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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비 Aug 28. 2024

1화. 사랑은 상상력의 승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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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행복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야. 나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당연하지. 내가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

우리는 벤치에서 일어나 공원을 걸었다.

그녀가 내 손을 살며시 잡으며 앞으로 같이 행복하자고 말했다. 네가 웃을 때 내가 항상 곁에 있을 것이라 속삭이면서 우리는 서서히 움직인다. 어둠이 찾아온 서울숲은 모두가 각자의 시간의 상자 속에 갇힌 것 같다. 벤치에서 속삭이고 있는 연인들, 여유롭게 강아지와 산책을 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주어진 시간 속에서 최선을 다해 행복한다. 나는 그 시간을 음미했다.

”너는 내가 왜 좋아?“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나는 사람을 만날 때, 그게 친구이든 연인이든 그 사람을 좋아하는 특정한 기준이 있는것 같지는 않아. 그냥 함께 있으면 시간이 금방 가고, 대화를 할 때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해.“

”내가 그랬어?”

“응, 우리 홍대에서 봤던거 기억 나?”

“LP바에 갔던 날?“

”맞아. 그때 너를 만나서 우리 이야기 많이 했었잖아. 서로에 대해 잘 모르던 상황에서 각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사랑을 하고 싶은지 얘기했었어. 누구랑도 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지만 너랑은 좀 다른 느낌이었어. 어느새 시간을 보니 벌써 4시간이 지나있더라고. 그런 적은 처음이었어.“

”나도 그날 너무 재밌었어. 솔직히 그날 너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괜히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는 지금 이 순간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매번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중요한 무언가가 부족했었고, 내 마음은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Y를 보내고 집에 가는 지하철 속에서 나는 얼떨떨 하면서도 설레는 감정에 휩싸였다. 항상 나를 위해 살아오던 나의 인생에 처음으로 나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가 탄생했다. 세상 모든 것이 흑백이고 한 사람만 강렬한 색을 뿜고 있다는 너무나 추상적이고 웃긴 말이 내 앞에 펼쳐졌다. 나의 행복을 위해 살아왔던 인생 속에 새로운 가치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 ]
 오늘 J가 고백을 했다. 참 좋은 사람이다. 활발한 성격이지만 감성적이고 따뜻한 면이 있고, 바쁘게 살면서 뭐든지 잘 해낸다. 배울 점이 많은 남자이고,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좋은 친구다. 차가움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겉모습 사이로 낭만적인 면모가 흘러나오는 사람이다.

”너는 어떤 사람이 좋아?“

와인 한 병을 비우고 어두운 공원을 걸으면서 J는 우리가 몇 번이고 주고받았던 질문을 다시 물었다.

”나는 든든하고 배울 점 많은 사람이 좋아. 너는 연애 할 생각 있어?“

”나는 연애가 하고 싶어서 하는 연애는 하지 않을거야.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과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사랑을 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때 연애를 하고 싶어.“

”나는 사실 연애 생각이 별로 없었어. 그런데 요즘 연애에 대한 생각을 가끔 해. 친구들이랑은 또 다른 느낌의 소중한 사람이 내 곁에 항상 있다면 많이 도움되고 더 행복할 것 같기도 해. 누구보다 나에 대해 잘 아는 그런 사람.“

이 대화를 끝으로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그 침묵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닌 너무 많은 말들이 입 밖으로 나가기를 주저하고 있어서 지속되는 침묵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멀리서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은은한 배경으로 우리의 침묵을 더욱 고조시켰다.

”나 너 많이 좋아해. 마지막 사랑이 찾아온다면 그 길을 걸을 때 내 옆에 너가 있었으면 좋겠어.“

그의 목소리는 우리 둘만 알아볼 수 있는 떨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긴장되는 마음을 숨기려고 애쓰는 표정, 어설프게 흔들리는 눈빛 속에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참 귀여웠고 나는 J의 얼굴에 다가가며 수줍은 입맞춤으로 고백에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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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이 붉은 눈물을 머금기 시작한 10월의 어느날, 우리는 연남동에서 만났다. 

Y의 생일 선물로 내 마음에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책 한권과 보라색 장미 한송이, 그리고 마음을 눌러서 적어내린 편지를 그녀에게 주었다.

”생일 축하해. 다음 생일도, 그 다음 생일도 나랑 같이 보내자“

”고마워. 책 잘 읽을게. 장미도 너무 예쁘다.”

