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명령을 거역하고 단종을 묻은 남자

엄홍도…. 엄홍길

by 재리건아빠


역사는 때때로 놀라운 방식으로 이어진다.

서로 전혀 다른 시대에 살았지만 비슷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영월의 향리였던 엄흥도와 세계적인 산악인 엄홍길의 이야기는 그런 사례로 언급된다.


한 사람은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왕의 시신을 묻었고, 다른 한 사람은 죽은 동료를 묻기 위해 다시 히말라야에 올랐다.


500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비슷한 선택이 이어졌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이야기다.


세조의 명령, “단종을 묻지 말라”


1457년 조선 왕조는 격렬한 권력 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어린 임금 단종은 삼촌이었던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된다.


그리고 그해 단종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당시 정치 상황은 매우 민감했다.


세조는 단종을 지지하는 세력이 다시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 단종과 관련된 모든 움직임을 철저히 통제하려 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세조가 단종의 시신을 제대로 장례 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왕이었던 사람의 장례가 금지된 것이다.


이 때문에 단종이 죽은 뒤에도 아무도 시신을 거두지 못했다.

왕의 명령을 어기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영월 사람들은 두려움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밤중에 왕을 묻은 사람


그때 한 사람이 움직였다.


영월의 호장이었던 엄흥도였다.


그는 왕의 시신이 그대로 방치되는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심한다.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이었다.


엄흥도는 몰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렀다. 당시 왕의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단순한 법 위반이 아니라 정치적인 반역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왕의 마지막 길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렇게 묻힌 곳이 훗날 단종의 왕릉이 되는 장릉이다.


엄흥도는 이후 세조의 눈을 피해 숨어 지냈다고 전해진다.


뒤늦게 인정된 충절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는 다시 평가된다.


1698년 숙종 때 단종은 공식적으로 왕으로 복위된다.


이 과정에서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른 엄흥도의 행동도 다시 조명된다.


왕의 명령을 어긴 사람이 아니라, 왕의 마지막을 지킨 충신으로 기억되기 시작한 것이다.


권력의 명령보다 인간의 도리를 선택한 사람


그것이 엄흥도라는 이름이 역사에 남게 된 이유다.


500년 뒤 히말라야에서


시간은 다시 500년을 건너뛴다.


그리고 같은 가문에서 또 하나의 이름이 등장한다.


산악인 엄홍길이다.


엄홍길은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들을 등정하며 세계적인 산악인으로 알려졌다. 특히 에베레스트 산을 비롯한 여러 고봉을 오르며 인간의 한계에 도전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드는 사건은 따로 있다.


죽은 동료를 찾기 위해 다시 산에 오르다


1998년 에베레스트 등반 중 동료였던 박무택 대원이 조난을 당해 목숨을 잃는다.


히말라야 8000m 고도는 산소가 극도로 부족한 ‘죽음의 지대’다. 이곳에서는 구조 활동 자체가 생명을 건 도전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그곳에서 사망한 사람을 다시 찾으러 가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엄홍길은 다른 선택을 했다. 그는 다시 히말라야에 올랐다. 동료의 시신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발견한 뒤에는 동료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그는 단순히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동료를 인간답게 보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는 이후 영화 히말라야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닮은 선택


엄흥도와 엄홍길.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놀라울 만큼 닮은 선택을 했다.


왕의 시신을 그냥 둘 수 없었던 사람.

동료의 시신을 그냥 둘 수 없었던 사람.


한 사람은 왕의 명령을 거역했고

다른 한 사람은 죽음의 산으로 다시 올라갔다.


둘 모두 위험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이렇게 말한다.


“왕을 묻은 조상, 동료를 묻은 후손.”



역사가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


이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 일화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위험을 알면서도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선택할 수 있는가.


영월의 작은 고을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그렇게 히말라야 정상 근처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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