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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비 Sep 15. 2024

6화. 변치않을 사랑

[ ]

”생일축하해“

”고마워. 오늘 보니까 좋다. 보고싶었어.“ 우리는 서로를 잠시동안 말 없이 바라보았다. 어두운 바에는 잔잔한 재즈가 흘러나왔고 벽면에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나는 모스코 뮬. 너는 뭐 마실거야?“ 메뉴판을 내밀며 J가 말했다.

”추천해줘.“

”약한 것?“

”응.“

”그리고 달달한걸로?“

”응. 근데 끈적한 달달함 보다는 상쾌한 달달함이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옥보단 마셔봐. 달달하면서도 새콤하고 부드러워.“

”좋아. 그걸로 시키자.“     

”선물이야.“ 잘 포장된 하얀색 박스를 건내며 말했다.

”뭐야? 지금 열어봐도 돼?“

”응.“ 그가 설레는 눈빛으로 박스를 열어보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갈색 병에 담긴 향수와 연한 하늘색의 넥타이가 들어있었다.

”넥타이 예쁘다. 인턴 붙으면 이거만 메고 다닐게. 이 향수는 내가 쓰는거네?“

”응. 전부터 냄새가 좋아서 마음에 들었는데 백화점 가서 우연히 찾아서 샀어. 너 이것만 뿌리잖아.“

”고마워. 잘 쓸게. 근데 나도 줄 거 있어.“ 나에게 종이가방을 건내며 말했다.

”뭐야. 오늘은 너가 생일인데 왜 나도 선물을 받아?“ 놀라서 웃으면서 답했다.

”그럴수도 있지 뭐. 봐봐.“ 말이 끝나자 마자 가방 속에 든 것들을 꺼내보았다. 편지봉투와 작지만 적당히 두꺼운 보라색 노트가 들어있었다.

”이게 뭐야?“

”열어봐.“ 

”이거 다 오빠가 쓴거야?“ 노트를 열어보니 그가 적은 것 같은 시가 각 페이지마다 적혀있었다. 

”응. 다음에 여행가면 주려고 했는데 지난주에 완성해서 먼저 주려고 가져왔어. 요즘 너나 나나 바빠서 정신 없기도 하고.“

”감동이야. 읽어봐도 돼?“

”안돼. 집 가서 읽어봐. 부끄러워.“ 얼핏 봐도 제법 두꺼운 시집이다. 몇장 넘겨보지도 않았는데 글을 쓰던 날의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 영화 뭔지 알아?“ 조금 남은 잔을 다 비우고 그가 벽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잘 모르겠는데? 옛날 영화같아.“

”화양연화.“

”그게 제목이야?“

”응. 옛날 홍콩 영화야.“

”무슨 뜻이야?“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

”너무 예쁜데? 무슨 내용이야?“

”불륜.“

”그건 안예쁘다. 뭐 영상미는 좋은 것 같네.“

”아름다운 불륜이라 하면 좀 그렇지만 되게 재밌게 본 영화야. 배우들이 감정을 표현하는게 진짜 좋아. 생각은 많고 하고 싶은 말은 참 많은데 모든게 조심스러워 선뜩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는 그 순간의 감정들.“ 그는 영화 속에 깊이 들어간 것 같았다. 

”넌 이런 영화 참 좋아하는 것 같아. 로맨스인데 좀 어려운 그런 로맨스.“

”그런가?“

”응. 행복한 사랑 이야기보다 조심스럽고 서서히 스며드는 사랑 이야기. 그리고 결국 새드 엔딩으로 끝나버리는.“

”책도 그런 책들이 더 재밌어.“

”난 밝은 영화 좋아하는데. 행복하고 사랑이 가득한 그런 영화. 수많은 역경이 있지만 결국 이겨내서 행복하게 마무리 되는 그런 이야기.“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왜?“

”행복하기만 한 사랑이 어딨어. 결국 사람들이 하는 거잖아 사랑도. 굴곡도 있고 그러다 보면 위기도 있고 그러는거지. 어쩌다보면 둘다 상처받고 울어버릴 수도 있는 거고.“

”있을 수 있지. 지금 우리가 그렇지 않아?“

”행복하지. 그렇지만 언젠가는 다툴 수도 있잖아.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회피하고 싶지는 않아.“

”우리도 싸우는 날이 올까?“

”그럴거야.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다른 사람이니까. 행동 유전학에서는 사람들의 행동이나 성격 특질의 개인차를 유전자의 차이로 설명해. 물론 유전자가 그것들에 영향을 주는 유일한 요소는 아니겠지만 우리는 유전자에서부터 다르잖아.“ 그의 담담한 목소리가 조금은 차갑게 느껴진다.

      

 대화가 잠시 끊기고 음악 소리에 집중하면서 나는 언젠가 찾아올 우리의 다툼을 상상한다. 시작은 아주 작은 것이겠지. 아니면 사소한 오해일수도 있어. 어쩌면 정말 큰 잘못 일수도 있고. 누군가 상처를 받고 그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니 상대방은 그게 왜 자신의 잘못이냐고 따진다. 목소리는 조금씩 높아지고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그의 말처럼 우리의 관계에서도 위기가 찾아올 것이다. 그런 시기가 우리의 사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겠지만 가능하다면 그 순간을 피하고 싶다.     

”근데 나는 다투는게 나쁘다고 생각 안해. 그냥 갈등일 뿐이야. 우리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싸울 수도 있겠지만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야. 갈등은 오히려 서로 신경쓰이고 상처받은 부분들이 덧나기 전에 더 좋은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기회잖아.“ 그의 마지막 말이 계속 생각난다.     


