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린브로코비치가 찾은 가장 소중한 무엇
“도대체 이게 20년 경력자의 이력서야?”
“학부모회장 역임?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역임이라고 썼냐? 그냥 활동이라고 쓰면 되지. 이력서는 작성자 입장에서 쓰는 게 아니라 읽는 사람 입장, 즉 인사담당자 입장에서 쓰는 거야. 그러니 한 참 멀었다. 제대로 쓴 후에 다시 보여줘.”
옳은 말이지만 뼈아픈 지적이었다.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몇 번을 다시 고쳐 쓰고 남편에게 보여줬지만 번번이 퇴짜를 놓았다. 남편은 혹독한 인사담당자였다.
급기야 나는 울먹이며 남편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어쩜 그렇게 마음 아프게 말해요. 물론 내가 감이 떨어져 부족한 건 있지만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 취급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무조건 다 잘못된 건 아닐 텐데 칭찬할 건 하고 지적해도 되는 거 아닌가? 나도 알아요. 당신 기대수준에 많이 못 미친다는 것. 안 그래도 경단녀(경력단절여성의 줄임말)로 자존감 많이 낮아졌는데 자기까지 내 속을 긁어야겠어요? 사람이 옳은 말이라도 기분 나쁜 말일수록 상대방 기분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중략)
잊을만하면 남편은〔김테트로도톡신(복어 독), 말의 독이자 약! 치명적인 약점〕 내게 말한다.
“당신은 너무 긍정적이야. 물론 좋은 장점이기도 하지. 하지만 지나친 긍정은 발전이 없어. 자신의 부족함을 냉정하게 알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거든. 바로 내가 당신의 부족함을 일깨워 주는 그런 존재야. 그것이 당신 옆에 내가 있어야 하는 이유야.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 에세이, 『조미료엄마』일부 내용 발췌(147~148쪽) -
다음은 그 당시 울먹이며 작성한 경단녀의 오기 자기소개서 일부 내용이다.
성장 과정
지난 날 학부모 회장을 하면서 강한 성향의 회원들과 소통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회장으로서 책임감이 있기에 그들의 협력과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대화방법을 찾기 위해 적극적 행동 변화 의지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관계 변화의 시작은 먼저 자기 틀을 깨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장점이 때론 상대방에게 치명적 단점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애니어그램 심리 프로그램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입니다. 저의 귀중한 삶의 체험들이 직업상담사로서 임상 경험 자산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자기이해 프로그램을 통해 제 안에 잠재된 능력을 알게 된 것이 ‘직업상담사 2급 자격증’이라는 값진 수확의 열매를 맺게 된 동기였습니다.
지원동기 및 입사 후 포부
동료들은 디자인 경력을 그만두고 직업상담사로서 기존의 전문가들과 실력을 겨루는 것이 힘들 것이라고 걱정도 해줍니다. 하지만 직업상담이 전문분야가 아니라는 것은 오히려 그 분야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지 않고 새로운 각도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큰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
실제 실업문제의 원인은 일자리의 부재가 아닙니다. 취업을 원하는 구직자와 구인처간 미스매칭(mis-matching)으로 인해 생겨난 불만족 때문입니다. 이제는 쌍방향 취업 활동 시대입니다. 저는 과거 디자인 기획 관리 역량을 살려 구직자, 구인처가 공동체로 함께 브랜드 가치를 높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
누군가 스스로 만족스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면 제 인생도 풍요롭게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 회사의 발전과 함께 지속적으로 역량을 키워나가는 성실한 일원이 되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나는 재취업에 성공했다.
그 당시 경단녀인 내게 큰 영향을 끼친 영화 한 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영화, 《에린브로코비치》다. 나는 이 영화를 7번 넘게 보았다. 아주 보기 드문 경우다. 다시 봐야 2~3번 정도인데… 대체 이 영화에 어떤 마법이 있기에 그토록 끌렸을까?
영화, 《에린브로코비치》
주인공 에린(줄리아 로버츠)은 두 번의 이혼 경력과 고졸에다 특별한 경력도 변변한 자격증도 없는 어린 아이가 셋 딸린 엄마다. 여기저기 취업을 하려고 해도 오라는 곳은 없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싱글맘 그녀에게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한다. 교통사고! 사고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상대측 운전자, 잘나가는 의사다. 상대측 변호사의 자극에 거친 욕설을 퍼부어 결국 그녀는 패소한다. 그녀의 변호를 맡은 사람은 에드(앨버트 피니) 변호사다. 절망에 빠진 에린. 에드 변호사무실로 무턱대고 쳐들어가(?) 자존심을 내려놓고 가까스로 일을 얻어낸다. 잡무, 서류를 정리하는 단순한 일이다. 거친 말투와 몸매가 드러나는 섹시한 스타일 에린과 보수적인 법률사무소. 그렇다. 잘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다. 비록 속마음을 나누는 동료는 없지만 에린은 당당하게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 에린답게!
