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29 08:55 | 권지현 기자
압구정동에서 목욕탕을 검색해 간 곳이 은성탕이다. 압구정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모든 게 달랐다. 시간이 멈춘 듯 크고 작은 소도구들이 얼마나 오랜 시간 이곳을 지키고 있었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서비스 개선 차원에서 여름 동안 리모델링 공사를 해 한결 깨끗해졌지만 정감은 그대로다. 이곳의 단골손님들은 ‘꽃다운 나이’ 자랑하는 50에서 70대 사이 ‘언니’들. 새벽 5시 ‘땡!’하면 출근해 물에 몸을 담그고 친구들과 이런저런 수다를 떤다.
목욕탕 멤버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문봉숙(74)씨는 H백화점 VIP고객인 재스민 회원이다. 여전히 건강하고 돈 잘 버는 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자이기도 하다. 매일 아침 단골손님 중 1등으로 목욕탕에 도착해 하루를 시작하는 부지런한 언니다. 오랜 친구인 김양순(71)씨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목욕탕으로 출근(?)하는 문씨의 정신력이 대단하다고 말한다. 또한 살뜰하게 친구들도 챙기는 문씨. 취재 당일도 아침 목욕을 끝내고 H백화점 VIP라운지에서 시간을 즐기러 갔다가 점심시간 쯤 친구들과 함께 먹을 밥을 준비해 다시 목욕탕으로 돌아왔다.
목욕탕에서 왜 선글라스 같은 안경을 벗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최근 안검하수 수술을 받았다는 문봉숙씨. 눈 위에 살들이 쳐져 불편했는데 수술 뒤 한결 편해졌다고 한다.
청록카바레 주름잡던 우리 젊은 우리 50대 시절
김양순 내가 느꼈어. 인물이 예쁘면 시집을 잘 가. 나도 인물이 받쳐줬기 때문에 은행원한테 시집 간 거야(웃음).
문봉숙 얘 젊었을 때는 예뻤어. 지금은 망가져서 그렇지(웃음).
김양순 김신조가 넘어왔을 때 1968년에 내가 육군본부에 있었거든. 나는 육군 장교하고 엮어질 줄 알았어. 그런데 은행원한테서 중매가 딱 들어오니 집에서 난리가 난거야. 은행원인데다가 집안도 좋고 대학도 좋고. 간판이 사람 죽이더구먼. 나 그래서 간판보고 시집갔잖아. 그런데 성격은 더 좋은 거야. 남편이 나 놀던 걸 전혀 몰라. 뭐 내가 카바레 가려고 거짓말하면 “왜 여자들이 저녁에 문상을 가냐고 낮에 가지” 그랬어. 모르니까. 우리는 또 그냥 집에서 나왔다가 밖에서 옷 갈아입고 그랬었어. 고속버스터미널 옆 청록카바레, 옛날 우리 때는 고속버스터미널 옆 청록카바레가 제일이었어. 우리 50대일 때 거기가 유명했다고. 20년 됐어. 그때도 참 인기 있었는데.
<브라보 마이 라이프> 9월호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문봉숙씨(왼쪽)와 김양순씨(오른쪽). 두 사람은 40대 중반에 자녀들 초등학교 자모회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서로 실향민 2세라는 사실을 알고 돈독해졌다고. 10여 년간 은성탕에 같이 다니면서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됐다.
17년째 은성탕을 운영 중인 김은진(57)씨. 10년 전 남편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동생 사는 미국에 갈까도 생각했다. 지금은 이곳에서 오랜 단골 만나고 사는 게 좋다.
“머리에 영양 주는 거예요. 머리가 뻣뻣해서. 머리는 항상 여기서 해. 편하니까 여기서 해요. 목욕탕 안에서 하니까. 머리하는 가격이 저렴해. 그냥 우리 같은 사람들은 여기서 이렇게 하는 거야. 파마 3만원, 압구정동에서 완전 싼 거잖아. 안 그래?”-김양순
“죄송하지만 뒷모습을 좀 찍고 싶은데 물속으로 들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그랬더니 한 분은 물속으로 또 한 분은 그냥 찍으라고 한다. 욕조에 걸터앉은 분은 1주일에 3번 신장질환으로 혈액투석을 한다. 병원에 가는 날을 제외하고는 이곳에 와서 수다도 떨고 목욕도 하면서 몸의 순환을 돕는다고. 목욕을 마치고 나와서 보니 혈액투석을 위해 두꺼운 주사바늘을 오랜 시간 꽂은 탓에 팔 혈관이 크게 부어올라 있었다. 물 안에 앉아 있는 분은 국내 유명 일간지의 언론인 출신이다. 요즘은 기존에 만나던 사람들 대신 목욕탕에서 만난 친구들 사는 얘기에 귀 기울이며 살고 있다고. 목욕탕에 앉아 맑은 목소리로 노래 부르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권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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