< >

”오빠 오늘 면접 잘 봤어요?“

”뭐 나쁘지 않게 본 것 같아. 너는?“

”저는 원래 잘하잖아요.“ 지연이가 당당한 목소리로 답했다.     

다음주에 있을 마지막 발표를 준비하다보니 새벽 1시가 되어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아침부터 면접보고 학회 활동까지 해 몸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이제는 추운 새벽 공기를 맞으며 담배를 한 대 태우고 있으니 지연이가 내쪽으로 다가온다.     

”오빠 집 바로 갈거에요?“

”그럼 가야지. 나 피곤해.“

”소주 한잔 해요.“

”다음에.“

”오늘 힘든 일 있어서 그래요. 좀 도와줘요.“

”여자친구랑 잠깐 보기로 했어. 미안해.“ 속상해하는 표정으로 혼자라도 마신다며 성난 발걸음으로 지나쳐간다. 15일. Y가 출국할때까지 남은 날이다. 내일 아침 본가로 내려가서 출국 전날 다시 서울로 올라오기로 해 오늘 밤을 같이 보내기로 했다. 지하철역 앞에 서있는 Y의 모습이 보인다. 힘든 하루가 녹아내릴 것 같은 기분으로 그녀를 안는다. 집에 가기 전에 조금 걸으려고 하던 참에 옆에서 누군가 나를 부른다. 

”형. 어디가요? 같이 한잔 해야죠.“

둘러보니 옆 술집에서 태현이가 나를 부르고 있다.

”뭐야. 오빠 빨리 와!“ 곧이어 지연이의 날카로운 목소리도 들려온다.

”나 집 가야돼. 재밌게놀아.“ Y의 손을 더 강하게 잡고 자리를 피하며 말한다. 그러나 그 순간 술집에서 지연이가 뛰어나온다.

”언니. 안녕하세요.. 오빠랑 어디가요? 우리랑 딱 한잔만 하고 가면 안돼요??“ 목소리를 들어보니 이미 많이 취해보인다. 

”안녕하세요. 넌 어때?“ Y가 당황해하며 나를 보며 묻는다.

”아니. 저 오빠는 맨날 나랑 안놀아줘. 언니라도 나랑 술 마셔줘요.“

”그래요. 그럼 잠깐만 있다가 갈게요. 괜찮지?“ Y가 지연이를 부축하며 말한다. 결국 술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다.      

”짠“ 한잔만 하기로 했지만 빈 술병은 점점 쌓여가고 우리의 마음은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근데 언니는 오빠 어디가 좋아요?“ 지연이가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한 채로 묻는다.

”다정해요.“ Y는 웃으며 답한다.

”이 오빠가 좀 다정하긴 하지. 근데 다른 이유는요?“

”음. 낭만적이에요. 아는 것도 많아서 배울 점도 많구요.“

”헐. 완벽한 남자네. 언니는 부럽네요. 이런 남자가 언니 좋아해서.“ 말을 들은 Y는 멋쩍은 웃음으로 답한다.

”지연씨는 어떤 남자 좋아해요?“

”저는 제가 봤을 때 딱 꽂혀야돼요. 맨날 보고싶고 안기고 싶은 그런 느낌이 드는 남자 있잖아요.“

”그럼 지금은 그런 남자가 있어요?“

”있냐구요? 그럼요.. 제가 매일같이 들이대는데 나를 차갑게 대하는 그럼 남자 있어요. 근데 그래서 더 끌리는 거 알죠? 얼굴 볼때마다 뽀뽀하고 싶어서 죽겠어요.“ 이미 그녀의 눈은 완전히 풀려있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어지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많인 취해 잠에 든 지연이를 택시 태워 보내고 태현이도 비틀비틀 집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우리도 집으로 향했다.     

”많이 피곤하지? 갑자기 미안해.“

”아니야. 재밌었어. 너가 더 피곤하겠지. 빨리 집 가서 쉬자.“     

집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지연씨 되게 귀엽다. 인기 많을 것 같아."

"예쁘게 생겼지. 지연이 좋아한다는 학회원들도 몇명 있었어."

"그 사람들이랑은 잘 안된거야?"

"애가 워낙 자기 마음에 안든 사람들한테는 차갑게 굴어서. 다들 금방 나갔어."

"그런 스타일이구나."

"연애 안한지 꽤 된것 같던데. 잘생긴 남자들 많던데 왜 안하나 몰라."

”근데 지연이가 너 좋아하는거 같은데?“

”무슨 소리야?“

”아니 그냥 널 바라보는게 심상치 않아. 여자의 촉이라는게 있잖아.“

”에이 설마.“

”나 없다고 둘이 너무 친해지면 안돼. 조심해.“

”당연하지.“      

대답과 동시에. 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포갠다. 그녀가 내뱉은 숨을 내가 들이마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 한명인거 알잖아.“ 그녀의 귓가에 속삭인다.

”알지. 앞으로도 그럴거지?“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그녀가 답한다.

”응. 사랑해. 많이 보고싶을거야.“

”오늘 밤에 많이 봐야겠네.“

”잘 생각 하지 마.“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원룸의 좁은 화장실에서 같이 씻고 추운 날씨를 몸의 온기로 채웠다. 당장이라도 잠이 쏟아질 것 같이 피곤했지만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밤새 사랑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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