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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비 Sep 18. 2024

7화. 하얀 입김

[ ]

독일로 가기 직전 본가에 내려와있다. 짐을 다 챙기고 가족들과 오랫동안 못봤던 친구들을 만나고 또 혼자만의 시간도 가지면서 쉬고 있다. 먼 나라에서 혼자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걱정도 되지만 설레는 감정이 더 앞선다. 그곳에서 만날 새로운 경험들, 아름다운 풍경들을 생각하며 매일 밤 잠에 든다. 유럽의 화창한 날씨 아래 푸른 공원에서 혼자 누워있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가족들과 밥을 먹고 방에서 여행 일정을 다시 보고 있던 와중 J에게서 전화가 온다.     


여보세요

응. 뭐하고 있었어

그냥 걷는 중이야

안추워?

괜찮아. 너는 뭐해?

여행 일정 좀 보고 있었어. 이제 딱 3일 남았네.

그러게. 바빠?

아니 할건 다 해서 그냥 확인만 하고 있었어.

그럼 볼래?

너 지금 전주야?

응. 너네집 근처야. 밖에 봐볼래?     

창밖을 보니 검정색 패딩에 내가 사준 하늘색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뭐야? 언제왔어?

한 6시쯤?

조금만 기다려. 바로 나갈게.

응. 천천히 와.     


급하게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간다. 시간은 벌써 11시를 향해 가고 있다.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감싸 몸이 잔뜩 움츠려든다.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던 J가 나를 보고 걸어오기 시작한다.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많이 추워보이지만 그의 표정은 어린 아이같이 해맑다.     

”뭐야 갑자기?“

”보고싶어서. 별로 멀지도 않은데 뭐.“

”그냥 온거야?“

”응. 집에 있는데 답답하기도 하고 바람좀 쐬려고 왔어.“

”밤에 다시 가?“

”내일 점심에 가려고. 발표도 끝났고 면접도 다 끝나서 여유 좀 있어.“

”밥 먹었어?“

”간단하게 먹었어. 너는?“

”난 아까 먹었지. 뭐 먹을래?“

”일단 좀 걸을까?“ J가 웃으면서 내 손을 잡고 이끈다. 얼음처럼 차가운 촉감이 느껴진다. 그렇게 우리는 집 근처 골목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말을 할때마다 입김이 하늘로 천천히 날아간다. 

”기숙사는 바로 들어가?“

”아니 2월 초에 입실이라 2주정도 여행 다니다가 가려고.“

”짐은?“

”학교에 짐 맡기는 곳이 있더라. 일단 거기에 두고 근처 나라들 구경하다 올 생각이야.“

”오스트리아도 가겠네.“

”그럼. 프랑크푸르트만 갔다가 바로 빈으로 갈거야. 너가 말한 재즈바 가야지.“

”부럽다. 나도 가고싶어.“

”놀러와.“

”인턴 붙으면 여유가 없을 것 같아. 그래도 시간 나면 잠깐이라도 꼭 갈게.“

”응.“

”걱정은 안돼?“

”좀 두려운 점도 있긴 하지만 난 다 이겨낼거야. 요즘 인종차별도 많이 없어졌대.“

”겨울이라 독일이랑 동유럽쪽은 많이 추울거야. 따뜻하게 입고 가.“

”너 프라하도 가봤어?“

”아니 체코는 못가봤어. 거기도 진짜 예쁘다더라.“

”그러니까. 요즘 맨날 여행 영상 보는데 진짜 동화같아.“

”헝가리에 유명한 온천 있다던데 거기도 갈거야?“

”오스트리아 갔다가 체코랑 헝가리도 들리게.“

”좋겠네. 나 없다고 잘생긴 유럽 오빠 따라다니면 안돼.“ 그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당연하지.“ 골목길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마치 우리를 위해 모두가 양보한 것처럼.. 

”많이 보고싶을 거야.“

”나도.“ 우리의 볼은 점점 더 붉어져간다. 노란 가로등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가 나에게로 다가온다. 손을 잡고 있던 거리에서 그의 숨소리가 들리는 거리로. 그리고 입술이 닿을 것 같은 거리로. 그렇게 우리는 키스를 나눈다.      


