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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베트남에 간다면
by 정희정 Nov 16. 2018

사파에는 ‘꿈꾸는 민족’이 산다

사생하는 일은 이따금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하노이 북서쪽 고산도시 사파로 향한다. 베트남 친구 [싸파]가 아닌 [싸빠]라고 발음해야 한다며 알려준 곳이다.

사파에는 라오차이, 따반 등 서로 다른 특색을 지닌 소수민족 마을 십수 개가 모여 있다. 그리고 그 중 라오차이 마을에는 몽족이 산다. '꿈 몽(夢)'자를 사용해, 스스로를 '꿈꾸는 민족'이라 소개하는 사람들이다. 


사파를 여행하기로 한 것은, 순전히 그 이름에서 전해오는 낭만이 좋아서였다. 몽족이 꾸는 꿈이 궁금해서였다.

톨스토이 단편선 속 이야기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와 닮아있는 그들 설화도 마음에 들었다.


먼 옛날 '북방의 고향'에는 몽족과 다른 여러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북방의 고향이 융성함에 따라, 민족들 간에는 땅 문제로 분쟁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누군가 묘책을 냈다.
"각 부족 별로 특사 한 명씩을 뽑아 정합시다. 해 뜨는 순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 해 지기 전까지 자기 부족이 정착할 새 땅에 표식을 하고 돌아오는 거죠."
"특사가 정해진 시간 안에 돌아오지 못한 부족은 어떻게 되나요?"
"다시 해가 뜬 순간, 특사가 서있던 장소에 모여 사는 걸로 합시다."
그 날이 됐다. 대다수 특사들은 넓고 비옥한 땅을 찾아 뛰어갔다. 반면 몽족 특사는 좁고 척박하더라도 부족민끼리 모여 살 수 있는 터전을 찾아 나섰다.
몽족 특사는 해 질 녘이 다 돼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동틀 녘 그는 높은 산꼭대기 위에 서있었다. 다른 어떤 부족도 탐내지 않는, 몽족끼리만 오순도순 모여 살 수 있는 땅이었다.
그 날 이후 몽족은 산에서 살게 됐다.  


배낭을 풀고 라오차이 마을로 트래킹을 나선다. 오늘의 사파는 샙 그린(Sap Green), 봄철에 핀 꽃봉오리를 연상시키는 밝은 녹색이다. 그 위로 옅은 금빛이 감돈다. 아이들 뛰노는 소리와 그들을 찾는 부모의 외침이 함께 들려온다.


문득 누군가 날 뒤따르는 느낌이 들어 뒤돌아본다. 아낙네 세 명이 어정쩡한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오고 있다. 그녀들과 나 사이 거리는 좀처럼 멀어지지 않는다. 내가 멈추면 따라 멈추고, 내가 걸으면 따라 걷는 식이다. 가이드가 필요하지 않다며 손사래 치자, 집 가는 방향이 같은 것뿐이라며 해사하게 웃는다.

라오차이 마을을 가리키는 마지막 표지판을 본지 어언 20분이 지났다. 슬슬 불안감이 엄습한다. 인적은 끊긴 지 오래다. 내 주춤거림을 눈치챈 아낙네들이 지름길을 알려주겠다며 나선다. 

아낙네들은 수풀을 헤치며, '길 아닌 길'로 날 이끈다. 이 방향이 맞느냐고 재차 묻자, 연일 계속된 폭우에 길이 망가진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란다. 내가 좀처럼 뒤따르지 못하자 양 옆에서 팔 한 쪽씩을 잡고 거들어다. 손이 놀고 있는 한 아낙은 몇 발자국 앞서 가며 내 발에 채일 만한 나뭇가지나 돌들을 치워준다. 

물이 차올라 돌다리를 숨긴 시냇물을 건너고, 산사태로 막힌 오솔길을 우회해 그녀들의 마을 라오차이에는 도착했다.

 

"배고프지 않아? 우리 언니가 끝내주게 맛있는 쌀국수 집을 하거든."

"기념품을 사갈 생각은 없어? 근처에 삼촌이 하는 가게가 있는데, 가서 구경하지 않을래?"

식사를 할 생각도, 기념품을 살 생각도 없다고 답한다. 그녀들 표정이 점차 굳어진다. 끝내는 따반 마을로 향하는 길 어귀까지 따라온다.

"30만 동씩 주면 돼."

무슨 말이냐며 되묻자 말한다.

"우리가 널 이곳까지 데려와줬잖아. 한 사람 앞에 30씩이야."

모든 것이 호의인 줄 알았다는 내게, 그녀들은 아니었다고 답한다. 가이드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내게, 결국에는 필요로 하지 않았느냐고 되묻는다. 

몽족 마을에서 몽족 아낙네 셋을 상대해 이길 도리는 없다. 그녀들은 도합 50만 동을 받아낸 후에야 길을 비켜주었다.


사파로 향하기 전, 하노이의 어느 게스트하우스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사파에는 왜 가려고 하는 거야?"

"몽족을 만나고 싶어서. '꿈꾸는 민족'이란 이름이 낭만적이잖아."

"중국에서는 그들을 '묘족'이라고 불러. '고양이 묘(猫)'자를 붙여서 도둑고양이 같은 민족이라며 비아냥거리는 거야. 몽족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

"베트남 사람들도 몽족을 좋아하지 않아. 그들을 믿지 마. 네 환상이 깨질까 봐 걱정돼."

당시에는 한 귀로 흘려들었던 이야기들이었다.


따반 마을을 향해 걸으려다 말고, 순간 눈물이 차오른다. 길을 잃어버려서 우는 것이 아니다. 돈이 아까워서 우는 것도 아니다. 사파를 여행하기 전, 몇 번이고 마음속에 그려보았던 '이데아'를 향한 조의(弔意)다. 눈앞의 한 마을이, 한 민족이 비로소 바로 보인다. 몽족은 꿈꾸는 민족이 아닌, 꿈을 잃어버린 민족이었다.

매일매일 내가 원하는 대로 사생할 수는 없으리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하필이면 그 기분을 사파에서 느끼게 될 줄도 몰랐다. 사파는 이번 여행에서 내가 가장 기대하고 있던 도시였다.


라오차이 마을을 거슬러 사파 시내로 되돌아간다. 한 아이가 다가온다. 몽족 아이다. 몽족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알록달록한 색감의 옷을 입고 있다. 아이는 말없이 팔찌 하나를 내민다. 사달라는 의중인가 보다. 고개를 돌려 응수하니 내 시선을 따라 걸음을 옮겨온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가련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아이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힌다. 아이의 눈을 응시하며 말한다.

“아니야. 사지 않을 거야.”

영어로 한 번, 베트남어로 한 번을 천천히 말한다. 아이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는지 다시 한 번 팔찌를 내민다. 매정하게 뒤돌아선다.

아이가 팔찌를 팔아 연명하는 삶의 방식을 당연시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와 타인의 거절이 쌓여 다른 방식의 삶을 꿈꾸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몽족이 그들의 꿈을 되찾는 날이 언젠가 왔으면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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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호주에건네는인사 직업출간작가
여행에세이 <호주에 건네는 인사> 저자. 매주 금요일과 화요일, 매거진 <우연히 베트남에 간다면>과 그 외전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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