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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비 Sep 11. 2024

5화. 너만의 향기

[ ]

“사람 진짜 많다. 나 월드컵 경기장은 처음이야!” 모두가 같은 색의 옷을 입고 같은 곳을 바라본다. 귀가 터질 듯이 북 소리가 들려오고 선수들이 입장하자 함성소리는 더욱 커져간다. 

“꼭 이겼으면 좋겠다.” 그가 설레는 목소리로 말한다. 주변의 소음에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없어 우리는 서로의 몸을 조금 더 가까이한다.

“호주도 잘하는 팀 아니야?”

“잘하지. 지난번에는 우리가 졌어. 근데 오늘은 내가 왔으니까 한국이 꼭 이길거야.”

“미리 먹을거 사서 오길 잘했다. 중간에 이 사람들을 뚫고 나가는건... 상상도 하기 싫다.”

“배 안고파? 시작하기 전에 좀 먹자. 사람들 일어나기 시작하면 더 불편할거야.”

“그래 그럼 먹자. 사실 아까부터 조금 배고팠어.” 말이 끝나자마자 J가 가져온 치킨을 꺼낸다.     

경기가 시작하고 한국팀이 공격을 할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리를 지른다. 6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소리를 내뱉는다. 아쉽게 슛이 빗나가자 하나같이 아쉬워한다. 다들 어디에서 왔는지 조차 모르지만 그 순간만은 오래된 친구처럼 함께 시간을 즐긴다.

“이렇게 목소리 크게 내는거 처음보는데?” J가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래? 나 원래 목소리 엄청 커. 깜짝 놀랄걸?”

“귀엽다.” 그의 말에 얼굴이 옷 색깔처럼 붉게 물들어간다.

“이제 10분밖에 안남았는데.. 빨리 골 넣어야할텐데.”

“후반전이 더 재밌을거야. 양팀 다 공격 기회가 많이 안나와서 아쉽다. 바람이 제법 쌀쌀하다.” 그가 겉옷을 벗어 나에게 걸쳐준다.

“고마워. 넌 괜찮아?”

“응, 난 따뜻하게 입고왔어. 걱정마.”      

뒤로도 경기장에 수많은 파도가 일렁였지만 득점은 나오지 않고 전반전이 종료됐다. 하나둘씩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렇게 보니까 사람 진짜 많다. 뭔가 열기가 느껴져서 좋아. 앞으로 종종 와야겠어. 독일 가서도 축구 보러 가야겠다.”

“해외가서 보면 더 재밌지. 난 영국에서 처음 직관했는데 진짜 재밌었어. 너무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이방인이지만 그 순간만은 그들 속에 완전히 녹아든 느낌?”

“재밌겠다. 너가 놀러오면 같이 갈래.” 말을 들은 J가 나를 보며 웃는다. 하늘위에 있는 구름처럼 순수하고 맑은 웃음이다.      


다시 경기장이 꽉 차고 곧 있어 후반전이 시작한다. 후반전에도 쉽사리 득점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지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응원을 이어간다. 수만명의 사람들이 한 목소리를 낸다. 아쉬운 득점 기회가 몇차례 무산되고 결국 경기는 무승부로 끝난다. 결과는 아쉽지만 시간은 절대 아쉬움을 남기지 않았다. 많은 인파에 섞여 우리도 밖으로 나간다. 서로를 잃지 않게 손을 꼭 잡은 채로.     

“그래도 재밌었어.”

“마지막에 좀 아쉽긴 했는데 그래도 좋았어. 너랑 와서 그래.” 그가 신난 발걸음으로 길을 걸으며 말한다.

“내일 학교 가? 주말인데 좀 쉬려나?”

“가야지. 다음주에 발표 있어서 같이 준비하기로 했어. 그래도 맥주 한잔 정도는 괜찮은데 어때?”

“좋아. 근처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을 것 같은데 너네집 쪽으로 가자. 오늘은 내가 데려다줄게.”

“난 너무 좋지. 독일 갈 준비는 잘 되가? 이제 벌써 다음달이네.”

“도착하면 개강까지 1달정도 시간 있어서 오스트리아로 먼저 가려고. 너가 찍은 사진 보니까 나도 너무 가고싶어.”

“오스트리아 진짜 좋아. 음식은 뭐 그냥 나쁘지 않은 정도인데 거리의 분위기랑 밤의 재즈바가 너무 낭만적이야.”

