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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taraxia Sep 17. 2019

공감의 역치(閾値)

'사회적 감수성'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부족합니다.”

 인파가 많은 광화문 한복판에서 문제의 포스터를 본 건 몇 해 전 여름이었다. 포스터 왼편의 외떡잎 새싹은 누렇고 시들시들한 반면, 오른편 쌍떡잎 새싹의 싱그러운 초록빛에는 건강한 생명력이 한껏 느껴졌다.


 싸한 기분이 몰려왔다. 이어지는 문구는 내 불길한 예감에 쐐기를 박았다. “외동아에게는 형제가 없기 때문에 사회성이나 인간적 발달이 느리고 가정에서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이루어 보았으므로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습니다.”  한 정부 산하기관의 저출산 극복 포스터 공모전 수상작이었다. 전국 외동아와 그 가정이 느낄 불쾌감이 엄습했다.


2016년 한국생산성본부(KCP)가 주관한 ‘저출산 극복, 제3회 GTQ 포스터 공모전’ 금상 수상작

 역시나 온라인 맘카페 등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에서 외동으로 성장한 모든 사람들에게 모멸감을 준다.”라며 강력한 문제제기가 일어났다. 해당 기관이 게시를 철회하고 사과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포스터가 간과한 것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더 낳고 싶어도 경제상황이나 양육여건, 건강문제 등으로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가정이 많다는 것. 둘째,  많은 가정에서 사회 편견에 맞서 외동아를 사회성과 공동체 의식을 갖춘 민주시민으로 키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저출산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그저 개인 선택의 문제로 축소시켜 사안의 본질을 흐리고 있었다. 


 당시 나는 외동아 엄마이기 앞서 정부에서 오랜 기간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도대체 누가 어떤 생각으로 이 포스터를 수상작으로 선정해 버젓이 게시까지 하게 됐는지 강한 의구심을 들 수밖에 없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포스터를 그린 사람이나, 주최 측 심사위원들이나, 후원한 여러 정부기관 관계자들 모두 ‘저출산 극복’이라는 대의에 매몰돼 ‘사회적 감수성’을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회적 감수성’(Social Sensitivity) 이란 말은 아직 국어사전에서 명확히 정의돼 있지는 않다. 감수성(sensitivity)은 흔히 민감한 정도, 예민한 정도를 나타낸다. 


 ‘사회적 감수성’을 정의하자면,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고, 타인의 고통 기쁨 등 다양한 감정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또 존중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나는 한때 미디어 업계에 종사하고, 오랫동안 대중을 상대로 말과 글을 쓰는 일을 업(業)으로 하면서 일찍이 이 같은 사회적 감수성에 주목했다.


 누구보다 공동체 구성원 전체를 생각해야 하는 정부나 공공부문에서 앞선 예와 같이 어처구니없는 시각의 편협함을 드러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방송은 어떠한가. 시청률이라는 지상 최대의 과제 앞에 자극적 언어, 억지스러운 상황 연출이 계속된다. 여기에 소수자.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해나 배려, 인권과 평등이라는 가치는 그 빛을 잃는다.


 정부가 국민 동의와 지지 속에 국정을 펼치고자 한다면, 또는 기업이 제품을 홍보하고 소비자들에게 좋은 기업 이미지를 심어주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그 바탕이 돼야 하는 것은 도달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살피는 ‘사회적 감수성'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진정성과 효과성 측면에서 사회적 감수성이 지닌 무게에 천착할 무렵, 다른 차원에서 시야와 생각을 넓히게 되는 계기가 찾아왔다.


 2017년 9월 일명 '부산 여중생 집단폭행사건'이 터졌다.  부산의 여중생 4명이 또 다른 여중생 한 명을 쇠파이프와 사다리, 유리병 등으로 무참히 폭행하고, 그 폭행 현장의 영상을 자랑하듯 지인에게 전송한 것이 세상에 알려진 일이다.


 가해 청소년들이 저지른 폭행의 잔혹성이 알려지면서, 형사미성년자(만 14세 미만)에게는 보호처분이 내려질 수 있도록 한 '소년법’ 폐지 움직임으로까지 이어졌다. 또한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크고 작은 청소년 폭력사건들이 함께 수면 위로 떠올라 '청소년 폭력'의 심각성에 경종이 울렸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가해 청소년의 SNS 캡처

내게 이 사건은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폭행이유는 피해자가 가해자 중 한 명의 남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이고, 1차 폭행 이후 이를 신고했다며 보복폭행이 이뤄진 것이었다. 


현장에서 나눴다는  대화는 "피 냄새가 좋다, 더 때리자." "어차피 살인미수인데 더 때리면 안 되냐." "남자를 부를 테니 성관계를 하면 풀어주겠다."였다고 한다.  진정 이것이 여중생들이 주고받았다는 말인가. 


피를 흘리며 실신한 피해자를 보며 가해 청소년자들은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을까? 이 아이들에게 죄의식이나 죄책감은 애당초 결여된 것일까? 과연 이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내가 붙잡고 있던 '사회적 감수성'이란 화두가 이 지점에서도 무척 유의미한 관련성을 맺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은 사회적 동물로서 특성 때문이다. 


 톰 행크스(Tom Hanks) 주연의 미국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에서 무인도에 홀로 생존하게 된 주인공이 4년 동안이나 버틸 수 있게 도와준 결정적 존재는 배구공으로 만든 친구 '윌슨'이었다. "윌슨? 어디 있어? 내가 구하러 갈게. 기다려! 손이 안 닿아… 미안해 윌슨. 미안해!” 윌슨을 바다에서 결국 잃어버린 주인공의 울부짖음은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절규보다 처절했다.

영화 < Cast Away>의 한 장면

 말을 나누고 감정을 공유할 존재가 있기에 당장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버터내야 하는 극한 상황에서도 주인공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삶의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윌슨이 파도에 휩쓸려 멀어져 갈 때 느끼는 안타까움은 우리가 사람 사이에서 갖는 동지의식과 유대감, 그리고 연민의 연장선이었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감정이라고 믿는다.

 

출처 https://blog.nationalgeographic.org/2013/05/13/surprise-male-spiders-eat-females-too/

 거미에게는 동족도 한순간 먹잇감이 된다. 이들에겐 생존이란 본능만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무감각한 것을 넘어 쾌락이나 희열마저 느낀다면 그것은 과연 인간다움에서 얼마나 멀어진 것일까.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피해자의 모습을 동영상 촬영까지 하며 시시덕거리는 모습이 비단 가해 청소년들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감히 지금을 ‘불감증의 시대’라고 정의한다.




 우리 사회가 아()와 피아(彼我)를 명확히 구분해 아예 서로 눈과 귀를 닫고 사는 현실을 목도하며 '사회적 감수성'이란 화두를 세상 한가운데 던지고 싶다.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함께 행복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고통과 아픔에 더욱 민감해져야 함을 이야기하고 싶다.


 학창 시절 물리 시간에 배운 '역치(閾値)'란 것이 있다. 어떤 물체가 반응이나 현상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물리량의 최소치를 가리킨다. 사람의 마음에도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공감하게 하는 역치가 존재한다면, 건강한 사회란 그 역치가 그리 높지 않은 사회일 것이다.  


 인류 역사상 아픔이 없는 사회, 고통이 없는 시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살 만하다.'라고 느낄 수 있으려면,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사회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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