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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베트남에 간다면
by 정희정 Nov 23. 2018

닌빈의 그녀를 멋대로 사생하지 마세요!

겸손하지 않은 사생은 안 하느니만 못하지 싶다

하노이 북서쪽에 고산도시 사파가 있다면, 남쪽에는 '물의 도시' 닌빈이 있다. 베트남을 세 번이나 여행했음에도 닌빈에 와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순전히 한 여인 때문이었다. 닌빈을 여행하기로 마음먹은 것 말이다. 한 장군의 딸로 태어나 두 왕조의 황후로 생을 마감한, 쯔엉 번응아의 삶에 마음이 쓰였다.      


쯔엉 번응아는 딘 보린과 첫 번째 결혼 생활을 했다. 딘 보린은 열두 호족들이 나눠 다스리던 베트남을 통일하고, 딘 왕조(968~980)를 세운 사내다. 딘 왕조는 중국에 의존하지 않은, 베트남 최초의 독립 왕조다.
딘 보린이 둘째 아들만을 편애하며, 왕조는 분열을 겪었다. 황자들 사이 다툼이 일었고, 첫째 아들이 둘째 아들을 살해했다. 딘 보린은 둘째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정사에 소홀해졌다. 딘 왕조의 신하 된 도 틱은 황가의 어수선함에 불만을 품고, 이듬해 딘 보린과 그의 첫째 아들을 살해했다.
여섯 살 딘 또안이 유일한 황위 계승자였다. 어린 황제를 대신해 황후 쯔엉 번응아가 섭정을 시작했다. 장군 레 호안이 그녀를 도왔다. 레 호안은 문무에 두루 능한, 한 국가를 이끌기에 손색이 없는 사내였다. 그는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레 호안은 무력으로 황후를 압박했다. 자신과 혼인하고 통치권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쯔엉 번응아는 그의 요구를 수락하고, 띠안 레 왕조(980~1009)의 초대 황후가 됐다.


닌빈에는 호아르가 있다. 딘 왕조와 띠안 레 왕조의 옛 도성이자, 쯔엉 번응아가 그녀의 삶 전반을 보낸 곳이다.

두 번째 황후로 책봉되던 순간, 쯔엉 번응아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웃었을까, 울었을까? 그녀 입장에서 이 도시를 사생하고 싶은데, 한 문장조차 못 적어 내리겠다. 그녀는 내가 상상하기에 너무 과분한 인생을 살았다. 박복하다고 말해야 할지, 다복하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보이는 것은 허허벌판 대지 위 카민 레드(Carmine Red) 빛 사원들. 순색의 빨강보다는 채도가 옅은, 빛바랜 느낌의 붉은색이다. 사원 위 지붕이 그러하고, 지붕 밑 풍등이 그러하다. 그 기와지붕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게끔 헐겁고, 벽돌 쌓인 담벼락 곳곳에는 이끼가 끼어 있다.

석회암 산과 기암괴석들도 보인다. 역사학자들은 "딘 보린이 닌빈을 에워싼 석회암 산자락에 반해 이곳을 수도로 정했다"라고 설명한다. 험준한 산세로 인해 어느 주변국도 딘 왕조를 침략하지 못하리라 확신했단다. 딘 보린은 그의 왕조가 그의 아집으로 인해 멸망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닌빈은 근교 명승지 땀꼭에서 뱃놀이를 즐길 수 있기로도 유명하다. 땀꼭에는 하롱베이에서 본 것과 유사한 기암괴석들이 가득하다. 하롱베이에서 안개에 가려 드러나지 않은 기암괴석의 부분들을 상상하기가 즐거웠다면, 땀꼭에서는 햇빛이 채도를 높일 대로 높여둔 날 선 모습들을 바라보기가 즐겁다. 하롱베이에서 흑빛 바다 위 한 치 앞길도 보이지 않는 고립감을 만끽했다면, 땀꼭에서는 그 강변을 따라 형성된 베트남 사람들의 생활상을 구경하기가 즐겁다.

나룻배를 타고 땀꼭의 강줄기를 따라 흘러간다. 사공은 이곳 지명이 '세 개의 동굴'을 뜻한다고 알려준다. 땀꼭에는 항카 동굴, 항하이 동굴, 항바라 동굴이 있단다. 그녀는 어설픈 영어를 구사할 줄 안다. 그녀에게 묻는다.

"매일 노를 저어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언제부터 노를 저었어요?"

"결혼한 후부터. 남편 엄마가 가르쳐줬어."

그녀의 삶이 제이드 블루(Jade Blue) 빛 물결 위에 비쳐 보인다. 두 황제의 아내보다는 한 촌부의 아내가 되는 편이 좋아 보인다. 거창한 행복과 불행을 모두 겪기보다는, 소소한 행복과 불행이 오가는 삶이 낫겠지 싶다.


그녀는 능숙하게 발로 노를 젓는다. 땀꼭의 뱃놀이꾼들은 하나같이 팔이 아닌 다리 힘으로 노를 젓고 있다. 내가 탄 나룻배의 사공도, 강의 이편과 저편에서도 그리하는 중이다. 그녀에게 말한다.

"세 번째 동굴까지는 가보지 못해도 좋으니, 발로 노 젓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사공은 흔쾌히 이에 응한다. 노 젓는 법도 가르쳐주고, 세 번째 동굴까지도 데려다주겠단다.

그녀 자리를 꿰차고 앉아 다리를 뻗는다. 나룻배의 폭만큼 다리를 벌리기도, 발바닥으로 노를 움켜쥐기도 쉽지 않다. 몇 번 발길질을 하다 말고 앞으로 고꾸라진다. 나룻배는 왼편 강둑에 선수(船首)를 들이받았다. 노 한 짝은 강물에 떠내려간다. 서둘러 상황을 수습한다.

"미안해요."

"괜찮아. 나도 자주 그랬어. 혼나기도 많이 혼나고, 울기도 많이 울었고. 이거 꽤 어려워, 그렇지?"

문득 그녀의 삶이 쯔엉 번응아보다 평온했으리라 지레짐작한 스스로가 부끄럽다. 그녀가 발로 노를 젓게 되기까지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녀 몰래 그녀에게 범한 내 실수 앞에 생각한다. 섣부른 사생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사생의 대상을 100% 이해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니, 상대를 바라볼 때에는 항시 겸손해야지 싶다. 모든 걸 다 이해했다는 자신감만큼이나 내 글을 추하게 만드는 것은 없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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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호주에건네는인사 직업출간작가
여행에세이 <호주에 건네는 인사> 저자. 매주 금요일과 화요일, 매거진 <우연히 베트남에 간다면>과 그 외전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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