리에서 「우산」을 관람한 날은 쨍했던 날씨가 순식간에 캄캄해지며 굵은 빗줄기를 쏟아내던 8월의 어느 날이었다. 런던은 이미 악명 높은 날씨의 도시이지만, 그래도 여름은 양반이었다. 그 악명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계절은 가을과 겨울이다. 


비로 시작된 하루라도 꼭 한 번은 해가 뜨는 여름날과 달리 11월부터 거의 3월까지 런던은 늘 축축하고 그늘진다. 거기에 해까지 짧아지니 사람들은 쉽게 우울감에 빠져든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유럽의 휘황찬란한 크리스마스 장식들은 을씨년스러운 날씨와 그로 인한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한 안쓰러운 노력의 일환이다. 시끌벅적한 연말이 지나고 다시 휑한 거리에 비만 오는 1월이 찾아올 때, 가장 많은 이들이 무력감을 호소한다. 오죽하면 ‘1월 우울증(January Blues)’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런 도시에서 비 오는 날의 설렘은 화창한 날의 우울함보다도 어색한 감정이다. 물론 르누아르가 그린 「우산」의 배경은 런던이 아닌 파리다. 그럼 파리의 비 오는 날은 좀 다를까? 파리는 비가 잘 오지 않는 화창한 날씨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여름에 한정된 이야기다. 가을과 겨울의 파리는 놀랍게도 런던만큼 혹은 런던보다 자주 비가 내린다. 런던과 파리살이를 모두 경험한 한 지인에게 “나도 런던 아니면 파리에서 살고 싶은데, 런던은 날씨 때문에 조금 두렵다”고 말하니, 그는 “런던이나 파리나 매한가지”라며 너무 런던만 오명을 쓴 것 같다고 발끈했다. 프랑스인들도 해만 뜨면 밖으로 뛰쳐나갈 만큼 비를 즐기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르누아르는 19세기 후반 인상파의 대가로, 일상에서 마주치는 순간의 인상을 화폭에 담아내는 화가였다. 그가 「우산」 속 장면을 목격했을 때, 비를 맞는 파리 시민들에게서 경쾌한 설렘이 뿜어져나왔고, 그의 그 인상을 작품으로 기록했다. 흔하디흔한 비, 너무 자주 내려 우울까지 안기는 비가 뭐 그리 설렜을까? 작품의 제목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사실 원제는 ‘우산들(Les Parapluies)’이라고 번역해야 더 정확하다. 르누아르가 주목한 것은 비 오는 날의 비가 아닌, 하나 둘씩 펼쳐지는 우산‘들’이었다. 사람들을 설레게 한 것도 비 자체가 아닌, 비 오는 날 펼 수 있는 우산이었다. 



길지만 짧은 우산의 역사


인류가 날씨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만큼, 우산은 문명이 시작된 이래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그러나 그 형태와 용도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우산을 뜻하는 영어 단어 ‘Umbrella’는 그림자 혹은 그늘을 뜻하는 라틴어 ‘움브라(#Umbra)’에서 파생했다. 어원에서 알 수 있듯, 역사적으로 우산은 비를 막는 용도보다는 햇빛을 가리기 위한 목적으로 등장했다.


우산의 긴긴 역사를 살펴보려면 대략 기원전 25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파피루스, 깃털, 종려나무 잎 등으로 만든 부채꼴 모양의 양산을 사용했다. 광활한 아프리카와 중동의 사막을 횡단해야 했던 이들에게 뜨거운 태양을 피하는 일은 언제나 필수적이었다. 양산은 귀족의 전유물이었지만, 남녀를 구분하지는 않았다. 파라오나 귀족이 가는 길에는 양산을 씌워주는 하인이 뒤따랐고, 전사들은 양산이 부착된 전차를 이용했다. 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서 양산은 장식품보다는 생필품의 성격이 강했다.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사용된 우산의 형태 (출처 Jona Lendering; Site: www.livius.org)


서양에서는 달랐다. 고대 그리스·로마에서도 귀족들이 햇빛을 가리기 위해 하인이 씌어주는 양산을 사용했다는 점은 비슷하다. 그런데 유럽에서 양산은 여성의 패션 아이템에 가까웠다. 오리엔트 지역에서는 남성도 실용적인 목적으로 양산을 썼다면, 그리스·로마 남자들은 양산을 쓰는 행위가 지나치게 ‘여성적’이고 연약해 보여서 그들의 남성성에 타격을 준다고 여겼다. 그들에게 양산은 마치 여성의 화장품이나 액세서리와 같았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오래도록 살아남아 먼 훗날 19세기까지 이어진다.


