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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비 Sep 22. 2024

8화. 같은 계절, 다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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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날씨지만 어딘가 묘하게 다른 기분을 느낀다. 들리는 언어들도, 걸어다니는 사람들도 독일과 다를 것이 별로 없지만 나에게는 제법 상징적인 곳이다. 기차역 근처의 호텔에 짐을 풀고 점점 많아지는 가게들과 사람들을 지나 슈테판 대성당에 들어간다. 천주교를 믿지 않지만 순간적으로 공간에 압도된다.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는 노부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차분한 마음으로 정면의 화려한 동상을 바라본다. 정말 하늘에서 예수님이 내려온 것 같은 모습의 성당은 아름답고 우아하다.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고백한다. 마음 속의 생각은 높은 하늘 위의 구름을 타고 넘으며 아주 멀리 날아간다. 아름다운 곳에 오면 나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거리의 사람들은 티없는 웃음을 지으며 행복한 모습으로 나를 스쳐가지만 나는 왠지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는 것 같다. 입김을 내뱉으며 고풍스러운 건물 사이를 걸어갈때면 그저 앞으로 내가 견뎌내야 할 것들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성당에서 나오니 광장 한편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들려온다. 20명 남짓한 사람들이 첼로, 바이올린, 플롯이 만들어내는 하모니를 즐기고 있다. 다른 쪽에서는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들이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건물들을 구경하고 있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맑은 파란색 눈으로 세상을 담고 있는 아이, 큰 카메라를 들고 거리의 모습을 찍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이런 사람들을 볼때면 내가 이곳에서 이방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정처없이 돌아다니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벌써 하늘은 검정색 물감으로 칠해져있다. 곳곳에서 밝은 빛을 내뿜는 가로등이 강물 위에 유화를 그린 듯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걸었던 것처럼 강을 따라 노래를 들으며 걷는다.

It was for you just a one night thing

But you were much more to me

Just so you know

I hear rumors about you

About all the bad things you do

But when we were together alone

You did't seem like a player at al

J가 좋아하던 영화 속 장면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사진을 찍어 보내려고 휴대폰을 꺼내니 그에게서 연락이 와있다.

빈에 도착했어? 거기도 좀 춥지?

저 앞에서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연인들을 보니 그의 생각이 난다.


응. 도착해서 구경하고 지금을 강 따라서 산책하고 있어. 진짜 예쁘다.

우연히 시인을 만나는 영화 속 장면처럼? 바로 답장이 온다.

아름다워. 달빛과 강물에게서 위로를 받는 것 같아

나도 가고싶다. 밥은 먹었어?

아까 간단하게 샌드위치 먹었어.

이제 뭐할거야?

좀 걷다가 재즈바 가보려고. 너가 추천해준 곳.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걷다보니 어느새 하늘은 더 어두워졌다.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계단을 통해 도로로 나가 지도를 보며 재즈바를 찾아간다.

< >

”어? 안녕하세요. 여기서 보네요.“

”저 기억 안나요?“ 내가 당황하며 쳐다만 보고 있자 다시 말을 건다.

”아, 그때 호텔?“ 지난번 전주의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그 여자다.

”나는 한번에 알아봤는데, 서운하네요.“ 나는 그저 멎쩍게 웃었다.

”여기서 일하시나봐요?“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우리 회사를 가르키며 말한다.

”인턴이에요.“

”어린가보네?“

”어려보여요?“

”나보다는?“

”그쪽은 몇 살인데요?“

”32살이요. 그쪽은 한 27정도 되나?“ 새로운 담배를 입에 물며 나에게 묻는다.

”맞아요. 근처에서 일하세요?“

”일은 아니고 집이 근처에요.“

”집앞에 나온 것 치고 옷이 화려하네요.“ 그 사람은 딱 붙은 검정색 원피스에 트위드 자켓을 입고 있었다.

”늘 예뻐보이고 싶어서.“

”전화번호좀 알려줘요. 종종 볼 수도 있는데 다음에 밥이나 한끼 먹어요.“ 가볍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가려던 나를 붙잡으며 말했다.

”여자친구 있어요.“

”꼬시는거 아니니까 빨리 알려줘요.“ 그 사람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듯은 얼굴로 말을 이어간다.

”왜요?“

”안잡아먹으니까 걱정 말고.“ 너무 당당한 모습에 번호를 알려주고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독일은 오전 11시쯤 된 것 같아 휴대폰을 확인하지만 답장은 아직이다. 늦잠 자고 있겠거니 하며 사람들로 가득한 버스에서 창밖을 바라본다. 곳곳에 하얀 눈이 이불처럼 도로를 덮고 있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딘가에 홀린 듯이 힘없이 걸어간다. 조금 더 기다리니 어느새 드넓은 한강이 펼쳐진다.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 자동차들은 빨간 빛을 내뱉으며 도로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한강이 끝나니 높은 아파트들이 보이고 작은 공원을 지나 버스에서 내린다.


집에 도착하니 한기가 느껴진다. 넓은 유리창으로 한강도 내려다보이지만 창밖을 보며 위안을 얻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우니 휴대폰 알람이 울린다.

집이야?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와 있다.

누구세요?

아 내 번호는 안알려줬구나. 아까 본 예쁜 누나야.

안녕하세요.

저장해. 김우정.

네.

집이냐고.

집이에요. 왜요?

어디살아?

용산 살아요.

혼자?

.

밥 먹었어?

먹었는데요.

아쉽네

의미를 알 수 없는 연락을 끝으로 휴대폰 알람은 더 이상 울리지 않는다.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길래 평일 오후 6시에 집 근처에서 잔뜩 꾸미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 연락은 뭐지? 생각해보니 그때 전주에서 술을 먹자고 했던 것부터 모든 것이 이상하기만 한 사람이다. 이렇게 잠에 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위스키를 한잔 마신다. 두잔쯤 마셨나, Y에게서 사진이 한 장 왔다.

어제 간 재즈바야.

오랜만이다. 어땠어?

너무 재밌었어. 노래도 그렇고 분위기도 좋더라. 사장님도 친절하시고 술도 맛있었어.

혼자 갔었어?

응. 그런데 거기에 한국 사람이 있길래 친해졌어.

그분도 교환학생이래?

아니 대학원생이래. 아무튼 어제 너무 좋았어.

다행이다. 오늘은 뭐해?

어제 늦게까지 술을 마셔서 그런지 좀 피곤하네. 내일 아침에 다시 독일로 돌아가서 오늘은 좀 쉬려고.

재밌게 놀았나보네. 밥은 먹었어?

이제 먹으러 가려고. 어제 그 친구랑 같이 쌀국수 먹기로 했어.

맛있게 먹고와. 이따가 전화할래?

그래. 밥 먹고 연락할게. 잘 쉬어.

취기가 제법 올라온다. 몸에 힘이 점점 빠지고 눈은 감기지만 필사적으로 잠을 참는다. 괜히 일어나 설거지도 하고 집안 곳곳을 돌아다녀보지만 시간은 참 야속하게도 느리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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