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우연히 베트남에 간다면
by 정희정 Dec 07. 2018

당신들과 나의 랑데부, 후에

만남과 만남이 중첩된 곳에서 새로운 사생은 이뤄진다

후에는 내게 세 명의 사내를 만난 곳으로 기억되는 도시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그들과의 만남은 내 여행에 묘한 울림을 남겨주었다. 


#1. 처음으로 내 이름을 물어봐준 사내, 미스터 응우옌


후에는 흐엉 강을 중심으로 북쪽 구시가지와 남쪽 신시가지로 나뉜다. 강 북쪽이 옛 응우옌 왕조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면, 남쪽은 현대적, 상업적 색채로 칠해져 있다. 

특히 남쪽 신시가지에는 여행객 숙소가 몰려있다. 아침이면 이곳은 골목 어귀마다 행인들로 북적인다. 씨클로 기사들은 앞다퉈 호객 행위에 나선다. 그 호객 행위란 돈 몇 푼 더 벌려는 발버둥보다 사내들끼리의 유치한 자존심 싸움에 가깝다. 자기네끼리 경쟁적으로 값을 낮춰 부르는 탓에 어부지리 격으로 득을 보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오늘만 해도 덕분에 애초 지불하려던 값의 절반에 씨클로를 탈 수 있게 됐다. 

"흐엉 강어귀, 옛 응우옌 왕조의 황성으로 가주세요."

씨클로 기사가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씨클로를 탈 때에는 아래 팁 몇 가지만을 기억하면 충분하다.


1. 씨클로 기사들은 골목 어귀나 큰 나무 그늘 밑에 주로 모여있다. 후에 시내 어느 곳에서든지 5분 내 그들을 찾을 수 있다.

2. 씨클로 값을 흥정할 때에는 아래와 같이 하자.
- 씨클로 기사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서 목적지를 말한다. 그들 중 누군가가 먼저 값을 부를 때까지 기다린다. 확신컨대 그는 당신이 가늠했던 요금의 몇 배를 부를 테다. 

- 당황하지 말고, 그 값의 반의반 정도를 기 센 목소리로 외친다. 그들은 '제법인데?'라는 눈빛을 주고받고는, 다시 진짜 요금의 두 배 정도를 부를 테다.

- 그 값의 절반이 아니면 씨클로를 타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씨클로 기사들은 공돈을 벌기는 글렀다는 생각에 실망할 테다. 하지만 이내 자기네끼리 사람을 정해 목적지까지 데려다줄 것이다.


가끔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이들에게는 이름을 묻는다. 오늘도 그러했다.

"아저씨,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응우옌, 미스터 응우옌!"

차 소리에 묻힐까 싶었는지 크게 답하여 준다. 응우옌 왕조와 같은 '그' 응우옌이다. 베트남에서 응우옌 씨는 한국의 김 씨, 이 씨와 맞먹을 정도로 흔한 성이다. 후에의 어느 번화가에서 "응우옌!"이라고 목청껏 외치면, 행인 중 절반 이상이 가던 길을 멈추고 무슨 일이냐며 물어올지도 모른다.

이번엔 그가 나의 이름을 묻는다. 한자 정(丁)을 베트남식으로 바꿔 읽어 [딘]이라고 일러준다. 닌빈에 딘 왕조를 세운 딘 보린과 같은 성이다. 

멋쩍은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현지인들에게 내가 이름을 묻는 경우는 허다했지만, 그들이 내 이름을 되물어봐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미스터 응우옌은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내 이름을 물어봐준 사내였다.



#2. 베트남을 '하나의 국가'로 바라보게 해준 사내, 틱꽝득


베트남을 여행하기 전, 한 독재자의 말로를 이끈 어느 스님에 대한 글을 읽은 적 있다.     


호치민이 북베트남의 주석이 됐을 때, 남베트남은 응오딘 지엠이 집권하고 있었다. 지엠은 악명 높은 독재자였다. 호치민이 지주의 재산, 토지를 몰수해 빈농에게 재분배할 때,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체포하기에 급급했다. 언론 출판의 자유나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은 '눈 내리는 소리'로 치부됐다. 
1963년 석가탄신일, 후에에서는 불교도들의 연례 시가행진이 예정돼 있었다. 그 시작을 알 수 없을 만큼 오랜 관례적 행사였다. 하지만 지엠은 이 날의 행진이 자신을 규탄하는 시위로 변질될 수 있다며 군대를 투입해 진압을 시도했다. 정부군의 발포로 불교도 몇이 사망했다. 
시민들은 분노했다. 자국민에게 총구를 겨눈 이를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 틱꽝득 스님도 지엠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스님은 불교도다운 방식으로 지엠의 독재에 저항하고자 했다. 스님은 어지러운 정국을 위해 소신공양(부처에게 공양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것)을 드릴 것을 결심했다. 그 해 6월, 스님은 후에에서 출발해 사이공까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여행길에 올랐다. 
틱꽝득 스님의 죽음은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한 외신 기자는 "스님은 화염 속에서도 정좌 자세를 유지했으며, 일말의 미동이나 표정의 일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라고 기술했다. 그의 죽음 이후, 이전까지 반공을 이유로 지엠의 독재를 묵인하던 서방 국가들이 등을 돌렸다. 미국 또한 우회적으로 지엠에 대한 지지 철회를 선언했다.
그 해 11월, 남베트남 군인들이 일으킨 쿠데타에 지엠은 사살당했다. 남베트남은 빠르게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소 민망스럽게도, 나는 이 글을 읽은 후에야 베트남에 '하나의 국가'로서 받아 마땅한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베트남을 사생의 대상으로 결정한 것도 그 이후의 일이었다. 