< >

Y를 바래다 주고 호텔에 들어왔다. 추운 날씨 속에서 너무 오래 있어서 그런지 온몸이 얼어붙은 것 같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이 피곤하지만 왠지 바로 잠에 들고 싶지는 않은 밤이라 씻고 잠시 앉아있다 편의점으로 작은 위스키를 한병 사러 나간다. 도심 외곽에 위치한 호텔이라 로비에도 사람들이 별로 없다. 카운터에 직원 한명, 소파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남자 한명, 큰 캐리어를 끌고 들어오는 여자 한명.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 작은 버번 위스키 한병과 과자를 사서 나온다. 담배를 한 대 태우고 있으니 아까 들어가고 있던 그 여자도 편의점에 들어간다. 그녀는 맥주 한캔과 과자 한봉지를 들고 나온다. 

”불좀 빌려주시겠어요?“

”아, 네. 여기요.“

”혼자 오셨나봐요.“

”네. 잠깐 여자친구 보러 내려왔어요.“

”서울 사람이에요?“

”네.“

”근데 왜 여자친구랑 같이 안오고 혼자 여기서 자요?“

”여자친구는 집에 갔어요.“

”싸운거에요?“

”아뇨. 그냥 데려다 주고 왔어요.“

”저도 서울 사람이에요.“

”놀러 오신거에요?“

”그런 셈이죠.“

”좋은 시간 보내세요.“ 인사를 하고 먼저 들어가니 그녀가 따라 들어온다.

”같이 들어가요. 난 7층인데, 몇층이에요?“

”전 5층이요.“

”그렇구나. 혼자 술 마시게요?“

”네. 그냥 생각이 좀 많아서요.“

”같이 마실래요?“

”네?“

”저도 혼자 마실건데. 같이 마시자구요.“

”죄송해요 좀 피곤해서..“

”그래요 그럼. 잘자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인사를 건낸다.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방으로 들어간다. 빨간 립스틱에 묘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 여자다. 놀러왔냐는 질문에 그런 셈이라고 답한 것이 귓가에 맴돈다. 무슨 뜻일까? 갑작스러운 대화에 당황했지만 금방 다시 본래의 생각으로 돌아와 위스키를 한잔 마신다. 

특유의 바닐라 향이 입가에 스치고 달달한 느낌이 들때쯤 강한 알코올의 맛이 느껴진다. 아무 생각없이 세잔쯤 털어 넘기고 나니 조금씩 취기가 올라온다. 머리에는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몸의 열기가 점점 달아오른다. 당장이라도 잠에 들 것 같지만 내 생각은 한 곳에 여전히 머물러있다. 이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질 수 없다. 몸이 멀어진다는 것이 우리의 관계의 끝은 아니다. 고작 몇 개월일 뿐이다. 세상에는 이런 형태의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만 당장의 두려움은 무시하고 싶어도 쉽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 ]

한국보다 조금 더 추운 날씨다. 양손 가득한 가방을 옮겨가며 힘겹게 지하철에 오른다. 낯선 언어, 낯선 외모의 사람들, 그리고 낯선 공기까지 모든 것이 새로움으로 가득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입을 맞추는 커플들도 보인다. 거리로 나와 길을 걸으니 벅찬 설레임이 가슴 속을 매운다. 옛 동화에 나올 법한 눈이 덮인 도시는 참 아름답다. 학교로 향해 불필요한 짐들을 맡기고 숙소로 향한다. 내가 잠시동안 머물 곳은 하얀 벽지에 고풍스러운 나무 의자가 있는 방이다. 집의 주인인 Jonas와 Ella가 나를 반겨준다. 다른 방들에는 미국에서 온 여자와 프랑스에서 온 남자가 같이 살고 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짐을 푼 다음 다시 밖으로 나간다.     