“보라색 장미의 꽃말이 영원한 사랑이래. 사랑해.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어두운 술집에서 우리는 나란히 앉아 서로에게만 들릴 것 같은 소리로 사랑을 고백했다. 그녀가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이 사람이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여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만나러 가기 하루 전부터 나는 설레었고, 꽃을 고르는 순간에는 긴장감과 설레는 마음이 나를 덮쳤다. 그리고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얼굴을 보고 난 후에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연남동의 골목들을 걸었다.

“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부드러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책에서 읽었는데, 사랑은 이성에 대한 상상력의 승리라고 하더라. 우리는 이성에 의해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사랑을 할 때 만은 이성보다 상상력이 더 강해지잖아. 해야할 일들 앞에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순간을 상상하고, 행복한 순간 속에서 늘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고 상상하지.” 맑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며 답했다.

“아름다운 말이네. 나는 사랑은 내가 손에 쥔 것들을 흔쾌히 포기할 수 있게 하는 감정이라 생각해. 우리는 원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일단 내가 들고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해. 그런데 포기라는 것은 늘 쉽지 않으니까 그 순간에서 늘 주저해. ”

“그렇지만 사랑은 오묘한 힘으로 그것들을 내려놓게 하지.”

환한 달빛이 비추고 있는 길을 따라 걸으며 우리는 서로가 더 가까워 지고 있음을 느꼈다. Y와 있으면 나는 시계를 보지 않는다. 시간이 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은 야속하게 평소와는 다른 속도로 달린다. 흐르는 시간을 고이 접어 어딘가에 가둬놓고 싶은 마음이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벌써 Y의 집 앞에 도착했다.     

“다왔네. 이제 들어가야지.”

“잠깐 저기 벤치에 앉아있다가 갈래.”

그렇게 우리는 지하철 역 앞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았다. 공원에는 큰 개가 뛰어놀고 있었다.

“강아지가 참 귀엽다. 넌 강아지 좋아해?”

“음.. 사실 나는 강아지 별로 안좋아해. 어릴 때 강아지한테 물린 기억이 있어서 아직도 좀 무서워해.”

“네 덩치 보면 강아지가 너를 무서워해야 할 것 같은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들을 이어가며 헤어지는 순간을 뒤로 미루고 있었다. 서로 이러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누구하나 대화를 끝내려 하지 않았다.      

”오늘 날씨 너무 좋다.“ 

”내 생일이라 그런거야. 고맙지?“

”고마워. 나는 이렇게 선선한 날 밤이 참 좋아.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간 후 거리는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쉬는 것 같아. 너무 많은 존재들이 밟고 지나가서 지친 거리가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잔잔한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아. 이런 들릴 듯 말듯 한 묘한 리듬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니까 더 낭만적이고 좋다.“ 

아침에 집을 나선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주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이 먹고싶다는 그녀의 말에 달콤한 딸기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그녀의 집 앞으로 걸어갔다. 

”J야, 너는 비오는 날 좋아해? 나는 비오는 날의 규칙적이면서 적당히 시끄러운 그 빗소리가 참 좋아. 누군가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 비내리는 길을 바라보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아.“

”나도 비 오는 날 좋아해. 특히 여행갔을 때 비가 오면 더 매력있는 것 같아. 낮에는 뜨거운 태양과 들뜬 사람들이 가득해서 도시가 가면을 쓰고 나를 맞이하는 것 같다면 비가 내리면 적적한 분위기 속에서 진짜 표정을 드러내는 느낌이야. 사람도 그런 것처럼 우리는 모두 솔직한 내면을 보여주기 참 어렵잖아. 그런데 비가 오면 도시가 감춰놨던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고, 괜히 나도 센치해져서 내 속마음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돼.“

”비오는 날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 처음봤어. 근데 너 말 들어보니까 색다른 매력이 있을 것 같아.“

”비 오는날 같이 여행가자. 다 내려놓고 떠나는거야.”

“너무 좋아... 이제 들어가볼게. 데려다줘서 고마워. 너도 조심해서 가.”

“오늘 너무 행복했어. 생일 축하해. 다음주에 보자. 사랑해“     

Y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면 놀랄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음을 느낀다. 매일같이 아마 이런게 사랑인가 생각하게 된다. 앞으로 어떤 날들이 펼쳐질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행복함을 잊지 않으려 애쓴다. Y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집에 도착해 오늘 있었던 일들을 곱씹으며 잠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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