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세상을 지배할수록, 더 인간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
우리 시대의 'We Are the World'는 어디에 있는가
정채상 교수님 추천으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The Greatest Night in Pop>을 봤다. 어린 시절, 국가적 대형 행사마다 어김없이 흘러나오던 'We Are the World'의 탄생기를 다룬 기록이다.
잊고 지냈던 어떤 감성이 마음을 툭 건드렸다. 1985년, 아프리카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들이 한자리에 모였던 그 밤. 4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영상은 단순한 향수를 넘어 내게 질문을 던졌다.
이제 우리의 세계는 무엇인가...
"각자도생의 시대, 사라진 '어른'의 얼굴"
오늘날 우리는 AI가 매일같이 세상의 지형도를 바꾸는 시대를 살고 있다. 명분 없는 전쟁과 자국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실물 경제와 금융 시장의 괴리는 극에 달했다. 예전처럼 굶주리는 이에 대한 걱정은 줄었을지 몰라도, 미래에 대한 불안과 사회를 향한 잠재적 분노는 오히려 더 커진 듯하다.
유례없는 변동성 속에서 기성세대는 '어떻게든' 살아가겠지만, 숨 가쁜 변화를 온몸으로 맞아야 하는 젊은 세대를 바라보는 마음에는 연민과 불안이 교차한다. 하지만 그 연민은 어느새 자신에 대한 불안으로 옮겨붙어, 타인을 향한 최소한의 여유마저 갉아먹곤 한다.
"요즘 애들 참 안됐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도, 정작 자기만을 위한 선택을 하는 사회를 이끄는 어른들의 행동 양식을 오래 지켜보았다. '이 시대에는 어른이 없다'는 아쉬움은 어느새 '생존하려면 그 길밖에는 없는 것인가'라는 서글픈 학습으로 이어지고 만다.
"Check your ego at the door."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위대한 밤'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제시한다. 팝의 황제부터 전설적인 록스타까지, 자존심 강한 천재들이 자신의 '에고(Ego)'를 스튜디오 문밖에 내려놓고 오직 '대의'를 위해 목소리를 합치는 과정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들이 부른 것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다. 굶주려가는 생명을 향한 따뜻한 인류애이자, 타인의 고통에 기꺼이 공감하고자 하는 인간성의 회복이었다.
예술은 때로 그 어떤 첨단 기술이나 거대 자본보다 강력한 무기가 된다. 수만 페이지의 보고서나 냉철한 경제 지표가 움직이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단 한 줄의 멜로디와 진심이 담긴 가사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알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일들, 어떤 뚜렷한 근거 없이도 마음이 이끌려 행동하는 주체가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시대의 'We Are the World'는 어디에 있는가?"
기후 위기로 지구가 신음하는 가운데 곳곳에서 명분이 부족한 전쟁으로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총성이 멎지 않는 혼돈의 시대에, 나는 다시 묻고 싶다.
단순히 귀를 즐겁게 하는 유희를 넘어, 인간 본연의 온기를 회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의지를 일깨울 예술가가 절실하다.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가 '꼰대'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유년기와 청년기에는 사회 문제를 이야기하는 예술가가 늘 존재했다.
기술은 본래 사람을 위한다는 전제로 성립한다. 선악의 경계와 무관하게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과 기술이 다른 이유다. 하지만 지금의 기술은 특정 집단의 권력을 강화하는 도구로 변질되기도 하고, 선량한 과학자도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다보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에 봉착하기도 한다. 그래서 기술의 지배력이 커질수록, 우리는 역설적으로 가장 인간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테크노 퓨달리즘에 대한 경고나 안전한 AI를 향한 목소리가 도처에 있지만,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다니는 부유물처럼 공허하게 들릴 때가 많다. 크고 먼 주제를 던지면서 눈앞의 문제에서 시선을 돌리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럴 때 파편화된 인간의 마음을 하나로 집결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예술일지 모른다. 40년 전 그 밤이 증명했듯, 예술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때 비로소 세상은 변화의 첫발을 뗄 수 있기 때문이다.
남편과 대화를 나누다 문득 깨달았다. Social Movement으로서의 대중예술을 못 본 지 참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마이클 잭슨이나 밥 딜런을 되살릴 수는 없겠지만, 누군가 이 시대의 혼돈을 잠재울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위대한 목소리들이 다시 한번 그리워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