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자, 산티아고 순례길에.

갑자기... 까미노?

by yule

2024년 10월, 나는 연차 15개를 쓰고 휴가를 다녀왔다. 그러나 회사 사람들에게 휴가 차 스페인을 가려고 한다고 했을 때와 내가 스페인에 가서 하려는 일을 설명했을 때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전자는 부럽다는 반응이 많았다면, 후자는 반응 속에 의아함이 섞여있었다. 이번 스페인 여행은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만을 위한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가 30일 넘게 걸어야 하는 까미노를 찾아간다면 아마 무언가를 깨닫고 오겠다거나 생각을 정리하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더군다나 나의 경우 처음 가는 도시인 마드리드를 이번 여행의 비행기 도착/출발지로 정했지만 마드리드를 관광할 여유가 없다며 마드리드에서 보내는 반나절 가량의 시간은 잠자고 공항에서 기차역으로 이동하는 데에 전부 써버렸다. 게다가 모든 일정을 까미노를 걷기 위해 보내겠다고 했지만 이번 여행은 정작 까미노의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지도 못할 것으로 계획한 여행이었다. 시작부터 불완전한 결말이 예상되는 여정, 게다가 걷는 것도, 무거운 것을 짊어지는 것도, 트레킹도 흥미가 없는 내가 까미노를 걷겠다는 계획하게 된 데에 딱히 거창한 이유가 있지도 않았다. 나의 경우 여행에 목적이라는 네임태그를 달겠다는 마음은 남미여행 이후로 버린 지 오래였고, 마음의 정리나 결심 따위를 위해 스페인 북부의 시골마을로 향한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전부터 마음속에서 한 번 해보고 싶었던 일을 현실화했을 뿐이다. 찾아보니 까미노 카페는 이미 2019년 봄에 가입했는데 이 때면 카카오로 이직할 때였으니 당시 관심을 더 구체화했었다면 2019년 4월에 폴란드, 헝가리, 크로아티아 같은 중부 유럽이 아니라 까미노를 걸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돌이켜서 생각해 보면 팀을 옮겼던 6월에는 까미노에 가겠다는 구체적인 생각은 딱히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머릿속에 숨어있던 까미노에 다시 눈을 떴다. 7월에는 먼저 걸어본 분들의 블로그를 열심히 읽어보고 루트를 그려보고 있었으며, 나는 어느샌가 까미노를 걷는 나를 상상하고 조금씩 이 생각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800킬로미터짜리 순례길을 휴가가 부족하여 전부 걷지 못하고 돌아오는 안타까운 그림을 만들면서 길게 휴가를 가는 데 필요한 적당한 이유를 찾고 나름대로 포장을 했다. 물론 까미노는 내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봤을 때 내가 정말 할 수 있는 여행인가에 대해 의문이 있어서 언제나 내 여행 1순위인 옐로나이프 오로라를 비롯하여 러시아, 코카서스, 이집트, 그리스, 몽골, 라오스 같이 10월에 가기 좋은 다른 여행지를 고려하기는 했었다.


사실 휴가도 처음에는 15 영업일까지 쓸 생각이 없었고 10 영업일 내외 정도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일정을 짜다 보니 시점인 생장 피에 드 포르부터 종점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점프하면서 가고 마드리드 여행도 좀 한다고 하면 3주는 가야 어느 정도 그림이 나오겠구나라고 생각했고, 10월 3일부터 10월 27일까지 25일간 가는 걸로 잠정적인 일정을 잡았다. 사실 10월 1일이 임시공휴일이 될 거라는 건 지정 몇 달 전부터 알았지만 첫 영업일은 출근해서 월말 보고서를 써야 하므로 3일 출발이 나름 최선이었다.


이때 쇼핑 리스트를 보니 순례길 바람막이를 열심히 검색하다가 수많은 검색 끝에 괜찮은 소재의 주황색 바람막이를 염가로 샀던 게 7월 말이니, 아마 7월 중순부터는 어느 정도 계획이 섰던 것 같고, 8월 초에 침낭과 미니 보조 배터리, 휴대용 면도기까지 샀으니 이때쯤 되면 어느 정도 감을 잡은 상태였던 것 같다. 실제로 8월 초에 침낭을 산 뒤 이것저것 짐을 구매하고 난 뒤 사무실 옆에 체력단련실이 있으니 조금씩 운동을 해보자며 샀던 옷과 운동화를 주섬주섬 꺼내서 점심시간에 조금씩이라도 걸어보려고 했지만 (그래서 다른 사람은 옆에서 시속 10킬로미터로 뛰고 있을 때 난 시속 6킬로미터로 6% 경사에 맞추어서 걷고 있었다.)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중순에 코로나19에 걸리면서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도 필드 테스트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아무런 연습 없이 출발 한 달 전인 9월 초 회사 연수 차 갔던 제주도에서 올레길과 해안도로를 25킬로미터(함덕-세화) + 10킬로미터(함덕-삼양) 걸으면서 필드 테스트를 했다. 첫날의 경우 오전에는 하늘이 쨍쨍했는데 오후에는 비도 쏟아지는 등 다양한 날씨 환경에서 걸으면서 나름 최적의 조건 속에서 테스트를 진행했다. 그리고 메고 있는 스트링백이 실제 짊어질 짐에 비해 매우 가볍긴 했어도 괜찮은 속도로 목표 구간을 완주했다. 코스 처음에 서우봉을 넘는 지라 아침 7시부터 시작했더라도 너무 더워서 5킬로미터 남짓 걸었을 무렵 편의점이 꼭 필요한 날씨였고, 행원포구를 지날 즈음부터 어둑해진 하늘에서는 걷기가 매우 편했으나 세화포구에 도착하기 1시간 전에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우산을 쓰고 걷기도 힘들 수준이었(기에 카페에서 거의 1시간을 쉬었다가 갔)다. 그렇게 첫날 25킬로미터 남짓을 가서 비가 쏟아지는 세화에 도착하는데 8시간이 걸렸는데, 월정에서 1시간 놀고 비수기애호가에서 1시간 놀았던 걸 생각하면 속도는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침 식사 하고 아침 7시에 출발해서 월정에서 점심 먹고 카페도 가고 중간에도 카페 가는 이 일정과 까미노에서 새벽같이 일어나서 아침 먹고 걷다가 바르가 보이면 잠깐 쉬면서 걷는 일정과 매우 유사했다. 단, 걸을 때 오른쪽 새끼발가락이 계속 압박되어 꽤나 아팠다. (실제로 이 발가락은 같은 신발을 신고 까미노를 걸은 이후 발톱이 하얗게 되어 아직도 그 상태이다.) 그렇게 둘째 날 땡볕에서 2시간 반 정도 걸어서 10킬로미터를 완주하고 이 정도면 일단 까미노 출발은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난 까미노를 위한 준비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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