후에에서는 틱꽝득 스님이 이곳을 출발해 사이공까지 타고 갔던 자동차를 볼 수 있었다. 스님의 세룰리언 블루(Cerulean Blue)색 자동차는 후에 시내 외곽의 티엔무 사원에 보관돼있다. 세룰리언은 라틴어 '하늘(cærúlĕum)'에서 유래된 단어로, 불투명하면서도 맑고 깨끗한 하늘색을 뜻한다. 틱꽝득 스님과 참으로 어울리는 색이다. 이 자동차는 스님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허락된 사치였다.     



#3. 내 평생 최고의 여행 메이트가 된 사내 


후에에 도착한 첫날 저녁, '지수'가 왔다. 대뜸. 베트남에.

지수와는 서로에 대해 남들보다 많은 것을 안다며 자부하는 사이다. 이를테면 지수는 덥고 습한 날씨를 싫어한다. 베트남과 같이 더운 나라는 선뜻 여행지로 고려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지수는 단지 내 여행에 동행이 돼주고 싶었단다. 어쩌면 그는 내 여행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 같은 계획을 세워두었는지도 모른다. 출국이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그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베트남으로 널 만나러 찾아가면 어떨 것 같아?"

그 때에는 생각 없이 들어 넘겼던 질문이었다.


여행 중 동행이 생기면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일이 있었다. 어느 베트남 식당을 찾아가 구미 당기는 음식을 잔뜩 시켜 먹는 것. 혼자라는 부담감에 매 번 그 중 한 가지만을 택해 주문하곤 했더랬다.

지수와 함께 어느 가게 중앙 식탁을 차지하고 앉는다. 첫 번째로 나온 음식은 '반베오', 쌀떡 위에 말린 새우, 견과류 등이 고명으로 뿌려져 있다. 한 스푼 떠먹으니 말캉한 식감과 함께 고소한 향내가 전해온다.

그 맛을 충분히 음미할 새도 없이 두 번째 음식 '짜오뜸'이 준비돼 나온다. 사탕수수 막대에 다진 새우 살을 말아 구워낸 요리로, 채소에 쌈 싸 먹으니 고기 못지않은 식감이 난다.

곧 '반세오'가 식탁 위에 차려진다. 녹두전에 돼지고기, 새우, 숙주 등을 넣고 반으로 접어 튀겨낸 요리다. 한 입 베어 무니 고기 육즙이 터져 나오는 동시에 채소의 아삭함과 향내가 느껴진다. 튀김 요리에서 이런 맛이 나도 되는가 싶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식사를 하며 대화 나눌 상대가 생긴 게 더 즐겁다. 특별하달 것 없는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데도 그렇다.     


옆 테이블 할아버지가 참 맛깔나게도 먹는다며 국적을 물어온다. 지수가 답한다.

"코리아(Korea)."

내가 덧붙인다.

"한꿕(Hàn quốc)."

"학생이야?"

"아뇨, 이 친구는 작가요."

대답하기를 주춤해하는 나 대신 말해준다. 지수는 늘 주변 사람들에게 날 '작가'라고 소개한다. 아직은 책 한 권 낸 작가 지망생에 불과함에도, 그 꿈을 반드시 이뤄내란 바람으로 그리 말한단다. 이는 내가 지수를 좋아하는 수만 가지 이유 중 하나다.

할아버지는 좋은 나라에서 왔다며, 좋은 직업이라며 베트남식 생맥주 '비아허이'를 시켜주는 호의를 베푼다. 덕분에 거나하게 얻어 마신 후 가게 문을 나선다.

"간만에 배불러. 배보다도 마음이 불러."

"나도, 나도 그래. 

이곳까지 와준 지수에게 고맙다. 지수는 내 평생에 다시 만나지 못할 여행 메이트다.

keyword
magazine 우연히 베트남에 간다면
소속호주에건네는인사 직업출간작가
여행에세이 <호주에 건네는 인사> 저자. 매주 금요일과 화요일, 매거진 <우연히 베트남에 간다면>과 그 외전을 연재합니다.
댓글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