고대 그리스 도자기 (flickr @Sailko) ㅣ 고대 로마 잔 (@Anagoria). 양산(우산)이 여성의 소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세 유럽인들은 우산보다는 그들의 의복을 활용해 외부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 13세기경 사용되기 시작한 후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중세인의 기본 복장으로 정착했다. 후드는 비뿐만 아니라 추위와 바람을 피하는 데도 실용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중세 유럽에서는 우산에 대한 기록이 눈에 띄게 사라진다. 


중세 유럽의 수도사 복장


우산이 다시 등장한 때는 17세기 중반 아시아와의 교류가 증가하면서부터다. 가령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이나 중국에서 가져온 물품에 대해 남긴 기록 중 “여성들이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부채인데, 훨씬 크고, 긴 손잡이가 달려 있다”라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우산을 먼저 적극적으로 수용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17세기 중반 프랑스는 중국의 기술을 본떠 왁스로 코팅된 캔버스 천으로 우산을 만들기 시작했다. 초기 우산은 매우 크고 무거웠기 때문에, 고대의 쓰임처럼 귀족들이 하인을 대동해 사용했다. 


17세기 초부터 다시 우산(양산)을 사용하는 그림이 나타난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며 우산은 몇 단계 발전을 거듭해 대중성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1710년 파리의 상인 장 마리위스(Jean Marius)는 보다 가벼운 우산을 선보였고, 1759년에는 버튼으로 펼치는 우산이 등장했다. 우산의 개인화는 가능해졌지만, 우산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사용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마차가 주 이동 수단이었던 귀족과 부르주아계층에게 우산을 쓰는 행위는 본인이 ‘마차도 없이 걸어다녀야 하는 사람’임을 광고하는 꼴이었다. 이들은 우산을 챙겨다니며 천박한 사람으로 오해받느니 비에 젖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영국에서는 이러한 인식이 더 심했다. 프랑스가 한창 우산을 제작할 때도 영국에는 여전히  우산은 여성의 소품이라는 사고가 지배적이었다. 그런 영국에서 1750년 즈음부터 한 남성이 처음으로 당당히 우산을 들기 시작해 화제를 일으켰다. 바로 조너스 핸웨이(Jonas Hanway)였다. 자선 사업가이자 여행가였던 핸웨이는 신문물에 밝은 실용주의자였다. 러시아와 아시아 등지에서 우산 쓰는 광경을 흥미롭게 목격했던 그는 런던에 돌아와 즉시 우산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보기에 툭하면 비가 오고, 1년의 절반 이상을 빗속에서 보내야하는 런던만큼 우산이 필요한 곳은 없었다.


그러나 핸웨이가 우산을 쓰고 다닌 30년의 세월 동안 그는 항상 런던의 기이한 구경거리였다. 런던 남자들은 종종 그에게 “야, 프랑스인! 그냥 마차를 불러!”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당시 영국 남성에게 프랑스 남성이란 너무나 여성화된 연약한 존재, 그 여성성을 영국인에게 전파시킬지 모르는 위험분자들이었다. 따라서 영국인인 핸웨이를 프랑스인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우산을 쓰는 그의 행위가 영국 남자라면 하지 않을, 프랑스 남자 같은 ‘여성스러운’ 행위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인식 속에 우산은 부유하고 강인한 젠틀맨에게는 불필요한 물건이었다.


우산 쓴 조너스 한웨이와 그를 이상하게 여기는 런던 사람들. 비오는 날 우산 쓰는 게 뭐 그리 신기한지, 지금의 관점으론 그림 속 반응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핸웨이의 노력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는지, 우산은 19세기부터 영국 사회에 서서히 수용되기 시작했다. 우산의 성능이 크게 향상되어 점차 그 실용성을 인정받은 덕분이었다. 중요한 변화는 우산살에 있었다. 19세기 전반까지 우산살은 대개 나무나 고래수염으로 제작되었기에 비싸지고, 무겁고, 접기가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1852년, 새뮤얼 폭스(Samuel Fox)가 개발한 강철 튜브 우산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했다. 폭스는 강철의 속을 뚫은 튜브 형태의 우산살로 우산을 대폭 경량화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강철은 이전의 재료들보다 훨씬 튼튼하면서도 저렴했다. 폭스의 발명 덕분에 19세기 후반, 진정한 우산의 대중화가 실현되었다. 당시 예술작품에서 우산 쓰는 모습이 급증하는 이유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스타브 칼리보트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 (1877)
제임스 티소 <신부들러리>(1883~85) ㅣ클로드 모네 <우산을 든 여인> (1886)



비 오는 날의 우울감 벗어나기


르누아르의 「우산」이 그려진 1880년대는 우산의 대중화가 실현되어 귀족과 부르주아뿐만 아니라 파리 시민 전반이 값싸고 가벼운 우산을 사용하기 시작한 때였다. 「우산」 속 인물들에게서 묘한 설렘이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전 세대만 해도 모두가 우산을 소유할 수도 없었을뿐더러, 우산 사용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컸기 때문에 비가 온다고 해서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우산을 펼치지는 않았다. 


