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숙제
올해는 여름을 좋아하게 된 해로 기억될 것 같다. 여름을 이렇게 열심히 보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열심히 보냈다. 6월말부터 9월말인 지금까지 주말에 잠깐 멍 때리면서 격주정리 쓸 마음의 여유도 없이 육체가 느무 바빴다. 물론 가만히 침대나 소파에 누워 빈둥거린 수많은 시간들이 있었지만, 이건 그냥 방전된 에너지 급속 충전 같은 시간이었으니 제외. 땀이 잘 나는 체질이라 여름이면 항상 땀 안 나게 슬금슬금 걷거나 지나치게 운동하지 않으려고 살아왔었는데, 그 시간들이 무색할 만큼 올해는 햇볕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 여느 때보다 많은 운동을 했다 (오랜만에 한국어로 쓰는 글이라 그런지 이렇게 구태의연한 표현들을 자꾸 쓰게 되네...). 요가가 좋아진 게 제일 크고 긍정적인 변화. 인요가를 할 때 드는 잡생각들이 얼마나 부질없고 사소한지 알아가는 게 즐겁고, 빈야사를 하며 부실한 코어에 집중하며 노력한다. 밸런스 동작을 할 때마다 좌우가 확연하게 다른 몸에서 교정욕이 생기고, 요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마다 요가 하이를 느끼면서 의욕적인 저녁을 보내기도 했다.
올 여름에는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녔다. 코로나 이후 보복여행이란 표현도 많이 보였는데, 내 경우에는 그간 못한 여행에 대한 보상이었다기보다는 어느새 이 곳생활에 적응이 잘 된 것을 넘어 슬슬 지루해지려는 찰나에 활력을 조금이나마 불어넣어 새로운 시각을 가져보고 싶다는 욕구에서였다. 레만 호수가 있는 몽트뢰에서의 재즈 페스티발, 이스트 런던에서의 긴 주말, 카셀 도큐멘타, 그리고 여름휴가였던 조지아까지 열심히 돌아다녔고 이 정도면 잘 놀았다 싶다. 자세한 건 여행기로 써보려고.
이번 여름을 보내면서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지난 근 10년간 내가 추구해 온 가치관은 힘 빼기였다. 너무 치열하게 살지 말자, 너무 애쓰지 말자, 너무 힘들면 그만 둬도 괜찮다 하면서. 그런데 이게 마냥 좋은 건 아니라는 걸 조지아에서 5일 트레킹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배웠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몰입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라나는 것 같다. 진짜 몰입해 있는 상태에서는 관두고 싶은 생각도 안 들고 그냥 그 순간에만 집중하게 된다. 안전하게 보호한답시고 내가 나에게 지나친 헬리콥터 맘이 되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망설이기보다는, 그냥 하면 되는 것들이 인생에는 더 많다. 생각하고 멈추고 관둘까 고민하지 말고 그냥 하면 되는 그런 일들, 그런 순간들을 더 많이 만들고 싶어졌다.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면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을 더 많이 만들어야지 하는 다짐. 같은 맥락에서 두리번거리지 않고 집중해보는 시기를 보내보려고 한다. 그냥 자동결제되는 구독 서비스처럼 그냥 한동안 commit해보기로.
또 다른 건 대인관계에 대한 거였는데, 코로나 이후로 처음으로 여러 날 낮밤 없이 벗어날 곳 없고 인터넷 없는 곳에서 단체생활을 하면서 너무너무 괴로웠던 순간을 지내고 나서 다짐한 것. 좀더 사람들에 많이 노출되어보기로 했다. 새로운 사람들 만나는 걸 절대 싫어하지 않는데, 너무 오랜만에 그런 환경에 놓이자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것. 그런 환경이 주는 이득을 잘 알기에 이 스트레스에 지지 않을 거고, 지금 필요한 건 그저 다시 적응해 가는 일 뿐. 지금의 내 상황은 노력하지 않으면 그런 환경에 노출되기 어렵기 때문에 일부러 자리를 만들어야겠다는 데까지 생각해봤다.
이 여름이 끝나고 여행도 끝나고 돌아와 거의 일주일 넘게 긴 잠을 잤다. 어제도 출근해서 워크샵을 하고는 탈탈 털려 돌아와서는 8시부터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10시에 잠들었는데 이젠 잠의 빚을 다 갚았는지 새벽 4시에 기억도 나지 않는 꿈에서 벗어나 잠에서 깼다. 드디어 여유가 생겼고 다시 꾸준히 격주정리도 쓰고 사진 없는 여행기도 써봐야지. 내가 다시 여기 돌아와서 기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