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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비 Sep 01. 2024

2화. 서서히 스며드는 노래

[ ]

그가 준 아름다운 장미꽃을 바라보며 침대에 눕는다. 특히 오늘 밤은 그 은은한 보라색이 참 잘 어울린다. 남자친구에게 꽃 선물을 처음 받아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어떤 꽃보다 강한 감정이 담겨있는 꽃이다.      

“사랑이라는 연극은 이제 막을 올렸어. 배우들에게 어떤 돌발상황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 연극은 막을 절대 내리지 않을거야. 우리 매일 같이 행복하자. 앞으로 남은 나의 행복은 다 너의 것이야. ”     

 집에 돌아와 좋아하는 재즈를 들으면서 꽃과 함께 손에 쥐여준 편지의 내용을 곱씹어본다. J는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다. 본인이 언제 기쁜지 알고,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잘 안다. 취향을 알아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지만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J는 바쁜 삶 속에서도 하고싶은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취향을 만들어나간다. 그리고 이제 그의 취향 속에 내가 있다. 그를 보고 있으면 나는 행복하는 법을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 지금의 순간을 그 누구보다 만끽하는 J와 다르게 나는 모든 순간 내가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을 고민한다. 오늘 밤에 해야할 과제, 취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공부들, 꿈을 이루기 위해 이겨내야 할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래서 그가 부럽다. J와 함께라면 나도 매일 행복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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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와 함께 있으면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다. Y는 내 말을 잘 들어주고 대화 속에서 나를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지금 나는 첫사랑을 하고 있다. 20년쯤 뒤 이제 사춘기를 겪을 아들이 사랑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 이날의 기억을 이야기해 줄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갓 막을 올린 연극의 각본이다. 배우들은 오늘의 감정으로 극장을 채워나간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어.” 바쁜 하루를 마치고 그녀의 집 앞에서 우리는 만났다.

“너도. 이렇게 너랑 지금에 집중하면서 걸을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해.”

“보고싶었어.” 사랑의 단어들을 주고받으며 사람이 거의 없는 강변을 따라 걸었다.

“나 독일로 교환학생 가기로 했어. 오늘 아침에 연락 왔더라.” 한참을 주변 공기에 집중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축하해. 엄청 가고 싶어 했잖아. 언제 비행기 탈 생각이야?”

“음.. 아직 좀 더 계획을 세워봐야 하는데 아마 2월 초에 갈 것 같아. 개강하기 전에 유럽 여행 좀 하려고.”

“그래. 여행 많이 다녀. 어릴 때 다녀야지 또 언제 가겠어. 내가 독일 갔을 때 맛있었던 가게들 다 알려줄게.”     

웃으면서 진심으로 그녀를 축복했다. 교환학생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은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았기에. 그렇지만 지금처럼 자주 볼 수 없을 날들이 곧 다가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어찌보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옳은 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겪는 장거리 연애의 비극을 나도 경험하게 될까봐 조금은 두려웠다. Y도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한참을 걸었고, 밤이 깊어갈수록 쌀쌀해지는 날씨에 자주 가던 바에 들어갔다.     

“오랜만이시네요. 잘 지내셨어요?” 익숙한 사장님이 살갑게 인사를 건낸다.

“당연하죠! 요즘 일이 좀 바빠서 자주 못왔네요. 이제 벌써 곧 졸업이에요.” Y가 여느때와 같이 발랄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블랙 러시안, Y는 깔루아 밀크를 주문하고 벽에 놓인 수천개의 CD 사이에서 각자가 듣고 싶은 곡을 골랐다. 신청곡을 적어 CD와 함께 사장님께 건내고 자리에 돌아와 창밖의 느긋하게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곧 주문한 술이 나와 가볍게 잔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두 모금쯤 마신 순간 내가 신청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 노래 좋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아. 천천히 일어나서 내 가슴 속을 관통하는 느낌이랄까?”

“이거 내가 신청한거야. 예전에 자주 들었던 노래인데 오늘 갑자기 생각나서 신청했어.”

“너가 신청한거구나. 그럼 가사를 잘 들어봐야겠네. 너한테는 가사가 제일 중요하잖아” 그녀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안녕 마지막 인사가 되겠네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이제 다신 볼 수 없기에 자그만 행복을 남겨두고 가요

스스로를 갉아먹는 나의 밤이 날 다 먹어 치울 때쯤

난 당신의 기억 속에서 조용히 완전히 영원히 사라지길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는 그런 순간들 있잖아. 그럴 때 이 노래 들으면서 지하철 창밖으로 흘러가는 서울의 밤을 보면서 많이 위로받았어. 너 말대로 슬픈 느낌이 가득한 곡이지만 그 아픔을 승화시키고 마지막으로 행복을 두고 간다는 말이 참 좋아.”

“그렇게 들으니까 정말 슬프지만 막연한 슬픔은 아닌 느낌이야.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이 참 이상하다. 고마운 마음보다 미련이 가득 남아있는 것 같아.” 우리는 노래 한곡으로 슬픔이라는 감정의 세계를 여행했다. 이후로도 이 노래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내가 Y를 짝사랑하던 시절 듣던 노래라는 것은 말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 여자가 내 앞에 앉아있지만, 그때 이 여자는 내 머릿속에만 있었다. 괜히 옛날 생각이 나면서 기분이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쨍그랑     

구석 테이블에 앉은 커플이 마시던 와인 잔을 떨어뜨렸다.