그러던 어느 날, 서류 정리를 하다가 의문의 의료기록부를 발견한다.
“왜 부동산 서류에 의료 진단서가 끼워 있는 거죠?”
주변 동료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 그런데 돌아오는 반응은 차갑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이나 잘 해요!” 그러나 그녀는 관심을 멈추지 않는다. 그 일에 대해 강한 호기심과 흥미를 보이며 진상을 조사하기로 결심한다. 부동산 관련 수상한 의료기록부를 따라 직접 부동산 거래 집을 방문하고, 오염 물질과 관련된 전문가를 찾아간다. 그러나 조사하면 할수록 의문점은 점점 커져만 간다.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지는 듯하다.
위기에 처한 순간, 그녀의 특기가 발휘된다. 숫자에 강한 점, 암기력, 그리고 친화력이다. 비록 사무실 안에서 여직원들과는 소통을 잘 못했지만, 바깥에선 전혀 다르다. 위험한 환경오염에 노출된 마을 주민들을 돕기 위해 그녀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워킹맘으로서 어쩔 수 없이 아이들과 함께 마을 이집저집을 다닌다. 이런 그녀의 진정한 태도에 마을 주민도 하나 둘씩 그녀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녀 편은 아니다. 주변 반대편의 모진 협박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는 그 일에 점점 깊게 빠져든다. 잦은 출장, 야근 등으로 그녀의 남자친구, 세 아이들과 서로 갈등을 겪는다. “제발 그 일 좀 그만 둬!” 그녀의 남자친구조차도 아이들 양육으로 지쳐간다. 가족, 그녀의 편은 어디에도 없다. “엄마, 그 일을 왜 하세요?” 힘들게 일하는 엄마를 보며 아들이 묻는다. “이제까지 누군가로부터 이렇게 존경받아본 적 없었어. 그들에겐 내 도움이 필요해.” 그녀는 대답한다.
왜 나는 에린이라는 인물에 공감이 갔을까? 그녀의 진로장벽, 아이 셋 딸린 엄마, 경력단절여성으로 직업을 찾는 노력 과정이 남 얘기가 아니었기 때문일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절실함이었다. 마침내 그녀의 고된 일상이 최고의 성공으로 이어졌을 때 나도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래, 나도 다시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어!"
원하는 일 찾기,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일과 자존감!’
평소 거친 말과 행동을 일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배우 ‘줄리아 로버츠’ 연기를 보는 순간 내 안의 자연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재빠르게 달리는 치타, 길들여지지 않는 얼룩말 같은 오기의 여자. 남의 지적일랑 무시하는 그녀가 줄리아 로버츠이자, 에린이고, 바로 나였다. 내 안에 웅크린 어린아이 모습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고개 들어! 치타, 달려! 야생 얼룩말 은아야~"
어쩌다 재취업, 다시 시작한 일이 헤드헌터였다.
“후보자가 사전미팅 등 신경 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해 와서… 이사님의 열의에 존경을 표합니다.”
예전 동료가 보내준 문자 내용이다. 볼 때마다 기분이 좋기에 아직도 휴대폰에 저장해 놓고 있다. 그 일을 하면서 기업 담당자나 후보자들, 동료로부터 소명감 있는 헤드헌터라며 존경받고 인정받는 점이 가장 뿌듯했다. 아마도 에린브로코비치가 일 속에서 느낀 보람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비록 채용서비스 업무 적응이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주변 동료들은 나의 성실한 업무 태도를 높이 평가해 주었다.
나는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엔 여전히 에린브로코비치가 살아 숨 쉬고 있다.
디제잉 오드리가 추천하는 노래는 바비 킴의 노래, 〈고래의 꿈♫〉
하얀 구름을 파도 삼아 꿈을 향해 가는 모습이 떠오르는 노래예요. 마치 계속 헤매고 있는 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네요. ‘너 자신이 되어라!’ 누군가 내 맘을 몰라 줘도 괜찮아요. 단, 내 자신을 믿는 것. 지금 내게 소중한 것, 콩닥콩닥 가슴 뛰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마음에 드는 파도를 타보는 건 어때요? 웨이브~ 웨이브~ 오늘 재미의 파도를 타보는 게 어때요? 우리의 모든 날들을 위하여~
파도를 타고 하늘로 날아갈 수도 있어요. 고래와 함께라면~
“I am fall in love again 너를 찾아서
나의 지친 몸짓은 파도 위를 가르네
I am fall in love again 너 하나만
나를 편히 쉬게 할 꿈인 걸 넌 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