“지난번에 우리가 간 재즈바보다 좋아?”

“한국은 재즈가 배경이 되는 느낌이라면 거기는 재즈가 주인공이야. 친구랑 온 사람, 연인이랑 온 사람, 혼자 온 사람 모두가 공연에 완전히 몰입해. 사람들과 함께 하지만 그 속에서 나만의 시간을 찾는 느낌?”

“이야기만 들어도 설렌다. 아 빨리 가고싶다.”     


 < >

술집에 도착해 맥주를 한잔 마신다. 몸은 조금 피곤하지만 최근들어 가장 행복한 밤이다. 가을 밤 귀뚜라미들이 우는 것처럼 사람들이 각자 앞에 앉은 상대와 이야기하는 소리가 노래처럼 들려온다.

“이제 슬슬 시험기간이겠다. 시험 준비는 잘 하고 있어?” 그녀가 묻는다.

“학교 수업 외적으로 신경쓸 것들이 너무 많아서 잘 모르겠어. 인턴 지원서 넣고 학회 활동 하느라 시험공부는 아직 시작도 못했네..”

“근데 오빠는 잘할거야. 늘 그랬잖아.” 

“오빠라고 오랜만에 부르네. 우리 옛날에 썸탈때는 너가 맨날 오빠라고 불렀는데. 기억 나?”

“이게 더 좋아? 앞으로도 오빠라고 불러줘?” Y가 웃으면서 놀리듯이 말한다.

“지금이 좋아. 더 친해보이잖아.”

“남자들은 오빠라고 하면 다들 좋아한다는데. 진짠가보네.”

“난 잘 모르겠지만 주변 친구들은 그런거 같더라.”

“뻥. 너도 오빠란 말 좋아하잖아. 막 나 없다고 오빠라고 부르는 후배들한테 너무 잘해주면 안돼. 나 다 지켜보고 있을거야.”

“당연하지. 너도 나 없다고 잘생긴 유럽 오빠들이랑 너무 재밌게 놀면 찾아갈거야.”

“최선을 다해서 놀아야겠다. 빨리 나 보러 오라고.”

“됐어. 안가.”

“뭐야 오빠도 질투가 있었네? 나 처음보는 것 같아.”

“난 질투 안해. 내가 다 이겨.”

“자신감이었어? 사람일은 몰라. 긴장해.” 그녀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와 얼굴이 새삼 사랑스럽다. 

“밤새 놀고 싶은데 벌써 12시가 넘었어. 이제 가야할 것 같아.” 

“내일 학교가려면 일찍 들어가야지.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술집을 나와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거리를 걷는다. 참 오랜만에 웃는다. 걱정없이 행복한 감정들만 느끼며 집으로 향한다.      

“어서 들어가.”

“오늘 너무 재밌었어.”

“나도. 내일도 열심히 해.”

“너도 푹 쉬고. 피곤하겠다.”

“나 모레 본가 내려가서 다음주 주말에 다시 와.”

“조심히 다녀와.”

“들어가는거 보고 갈게.”

“내일 전화할게. 모레도.”

“기다리고 있을게.” 따뜻한 포옹과 키스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에 들어간다. 겉옷을 정리하고 창문으로 그녀가 타는 검정색 버스를 바라본다. 달려가는 버스는 붉은색 잔상을 남기지만 내 눈에는 Y의 웃는 얼굴이 남는다.      


[ ]

“준호야, 다음주에 남자친구 생일인데 선물 뭐 줄까?“

”이런건 누나가 직접 고민해야지. 왜 나한테 물어봐.“

”남자는 남자가 잘 알잖아.“

”형은 누나가 제일 잘 알걸? 그리고 형이라면 뭘 줘도 누나가 주면 엄청 좋아할거 같아.“

”그래도. 뭐 없어?“

”흠... 이제 인턴한다니까 넥타이 같은거? 있으려나.“

”좋은데? 몇 개 있을수는 있지만 내가 더 예쁜거 사주면 되잖아. 고맙다 동생아.“

오랜만에 찾아간 집에서 가족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낸다. 엄마랑 영화도 보고 아빠랑 산책도 한다. 잠시동안 잊고 살아가던 따스한 품에 안겨본다.      


J의 생일선물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왔다. 들어가자 마자 밝은 조명과 향수냄새가 맞이한다. J가 쓰는 향수 냄새가 나서 홀린 듯 발걸음을 옮긴다. 