“깜짝이야. 저기 있는 사람들 지금 싸우는건가?” Y가 힐끔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그건 아닌거 같은데. 그냥 실수로 깨트린거 같아”

“바닥에 조각들이 엄청 퍼졌다. 유리는 멋진 생을 사는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알 수 없는 말에 나는 되물었다.

“엄청 뜨거운 것을 이겨내면 그 어떤 것이든 될 수 있어. 그렇게 고통을 견디고 난 후에는 투명하고 반짝이는 아름다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

“그리고?”

“독한 술을 담기도 하고 그냥 그 자체로 미적인 역할을 하기도 해. 그리고 그 끝은 저렇게 큰 소리와 함께 조각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마치 마지막으로 세상에 하고싶은 말을 하고 그 이야기가 저 멀리까지 날아갔으면 하는 마음처럼”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되게 대단해 보인다. 한잔 더 마실래?”

“그럴까? 아직 내가 신청한 노래도 안나와서 좀 더 있다가 가야겠다.”

“나는 갓파더. 너는?”

“그럼 나는 갓마더 먹을게. 조금 도수 약하게 해달라고 말해줘.”

10분쯤 생각을 비우고 노래를 듣다보니 금새 주문한 술이 나왔다.

“근데 J야, 이 술은 왜 이름이 갓파더야?” 내 잔에 담긴 독한 술을 조금 맛보고 그녀가 물었다.

“칵테일 이름의 유래는 사실 불확실한게 많대. 꽤 오래 전에 시작된 것들도 많고 너무 다양한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시니까. 내가 알기로 갓파더는 미국의 말론 브란도라는 배우가 제일 좋아했던 술이래. 이 배우가 영화 ‘The Godfather‘를 각색한 미국 인기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는데 그게 이름의 시작이라는 말이 가장 많아”

“재밌다. 다음에는 내가 이런 이야기 알아와서 알려줄게. 어? 내 노래다! 이거 뭐게?”

“A Waltz For a Night"

”역시 듣자마자 바로 아네. 너랑 영화 본 후로 자꾸 맴돌아서 하루에도 10번은 넘게 듣는 것 같아.“

”나도 처음 듣고 한달 동안은 혼자 있을 때 매번 들었어. 잔잔하게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너무 좋고 영화 속에서 노래를 불러주는 그 장면이 자꾸 떠올라서 낭만적이야.“ 원래도 비슷했던 우리의 음악 취향은 점점 더 서로에게 가까워진다. 어느순간 내가 소개해준 노래가 Y의 알람이 되어있고, Y가 처음 들려준 노래는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갈때면 늘 듣는 노래가 되었다.

”나는 음악을 들으면 내가 옛날에 이 음악을 들었던 순간들이 떠올라.“ 내가 말했다.

”예를 들어서?“

”이 노래는 파리 여행가서 에펠탑을 지나가는 크루즈를 타고 야경을 즐길 때 들은 노래, 그리고 이 노래는 너한테 고백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들은 노래.“

”노래로 행복했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이런 노래들을 들으면 단순하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영화 속의 짧은 클립처럼 그때 내가 앉아있던 자리, 주변 사람들의 모습, 그날의 내 기분까지 생생해. 마치 옛날로 돌아가서 다시 그 장면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아.“

”그럼 이 노래 기억나?“ Y가 휴대폰을 보여주며 말했다.

”당연하지. 그때잖아. 홍대 LP바.“

”오 기억하네? 그 이후로도 많이 들었어?“

”완전. 단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밴드의 노래였는데 그날 집에 가는 길에서부터 정말 많이 들었어. 아직도 이 노래를 들으면 처음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알아가던 그 순간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아.“ 그녀가 나에게 소개해준 노래는 이제 내 취향의 노래가 되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노래를 수없이 많이 재생하면서 나의 한 부분은 Y로 물들었다.          

문을 닫기 직전까지 재밌게 얘기하며 시간을 즐기다 Y를 집에 바래다주고 지하철역에 내려 집으로 걸어간다. 조금 어지러운 정신과 적당히 선선한 날씨, 그리고 방금까지 함께했던 낭만적인 시간을 힘껏 즐겨본다. 깊은 새벽이지만 차들은 빠르게 달려간다. 사람들은 하루의 고된 기억들을 짊어지고 힘겹게 발걸음을 내딛는다. 주변을 보면 간간히 아직 영업을 하고 있는 가게들이 보인다. 내가 매일 보는 풍경이지만 오늘은 조금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재밌는 이야기들로 애써 누르고 있었던 감정들이 천천히 걸어 나온다. 5개월이 지나면 내 사랑스러운 여자친구는 저 멀리 유럽으로 떠난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 사랑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우리의 관계는 정신적인 교감이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함께 나누는 이야기들을 통해 더 깊어지기에 큰 걱정은 없다. 우리의 마음이 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일 지도 모른다. 하늘을 올려보니 꽉 찬 보름달이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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