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모노> 난해함의 권위, 또는 승인 언어의 폐쇄성

성해나와 그 주변 평론을 읽으며 드는 이질감에 대하여

by Dain

<혼모노> 난해함의 권위, 또는 승인 언어의 폐쇄성

성해나와 그 주변 평론을 읽으며 드는 이질감에 대하여


성해나의 소설을 읽다보면 덜컥덜컥 막힌다. 이해하지 못하거나 소외감을 느끼는 종류의 난해함과도 조금 다르다. 오히려 더 불편한 것은,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이 과연 충분히 무겁고 성실하게 수행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표제작의 제목이기도 한 ‘진짜’라는 물음은 얼핏 보면 동시대의 정체성과 인정 욕망을 파고드는 핵심 질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거리를 두고 보면 이 질문은 이미 지나치게 많이 소비되어온 질문이기도 하다. 누가 진짜인지, 무엇이 진짜인지, 어떤 태도가 진정성 있는 것인지 묻는 언어는 오늘날 거의 모든 문화적 장면에서 반복되고 있다. 그만큼 손쉬운 문제제기가 될 위험 또한 크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의 조건 속에서 힘겹게 살아간다. 누구는 서툴고, 누구는 비루하고, 누구는 우스꽝스럽고, 누구는 자기기만 속에 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삶이 곧바로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완결된 진정성의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애씀과 결핍, 욕망과 불안, 생존과 체면, 오해와 자기방어가 뒤엉킨 상태로 겨우 삶을 이어갈 뿐이다. 그렇다면 문학이 해야 할 일은 그 복합성을 버티는 일이지, 그것을 진짜와 가짜의 감각으로 너무 쉽게 호출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모두가 노력하며 사는 모습일진대, 그 삶들 위에 다시 ‘진짜’를 묻는 자리가 과연 그렇게 높은 자리가 될 수 있는가. 오히려 그 물음 자체가 성의없어 보이는 것은, 인간의 삶이 이미 판정의 대상이기보다 이해의 대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장의 문제도 여기와 연결된다. 성해나의 소설은 익숙한 단어들을 사용하면서도 낯선 배열을 만들어낸다. 많은 평론은 바로 이 지점을 예민한 감각, 새로운 서사적 질감, 동시대 현실의 불협화음을 포착하는 능력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낯설음은 그것이 우리의 자동화된 지각을 깨고 세계를 다르게 보게 만들 때에만 의미가 있다. 반대로 익숙한 단어를 비틀어놓았을 뿐, 그 비틂이 새로운 인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독자는 통찰이 아니라 안개를 경험한다. 문장이 설명을 생략하고, 서사가 맥락을 유예하며, 분위기가 의미를 대신할 때 남는 것은 깊이가 아니라 기묘함의 잔상이다. 읽고 난 뒤 무엇이 더 선명해졌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왜 이렇게 흐릿하게 남아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자꾸만 ‘문장의 책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문학이 모든 것을 친절히 설명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난해함도 필요하고, 생략도 필요하며, 불친절조차도 미학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미학이 되려면, 생략된 것들 사이에서 오히려 인간의 구체성이 더 선명해져야 한다. 말해지지 않은 것이 더 무겁게 남아야 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종종 그 반대의 느낌이 든다. 구체성은 희미해지고, 태도만 남는다. 인물의 절박함은 개념적 질문의 배경으로 밀리고, 삶의 질감은 낯섦의 효과를 위한 재료처럼 보인다. 그렇게 되면 독자는 인간을 만난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해석의 포즈를 먼저 만나게 된다.


이때 평론은 본래 그 흐릿함을 해명해야 한다. 작품이 실제로 어디서 힘을 발휘하는지, 어떤 장면이 왜 유효한지, 어떤 인물의 어긋남이 무엇을 드러내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평론은 그 과정을 건너뛴다. 작품의 난점이나 공허를 함께 파고들기보다, 그것을 곧장 미학적 성취의 언어로 번역해버린다. 동시대성, 경계의 해체, 낯섦의 미학, 새로운 감각, 삶의 진실 같은 추상어가 반복되지만, 정작 독자가 읽으며 부딪힌 난점은 풀리지 않는다. 어떤 문장이 구체적으로 탁월한지, 어떤 장면에서 인물의 내적 필연이 생기는지, 작품이 제기한 질문이 왜 손쉬운 도덕적 포즈가 아닌지를 입증하는 설명은 부족한 채, 작품의 권위만 먼저 정당화된다.


이 지점에서 독자가 느끼는 반감은 작품 자체보다 그 주변의 해석 구조를 향하게 된다. 소설과 평론이 함께 하나의 폐쇄적 해석 공동체처럼 작동하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내부에서는 서로의 감식안과 취향을 확인하며 난해함을 가치로 승인하고, 외부 독자의 상식적 의문이나 실제 독서경험에는 충분히 응답하지 않는다. 작품은 설명되지 않은 채 권위를 얻고, 평론은 권위를 입증하는 대신 다시 유통한다. 그러면 난해함은 통찰의 결과가 아니라 취향의 신호가 되고, 비평은 분석이 아니라 상호 추인의 언어가 된다. 독자가 읽는 것은 소설 한 권이 아니라, 소설을 둘러싼 승인 체계 전체가 된다. 이런 구조가 특히 불편한 이유는 그것이 문학을 삶에서 떼어내기 때문이다. 원래 문학은 삶의 모순과 애씀, 실패와 생존의 질감을 더 깊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질문의 포즈가 인간의 구체성을 압도하고, 평론의 승인 언어가 작품의 실제 밀도보다 앞서게 되면, 문학은 어느새 삶을 이해하는 장이 아니라 취향의 위계를 확인하는 장처럼 보인다. 그 순간 독자는 작품을 통해 삶을 보는 대신, 문단 내부의 폐쇄적 자기확신을 먼저 보게 된다.


물론 모든 난해함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난해함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의 책임성이다. 문장이 낯설다면 왜 낯설어야 하는가. 질문이 크다면 왜 그 질문을 감당할 만큼 삶의 구체성을 견뎠는가. 평론이 찬사를 보낸다면 그 찬사는 어디까지 장면과 문장의 차원에서 입증되는가. 독자가 느끼는 거부감은 단순한 취향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문학이 삶의 복합성을 성실하게 다루지 않은 채, 질문의 크기와 승인 언어의 화려함으로 스스로를 부풀리는 데 대한 거부감이다.


결국 성해나의 소설과 그를 둘러싼 평론에 대한 불신은 이해 여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구체성보다 질문의 포즈가 앞서고, 작품의 실제 힘보다 내부의 승인 언어가 더 크게 작동하는 구조에 대한 불신이다. 독자는 난해함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난해함이 무엇을 새롭게 보게 하는지 끝내 입증되지 않은 상태를 거부한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소설보다 더 문제적으로 보이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성해나천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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