점점 해가 저물어가면서 하늘이 아름다운 분홍색으로 물들어간다. 근처 식당에 들어간다. 큰 벽난로가 아름답게 타고 있고 추운 날씨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주문한 음식들이 하나씩 나오고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이며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목도리를 두르고 휴대폰을 보며 걸어다니는 여자, 한국에서는 쉽게 보지 못할 큰 강아지와 산책하는 할머니,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잡고 걸어다니는 커플들까지. 어느새 보라색으로 변해버린 하늘 아래 펼쳐진 아름답고도 평화로운 풍경을 눈에 담는다. 나도 그들처럼 어떤 고민에도 얽매이지 않고 지금의 순간들을 음미한다.    

 

< >

복잡한 여의도의 횡단보도를 건널때면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긴 코트를 입고 걸어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나도 이 사회의 진정한 구성원이 된 것만 같다. 아직은 모든 것이 어색한 출근 1주차는 쉴틈없이 흘러가는 회사의 일상에 서서히 녹아들고 있다. 그렇게 직관적인 현실 속에서 바쁘게 살아가다가도 잠시 숨을 돌릴때면 Y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느새 나는 수시로 독일의 날씨를 확인하고 유튜브에는 독일 여행에 대한 영상들이 가득하다. 지금 그녀는 뭐하고 있을까. 시차를 생각하면 막 일어나서 아침을 먹을 시간이겠지. 잠은 잘 잤을까. 음식은 입에 맞을까. 너무 춥지는 않은지.     

”지연씨 술 잘 마셔요?“

”저는 뭐 잘마시죠. 한 3병? 지훈씨는요?“

”저도 3병정도 마시는데. 다음에 한번 붙어봐야겠는데요?“ 지연이가 눈웃음으로 답하고 나를 쳐다본다.

”오빠도 빨리 술 따라. 오늘은 못도망가.“

”난 좀 천천히 마실게. 몸이 좀 안좋네.“

”거짓말.“

”두분 같은 학교라 그랬나요? 친한 사인가봐요.“

”같이 1년동안 학회했어요. 맨날 밤 새서 준비하느라 많이 친해졌네요.“

”그렇구나. 다같이 짠 한번 해요.“ 우리중 가장 외향적이고 나이가 많은 지훈씨가 자리를 주도한다. 동기라고 해봤자 4명이뿐이지만 그래도 같은 고민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라 실제 관계보다 더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한잔씩 마시다 보니 벌써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시간을 보니 12시를 넘어가고 있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던 순간 Y에게서 연락이 온다.     


나는 동네 구경하고 있어. 너가 준 카메라로 사진도 엄청 찍고 있어. 너무 예뻐 여기.     

점심시간에 보낸 연락에 조금 늦은 답장이 찾아왔다.     

그래? 사진 많이 찍어서 나도 보내줘. 날씨는 괜찮아?

춥긴 한데 그래도 괜찮은 것 같아. 너는 오늘 회사 안힘들었어?

아직은 힘들지 뭐. 천천히 적응하고 있어. 동기들도 좋은 사람들이라서 친해져보려고.

지연씨도 같은 회사 갔다고 했지?

응. 지금 동기들끼리 뒤풀이 하고 있어.

그래? 재밌게 놀아. 난 이제 성당 구경하러 가려고.

예쁜 사진 많이 찍어와.     


”오빠 왜 휴대폰만 보고 있어요?“

”그러게요. 너무하다.“ 지훈씨가 내 앞에 놓인 잔에 술을 가득 따라주며 말한다.

”저 좀 취한거 같아서 먼저 일어나볼게요. 이것만 마시고 갈게요.“

”아 어디가. 내일 주말이잖아. 오랜만에 끝까지 달려야지.“

”맞아요. 조금 더 같이 놀아요.“ 말이 많이 없던 수연씨까지 나를 붙잡는다.     

결국 집으로 가지 못하고 새벽 4시까지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택시에 올랐다. 아까 보낸 연락에는 아직 숫자가 사라지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켜서 독일 날씨를 찾아본다. 지금 독일에는 영하 3도에 눈이 내리고 있다. 눈이 쌓인 아름다운 도시의 전경과 그곳을 걷고 있을 그녀를 상상하며 서서히 잠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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