”이 향수 맡아볼 수 있을까요?“

”남자친구 선물하시게요?“ 직원이 시향지에 향수를 뭍혀서 건낸다. 그의 향기가 코를 찌른다.

”이것보다 이쪽 제품들이 더 많이 나가긴 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시원한 향기를 더 많이 찾으세요.“

”그냥 이걸로 주세요. 향이 좋네요.“

”선물포장 해드릴까요?“ 

”네. 부탁드릴게요.“ J말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맡아보지 못했던 향이라 그런지 냄새를 맡자마자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향수를 사고 그와 잘어울릴 것 같은 넥타이도 같이 산 다음 다시 집으로 향한다.  

   

< >

”오빠 오늘 끝나고 뭐해요? 발표도 끝났는데 같이 술 마셔요.“ 

”다같이 뒤풀이 한번 할까?“

”다른 사람들은 다 약속있대요... 오빠가 저 놀아줘요.“ 지연이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성화를 못이기고 학교 앞 술집에 들어갔다. 

”와인 사준다니까 왜 여기 와요? 오빠 소주 좋아해요?“

”나 술 잘 못마시는거 알잖아. 그냥 가볍게 한잔만 하고 가자.“ Y가 아닌 다른 사람과 내가 좋아하는 와인바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바쁜지 몇시간째 답장이 없어 몸은 이곳에 있지만 신경은 온통 그곳에 가 있다.

”오빠 여자친구랑 잘 지내요?“

”그럼. 잘 지내지. 너는 남자친구 안만들어?“

”멋진 남자가 주변에 없어요. 착하고 키크고 잘생긴 그런 오빠 어디 없나.“

”태현이는 어때?“

”그 오빠는 뭔가 내스타일이 아니야. 오빠처럼 좀 낭만적인 그런 모습이 없달까.“

”괜찮은 사람인데 왜. 다정하잖아.“

”다정하기만 한 사람보다 같이 있으면 재밌는 사람이 더 좋잖아요. 그리고 그 오빠는 내가 끌리는 사람이 아니야. 처음 봤을때부터 눈에 확 들어오는 그런 사람을 만나야 재밌을 것 같아.“

”첫눈에 반한 사람...“

”오빠는 그 언니한테 첫눈에 반했어요? 되게 예쁘던데.“

”처음에는 얼굴이 예뻐서 반했지. 근데 대화를 해보니까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거야. 그래서 내가 이 여자를 좋아하는 구나 생각했지.“

”완전 빠졌네. 지금은 뭐하고 있는데요? 나랑 이렇게 술 마시고 있어도 돼?“ 지연이의 말을 듣자 다시 머릿속이 Y의 생각으로 가득찬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답장이 와 있다.      

잠깐 잠들었네. 뭐해?     

”근데 오빠 향수 뭐써요? 되게 좋다.“ 답장을 하려던 순간 지연이가 말을 건다.

”옛날에 선물받은 건데 딱 내 취향이라 쭉 이것만 써.“

”다른 사람들한테서 못 맡아본 냄새야.“

”그런 점도 좋았지.“     


2시간 정도 술을 마시고 이미 취해버린 지연이가 더 마시자는 것을 어렵게 뿌리치고 집으로 가는 택시에 올랐다. 뒤늦게 Y의 메시지가 생각나 답장을 보낸다.     

미안, 학회 끝나고 친구랑 술 마시고 있었어. 너는 뭐해?  

새벽 1시가 넘는 시간이지만 답장이 바로 온다.     

그냥 집에서 쉬고 있었어. 집 들어가는 중이야?

응 택시 탔어.

태현씨랑 마셨어?

아니 지연이라고 같은 팀이었던 동생 있어. 다같이 뒤풀이 하려고 했는데 다들 일정이 있다 그래서 내가 붙잡혔어

취한건 아니지?

난 반병도 안마셨어.

잘했네. 우리 일요일에 어디서 볼까?

슬슬 크리스마스 분위기던데 명동 갈래?

좋아. 오빠 생일이니까 내가 다 준비할게. 몸만 와.

설렌다.

지금 말고 만나서 설레. 

그때는 더 설렐게.

조심히 들어가. 난 이제 자야겠다. 

잘자. 집 도착해서 연락 남길게.

응. 너도 가서 빨리 자.

알았어. 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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