르누아르가 「우산」을 그리던 때는 달랐다. 이때의 파리 시민들은 내심 비가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새로 구입한 우산을 챙겨다니다가, 드디어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우산을 사용할 수 있다는 소소한 기쁨을 안고 우산을 펼쳐들었을 것이다. 날은 어둡고 칙칙했을지 몰라도 빗속에서 잔잔한 즐거움이 피어났다. 르누아르는 이 장면을 포착했다. 


파리 한복판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우산을 쓰는 장면이 런던의 중심에 걸려 있는 것도 재미있다. 마치 우산 쓰는 행위를 조롱하던 런던의 신사들에게 고상한 척 그만하고 너희도 동참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매일 같이 빗속에 살며 그로 인한 우울감까지 호소하는, 이 작품을 관람할 지금의 런던 시민들을 넌지시 위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 내리는 이 비가 그치지 않아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예상치 못한 것으로부터 당신의 하루가 충분히 설렐 수 있다고 말이다. 비 내리는 그늘진 나날의 무력감을 겪어본 나에게 이 작품은 그런 메시지로 다가왔다.


사실 비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주변 상황들이 나를 짓누르는 가운데 내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날씨까지 무겁게 가라앉으니, 오고 가기 마련인 물리적 환경의 변화를 무던하게 받아들일 의연함이 부족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비가 아니라 내 문제였다. 아마 그때 내 마음과 일상을 그림으로 남겼다면, 칙칙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느 컴컴한 비 오는 날로 그렸을 것이다.


르누아르 동시대에도 비오는 날을 그린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로 표현되었다.


반면 르누아르가 그때의 내 삶을 관찰하고 그린다면 아예 다른 작품이 되리라 확신한다. 그는 분명 비 오는 가운데 의외의 설렘과 즐거움을 찾아내 그것을 더 신경 써서 그릴 테고, 완성된 그림을 보여주며 “봐봐, 네 시간들이 그렇게 울적하지만은 않았다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그제야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내가 놓쳤던 순간들, 배우고 얻은 것, 소소한 기쁨들을 기억해내고 그 나날을 좀더 소중히 여기게 되리라. 


인생은 마냥 화창할 수 없다. 그렇다고 비 올 때 물장구치며 장난칠 수 있는 나이도 지났다. 그러니 우중충한 날들이 길어지면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화가 솟구치는 순간들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지금 그런 시간을 보내는 이에게 모든 것은 네 마음 문제라고, 벗어날 의지를 가져보라고 말하는 것만큼 무례한 조언도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비 오는 시간들에 마냥 우울하거나 그저 무너지지 않고, 그 안에서 작은 설렘을 찾아내어 그 순간을 조금이나마 즐길 수 있는 그런 삶의 자세를 갖춘 사람이고 싶다. 


돌이켜보면 지나갈 때는 빗속에 시야가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다 지난 후에 보일 때가 많았다. 나를 미소 짓게 하는 ‘우산’ 같은 순간들이 분명 있었기에 비에 흠뻑 젖지 않고 그 길을 헤쳐왔다. 몇 번의 헛디딤과 미끄러짐은 있었지만, 덕분에 나는 더 단단하고 요령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끙끙 앓다 비 그치고야 한숨 돌리는 것이 아니라, 화창했다 비 오고 바람 불고 또다시 맑아지는 삶의 모든 단계를 조금은 더 꿋꿋하게 마주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미술관에 들어올 때 바깥에는 검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올 때쯤이면 비가 다 그쳤기를 바랐다. 르누아르의 「우산」이 내뿜는 행복한 기운을 받은 걸까. 이제 꼭 그렇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밖에 폭우가 내리든, 보슬비가 내리든, 아니면 다시 해가 비추든 남은 하루를 충분히 화사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글을 발행하는 오늘 서울은 아주 화창하다못해 봄 치곤 매우 더운 날씨였습니다.

주말에는 내내 비 소식이 있네요. 화창한 날에도 비오는 날에도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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