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파수로 전한 안녕에 답하다

<관제탑 창 너머> 8회 기고문

by 소진



관제 교신에는 여백이 없다. 감정은 배제하려고 애쓴다. 관제사와 조종사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화는 표정 없이 소리로만 남는다. 일반적으로는 정해진 관제 용어로 이야기하지만, 바쁘지 않을 때는 가벼운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제일 많이 쓰는 건 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뜻의 굿 데이(good day)로, 관제 교신에서 허용된 거의 유일한 감정 표현이다. 가끔은 상대방의 언어로 인사하는 때도 있다. 예컨대 태국 국적의 조종사에게는 태국어로 인사를 건네고, 독일 국적의 조종사에게는 독일어로 인사를 건넨다.


전과 다르게 최근에는 외국인 조종사에게 한국말로 된 인사를 많이 받는다. 존댓말을 잘 모르는 조종사가 주파수에서 내게 “안녕?”이라고 인사하면, 반말로 인사해도 되는 건지 잠깐 고민하다가 “안녕!”이라고 되받아친다. 관제 용어는 최대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지극히 효율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같은 상황에서도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일상 언어와는 달리, 가용한 단어의 수가 제한된다. 그런 세계에서 “안녕?”이라는 말은 미지근한 단어 사이 혼자서만 온도를 갖는다. 딱딱한 이야기가 오가는 관제 교신에서 갑자기 반말이 튀어나오는 게 얼마나 웃기는지, 크게 터져 나올 것 같던 웃음소리를 간신히 피식하는 웃음으로 작게 눌러 앉혔다. 안녕이나 감사처럼 쉬운 인사말은 기본이고, 가끔은 한국인끼리 “수고하세요.”하고 주고받는 말을 흉내 낸 듯한 정체 모를 인사말을 듣기도 한다. 이렇게 사소한 순간에서도 한국어의 인기가 세계적으로 높아졌다는 게 느껴진다.





얼마 전에는 연초의 새로운 목표를 다지기 위해 미뤄왔던 영어와 일본어 회화를 다시 공부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새로 내려받은 말하기 애플리케이션에서 한국어가 올해의 학습 인기 순위 6위를 달성했다는 소식이 보인다. 외국인들은 어떤 언어를 배우는지 궁금해, 그들이 연습하는 언어 목록을 구경해 보면 한국어가 제법 눈에 띈다. 아시아의 언어라고 하면 당연히 중국어나 일본어가 대표였던 과거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이렇게 제2언어로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인은 많이 증가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나라는 아직 영어 우월주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관제에서 영어는 언어가 아니라 도구다. 필요한 말을 정해진 방식으로 전달하면 된다. 그런데 관제실을 벗어나면 영어의 성격은 조금 달라져, 소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지능의 척도로 쓰인다. 외국어를 잘하고 못하는 것을 사람의 능력이나 지능과 연결하고 있는 마음들이 문제다. 미디어는 영어를 잘 못하는 모습을 희화하는 것을 개그 요소로 쓰지만, 생각해 보면 모어가 한국어인 사람들이 영어를 못하는 건 바보 같은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회사에서도 외래어를 남발하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영어가 세계 공용어라는 실용적 이유를 넘어, 개인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사회적 증거로 작동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영어가 섞이지 않은 문장은 왠지 덜 그럴듯해 보일 때가 있다. 공항에서는 ‘도착 편’과 ‘출발 편’ 대신 아무렇지 않게 ‘인바운드(inbound)’와 ‘아웃바운드(outbound)’를 쓴다. 의미를 몰라서가 아니라, 영어로 말해야 더 전문적으로 들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명 관제 교신에서는 불필요한 단어 하나까지 줄이려 애쓰면서도 일상에서는 괜히 영어를 덧붙여 말을 늘리게 된다. 결국 문제는 한국어를 모어로 쓰는 우리가 한국어를 너무 쉽게 내려놓고 있다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나부터 관제 교신을 마무리하는 말인 ‘굿 데이’ 대신 한국어로 작별 인사를 해보면 좋을 것 같다. 굿 데이는 너무 오랫동안 써와서 이미 자동화된 것만 같아 진심을 담기가 어렵다. 대신 쓸 한국어 인사는 너무 길지 않으면서, 뜻이 정확히 전달되고, 반말도 아니어야 하니 꽤 까다롭다. ‘좋은 비행 되세요.’는 잘 못 알아 들을 것 같으니 제외하고, ‘감사합니다.’는 너무 뜬구름 잡는 것 같은데, 역시 ‘안녕히 가세요.’가 답일까? 내가 한국어로 된 인사를 전한다면, 외국인 조종사들도 따라 서툰 한국어 인사를 건네줄지 궁금하다.


아무튼 내일부터 당장 가벼운 한국어로 인사해 보자고 마음먹는다. 내 안의 ‘굿 데이’ 대신 새로운 한국어 인사를 성공적으로 외치기를 바라지만, 혹여라도 실수한다면... 에이, 다들 못 들은 척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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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파수로 전한 안녕에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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