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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비 Sep 04. 2024

3화. 나는 잊기 싫은 밤이야


[ ]

강릉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바다로 향했다. 그와 떠나는 첫 여행이다. 고운 모래 위에 작은 돗자리를 깔고 앉아 수영하는 사람들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하늘은 누가 물감을 뿌린 것 같이 아름다운 푸른색 이었다.

”많이 안덥지? 괜찮아?“ J가 따스하게 물었다,

”응 괜찮아. 바람이 불어서 날씨도 딱 좋다. 이따 밤에는 조금 추울지도 몰라.“

”내가 담요 가져왔어. 까먹지 말고 들고 나가자.“

”좋아. 배는 안고파? 아까 국수 솔직히 좀 별로였어.“

”그렇긴 하더라. 맛집이라고 해서 갔는데 너무 짜고 양도 적었어. 좀 이따가 회 먹으러 가자“

주변에 앉아있는 수많은 커플들처럼 우리는 어깨를 맞대고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 순간만은 그 어떤 고민들도 우리 사이에 들어올 수 없었다.

”사진 찍어줄게. 저기 나가서 서봐.“ 그가 챙겨온 카메라를 꺼내며 말하자 나는 웃으면 바다 앞으로 다가갔다.

”여기 봐! 잘나왔어. 예쁘다.“

”이렇게도 찍어줘.“

”조금만 이쪽으로 돌려봐. 좋아 딱 지금이야.“

”괜찮아?

“완전. 너무 예뻐. 오늘 특히 더 아름다운데?”

나는 웃으며 다시 그의 곁으로 달려가 안겼다. 이렇게 바닷가에 앉아 둘만의 소중한 시간을 즐겼다.     

밤이 찾아오고 우리는 다시 바닷가로 나섰다. 맥주와 과자를 몇 개 들고 어둠이 가득 찾아왔지만 아직 깨어있는 모래사장에 가 자리에 앉았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밤을 즐기고 있었다. 가게들은 하나둘씩 불을 끄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앉았다.     

“저기 노래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저런거 보면 참 낭만있더라.”

“나도 가서 하나 불러줄까?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이런거?”

“안돼. 나한테만 불러줘. 다른 사람들이 듣는거 싫어.” 내 말을 듣자 그의 입가에 서서히 웃음이 피어났다.

“저기 사람들 헌팅하나봐. 바닷가에 오는데 너무 꾸미고 온거 아니야? 아까부터 계속 뱅뱅 돌고있어.”

“바다에서 헌팅하는 사람들 많다는 소리는 들어봤는데 실제로 보는건 처음이야. 너도 헌팅 해본 적 있어?”

“에이 무슨소리야. 난 부끄러워서 저런거 못해.”

그가 당황한 듯 헛기침을 하면서 대답했다.

“반응 보니까 해봤는데? 아냐 안물어볼래. 듣고싶지 않아.”

“진짜야. 난 저런거 해본 적 없어. 내 성격 알잖아.”

“아 그러면 성격만 아니었으면 하고 다녔겠다?”

“사랑해.”

“늦었어.” 내 말에 그는 웃으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안추워? 괜찮아?”

“적당히 시원하니 딱 좋아. 이제 맥주 마실까?”

우리는 점점 더 어두워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주변에는 불꽃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낭만있다. 너무 행복한 여행이야.” 그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우리 진실게임 할래? 그냥 하고 싶은 말들을 다 하는거야. 이 바다 앞에서.” J가 나를 바라보고 말했따.

“그러면 어떤 질문이든 다 진실로 답해야돼. 정말.“

”당연하지. 너부터 해.“

”요즘 너를 가장 설레게 하는 것은 뭐야?“

”너 때문에 늘 설레지만 이건 별로 재밌는 대답이 아니겠지? 최근에 시를 쓰기 시작했어. 혼자 길을 걸을 때, 방에서 생각에 잠길 때 생각나는 것들을 메모장에 막 적어두고 갑자기 생각나면 멈춰서 시를 적어. 특히 너를 만나러 갈 때, 너를 데려다주고 돌아올 때 많이 생각나더라.“

”대단한데? 나도 보여줘.”

“더 멋진 글을 적게 되면 그때 꼭 보여줄게. 그럼 이제 내 차례야.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야?”

한참을 바다를 바라봤다. 그리고 맥주를 크게 한모금 들이키고 말했다.

“우리 아빠. 혼자 나를 키워주셨어. 힘드셨을 거야. 이제는 내가 빨리 어른이 되어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지키고 싶어.”     

J가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눈동자가 여느때와 다름없이 달콤하지만 이 순간에는 그 속에 위로가 들어있다. 나는 괜찮다는 듯이 멋쩍게 웃으며 눈을 맞춘다.

