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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베트남에 간다면
by 정희정 Oct 26. 2018

하노이에서 배운, 타인의 여행을 여행하는 법

내 여행의 지경을 넓혀 '깊은 글'을 향하다

호안끼엠 호숫가를 따라 걷는다. 호안끼엠을 한자로 풀어 읽으면 환검(還劍), ‘검을 돌려준 장소’란 뜻이다. 호안끼엠 호수에는 아래 설화가 전해 온다.

1404년, 중국 명나라가 베트남을 침략했다. 대국(大國)을 이길 방도는 없었다. 베트남은 중국에 예속돼 식민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영웅은 본래 난세에 나는 법. 베트남 남부에서부터 봉기가 일었다. 레 러이가 규합한 세력이었다. 레 러이는 호전하며, 중국군을 내몰기에 거진 성공했다. 
다만 레 러이 일당은 마지막 전투에서 고전을 겪었다. 베트남군은 수세에 몰렸다. 하노이에 다다른 무렵이었다. 
그때 호안끼엠 호수에서 거북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거북은 레 러이에게 ‘신의 보검’을 건넸다. 레 러이는 신의 보검을 휘둘러 중국군을 대패시켰다.

이후 레 러이는 베트남 레 왕조(1428~1788)를 창건했다. 초대 황제로 즉위한 그는 호안끼엠 호수에 찾아와 거북에게 신의 보검을 돌려주었다. 


하노이를 한 번 더 여행하기에 앞서, 이 도시에 예전보다 큰 애정을 쏟기로 다짐했더랬다. 이 도시를 이전과 달리 보기 위해서였다. 옛 방식을 답습했다가는 무엇 하나 사생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하노이에 관한 온갖 이야기들을 찾아 읽었다. 레 러이 황제 설화는 그때 읽은 이야기 중 하나였다.

하노이에는 거북과 용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때 베트남에서는 거북을 신격화해 섬기는 게 유행이었단다. 거북을 전쟁 신으로 섬기던 중국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이후 중국에서 용이 신수(神獸)로 떠오르며, 베트남 사람들은 용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거북은 옛 설화 속에나 남았지, 베트남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베트남 사람들은 자국을 침략한 전적이 있는 중국을 미워하면서도 동경해 닮고자 했다.

하노이의 옛 이름에도 거북 대신 용의 흔적이 남아있다. 하노이는 한때 ‘탕롱(昇龍)’, ‘용이 올라간 장소’라고 불렸다. 


오늘은 비켜가려나 싶던 폭우가 내리기 시작한다. 살갗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타격감이 묵직하다. 탕롱 수상인형극장까지 걸어가기는 좀처럼 쉽지 않겠다.

“택시, 택시! 탕롱으로 가주세요, 탕롱이요!”

택시 기사는 되묻는다.

“탕롱 어디? 지금 이곳도 탕롱이야.”

생각해보니 서울에서 택시를 타고 “한양으로 가주세요, 한양이요!”라고 이야기한 셈이다.

“음, 탕롱 수상인형극장으로 가주세요.”

안내 책자를 뒤적여 구체적 지명을 이야기한 후에야 택시는 출발한다. 

방금까지만 해도 호안끼엠 호수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며 젠체했건만, 그새 이 도시를 대하기로 마음먹은 바를 까먹고 말았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달리 보이는 것들이 존재한다. 이 나라를 바라볼 때 베트남 사람들과 같은 색안경을 쓰고 있으면 된다. 무심코 쓰던 단어들을 구별해 사용하면 된다. 그리고 이는 '좋은 글’까지는 아니더라도 ‘깊은 글’을 쓸 수 있게 도와줄 테다.


원래부터 무언가를 세심하게 보는 편은 아니었다. ‘그녀’와 벗하며 바뀌었지 싶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그녀는 대뜸 내게 물었다. 

“사람을 찍는 게 좋아? 풍경을 찍는 게 좋아?"

나는 풍경을 찍는 게 좋다고 답했다. 주변에 마땅한 피사체가 없어 부득이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날 이후, 그녀는 내게 사람 찍는 재미를 알려주려 애썼다. ‘사람’이란 피사체는 내 가족이나 친구, 애인에 국한되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엿보이는 타인의 일상을 두루 포함했다. 그녀와 어울리며 매 순간을 깊게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더 나아가 타인의 일상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법을 깨쳤다.


그녀는 늘 내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가령 오늘만 해도 그렇다. 수상인형극은 딱 봐도 내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를 꼭 보고 오라며 누차 말하던 그녀가 떠올라 표를 끊었다. 살면서 한 번쯤 그녀의 여행을 여행해보고 싶었으니, 그게 오늘이어도 나쁘진 않을 성싶었다.

정시가 되자 극은 시작한다. 베트남 전통 악기가 연주되며 막이 오른다. 목동을 형상화한 인형이 피리를 분다. 농부들은 농사를 짓고, 어부들은 낚시를 한다. 낚시 바늘에는 물고기 대신 옆자리 동료가 걸려든다. 대어(大漁)를 잡았다며 기뻐하던 두 사람은 서로를 낚아 올리곤 허탈해한다. 사냥꾼들은 사냥감을 쫓다가 자기들끼리 부딪히곤 난투를 벌인다. 객석에서는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극의 분위기가 고조됐을 무렵에는 황제복을 입은 한 사내가 등장한다. 레 러이 황제다. 황제가 중국군을 향해 신의 보검을 겨누자, 그들은 각종 우스꽝스러운 행위를 선보이며 도망친다. 아군을 향해 창을 겨눈다거나 제 발에 제가 걸려 넘어진다. 신수가 등장해 베트남의 승리를 축하하는 춤을 춘다. 극은 끝이 났다. 


숙소로 돌아가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지루했어. 뚜렷한 기승전결이 없는 게 딱 내 취향이 아니야.”

“그래서? 더 하고 싶은 말은 없어?”

“소소한 웃음만이 존재하는, 뭣도 아닌 극도 극이구나 싶었어. 극 초반에는 나만 주요한 흐름을 놓치고 있나 싶어 걱정했거든. 그런데 보다 보니 탕롱 수상인형극은 원래가 이런 극이더라. 그동안 자극적인 콘텐츠에만 익숙해져서 이런 종류의 극을 감상하는 법을 잊고 살았어.”

그녀 덕분에 늘 보던 것만 보는 여행에서 탈피한다. ‘그녀의 여행’을 여행하며 내 여행의 지경을 넓힌다. 하노이를 바라보는 법을 하나 더 익힌다. 

“고마워, 내 여행에 간섭해줘서.”

수화기 너머로 소리 없이 웃는 웃음이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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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우연히 베트남에 간다면
소속호주에건네는인사 직업출간작가
여행에세이 <호주에 건네는 인사> 저자. 매주 금요일과 화요일, 매거진 <우연히 베트남에 간다면>과 그 외전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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