“너는 어떤 사랑이 하고싶어?”

“흠..사랑한다는 말이 필요없는 사랑이 하고싶어.”

“그게 무슨 말이야?“

”서로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만 보고 우리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사랑이 가장 강력한 사랑이라 생각해. 우리는 숨을 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숨을 쉬지 않아. 눈을 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눈을 깜빡이지도 않아. 그런것처럼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조차 없이,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 전부터 우리는 그냥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그런 사랑이 하고싶어.“

”그럼 어떤 연애가 하고 싶어?“

”이제 내 차례야.” 그가 웃으며 나를 바라모며 말한다. 주변에서는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고 있고, 폭죽을 날리고 있지만 우리는 소리의 방에 갇힌 것처럼 서로의 목소리에 완전히 집중할 수 있다.     

“너에게 질투란?“

”필요없는 감정. 자 그럼 이제 내차례야.“

”이러는게 어딨어. 더 설명을 해줘야지.”

“그대로야. 질투는 남을 못믿는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거야. 내가 매력적이라면 내 남자가 다른 여자와 이야기를 나눠도 아무렇지 않잖아. 그렇다고 바람이 난다면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사소한 부분까지 질투를 하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어.”

“이제 너가 물어봐.“

”내가 갑자기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어떨 것 같아?“

”그게 무슨말이야?”

“그냥 질문이야. 궁금해.” J는 말없이 술을 마신다. 대답하기 주저하는 것인지 그저 생각이 많아진 것인지 쉽게 알 수 없는 표정이다. 나도 쉽게 한 질문이 아니니 그 고민의 시간이 싫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에게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르는 미래에 대한 생각이니.

“사랑은 형태가 없다고 하더라. 또 정체가 무엇인지도 몰라. 감정의 한 종류일까? 아니면 환각과 같은 것일까?”

내가 말없이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니 말을 이어간다.

“너의 마음은 너만 알겠지만 그 속에 나를 향한 사랑이 있다고 믿고 싶어. 그런데 갑자기 너에게 있던 나를 향한 사랑이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면 나는 매우 슬프겠지. 정확한 실체를 모르더라도 아직 나에게는 사랑이 있을 것이니까.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꽤 오랬동안 남아있을 거야. 그리고 너를 붙잡겠지. 우리가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있으니까, 너도 다시 나를 사랑할 수 있을거야. 어떤 이유로 사랑이 도망갔더라도 또 다른 이유로 다시 돌아올 수 있으니까.”     

주변의 소리가 점점 더 작아지고 우리는 서로에 집중한다. 항상 나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고 확신을 주는 남자지만 가끔은 그 속을 모를 것 같은 날이 있다. 지금 J의 모습이 그렇다.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기분이 안좋아진걸까? 아직 내 손을 꼭 쥐고 있기에 그것은 아닌 것 같지만 무언가 많은 생각들이 그를 지나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이제 좀 걸을까?” 왠지 어색한 침묵을 깨고 내가 일어나며 그의 손을 당겼다.

어느새 새벽 2시다. 평소라면 이미 자고 있어야 할 시간이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날이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여전히 어둡지만 훨씬 조용하다. 길거리에는 술을 사러 편의점에 들어가는 커플, 전화를 하며 담배를 피고 있는 남자 한명 뿐이다. 바닷가를 지나고 드문드문 차들이 지나가는 도로 곁을 걷는다. 맞잡고 있는 손에는 땀이 조금씩 맺히지만 놓고싶은 마음은 둘다 없어보인다.

“너랑 오니까 너무 좋다. 앞으로 여행도 많이 다니자.” 그가 다시 부드러운 눈빛으로 돌아와 말을 건낸다.

“그래. 나 유럽에 가면 꼭 놀러와. 너가 나 여행 가이드 해줘야지.”

“오지 말라고 해도 갈거야. 무작정 독일에 찾아가서 보이는 모든 사람들한테 한국에서 온 예쁜 여자 봤냐고 물을거야. 그러니까 기대해.” 그의 말에 웃음이 새어나온다.

“교환학생.. 재밌을 것 같아. 지금껏 상상만 했던 세상이 펼쳐지겠지? 진짜 어른이 되기 전 마지막으로 어린아이처럼 살 수 있는 시간일거야.”

“나도 가보고 싶었는데 못간거 아직도 후회해. 너무 많은 생각은 버리고 가서 재밌게 그 순간들을 잘 즐기고 와.”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말을 웃으면서 하고 있지만 왠지 슬픔의 감정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그는 내가 떠나는 것을 걱정하고 있을까? 몸이 멀어지고 난 후 우리의 관계가 달라질까 두려운 것을까?

“피곤하지? 빨리 씻고 자자.” 숙소에 들어가면서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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