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에서 너에 이르기까지.
"여기는 물 색이 왜이래요? 옥색이에요."
그의 말처럼 하천의 물에는 짙은 녹빛이 섞여있었다. 보통의 하천에는 물의 색이랄 것이 딱히 없다. 하천 바닥의 자갈 빛이거나, 물에 섞인 부유물 색이거나. 물이 떨어지는 곳은 하얀 거품이 인다. 하지만 삼척의 물은 달랐다. 옥빛, 에메랄드빛이랄까.
한편, 하천 맞은 편에는 먼지 더께가 쌓인 것 마냥 온통 잿빛인 시멘트 공장이 있었다.
이곳의 하천이 녹빛으로 흐르는 이유이기도 했다.
"여기가 석회암 지대라 그런 거 아닐까. 저 앞에 시멘트 회사도 있잖아. 봐봐."
삼표시멘트의 본사와 공장이 이곳 삼척에 위치하고 있다.
물에 석회질이 섞이면 탁한 푸른 빛이 돌게 된다. 흔히들 말하는 블루라군처럼.
삼척 오십천의 물색이 옥빛인 건 그런 이유일지 모른다.
석회암 지대에 지하수가 스며들어 수천년, 혹은 수억년의 시간이 흐르면 석회 동굴이 형성된다. 석회암 지대인 삼척에는 국내에서 가장 큰 석회동굴인 환선굴이 있다. 그리고 그보다 규모가 작은 대금굴 이 두 개가 현재 개방되어있다.
입사한 지 얼마 안되어 회사 사람들과 대금굴에 간 적이 있다. 굴은 축축했고, 넓게 펼쳐진 종유석들이 죽순처럼 여기저기 솟아나 있었다.
어느 가느다란 종유석은 십만년 동안 자라나 내 키보다 조금 크게 되었다.
어느 종유석은 다른 종유석을 만나 석주가 되기 위해 200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 둘의 사이 거리는 겨우 1cm에 불과했다.
해설사는 그 200년이란 시간이 흘러도 다른 종유석과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시간과 물의 흐름’
어둡고 축축한 굴은 그곳에서 그렇게 생겨났다.
관광을 위해 덧대진 계단과 발판을 딛고 사람들은 그 안을 유유히 구경하였다. 5억 3천만 년 전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동굴 안에서 고작 100년을 사는 나는 종유석을 보며 짐짓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굴안의 온도는 14도씨, 이산화탄소 농도는 1,130ppm이었다. 높은 이산화탄소 농도에 머리가 약간 멍하다가 하품이 계속해서 나오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런 사람은 나뿐인 거 같았다. 몸 속의 이산화탄소를 내뿜으려 하품이 필연적으로 뿜어져나왔다. 갖고 있는 걸 내뿜으려 필연적으로.
동굴엔 1시간 좀 넘게 있었다. 처음엔 낯설던 어둠도 점차 적응했다. 나중엔 익숙함과 재미가 어우러져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1시간 넘게 어두운 동굴에 갇혀있다 나오자 산등성이를 등지고 있던 햇볕이 본격적으로 머리 위로 내려쬐었다. 빛을 보니, 행복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렇게 동굴을 빠져 나온 우리는 소고기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 4명이서 고기를 7인분, 그리고 식사를 따로 했다. 천천히 구워지는 소고기를 하나씩 끝없이 집어 먹다 보니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바깥에는 나른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고, 팀장님은 소주를 한 잔씩 마셨다. 나는 잠자코 밥을 먹었다.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고, 천천히 먹었다. 다 먹고 나서 다시 차로 걸어오다가 복권방이 보이길래 들어갔다. 스피또 5천원어치를 긁었고, 2천원어치가 당첨되었다. 서로 웃으며, 즐겁게 복권을 긁어댔다. 처음이라, 이렇게 즐거운 것이겠지.
불혀듯, 스피또를 긁는 내게 잔소리를 하던 이가 떠올랐다. 이렇게 긁으면 안된다고 하며 자신이 손수 복권을 정성스레 긁어주던 사람. 복권 하나를 긁는 데 정성을 쏟던 사람. 겨우 복권 하나에 소환되는 그 사람과의 기억. 잠시 멍한 기분이 된다.
복권방에서 나오자 개미인력, 동이다방, 수입코너, 도시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간판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오렌지가 그려져 있는 노래방이 튀어나왔다.
'오렌지'.
언젠가 어떤 남자와 오렌지 노래방이란 곳을 간거 같다. 언제였을까. 허름한 노래방에서 그와 나는 노래를 실컷 부르다 나왔다. 뒤늦게 발견한 파랑 가발을 보며 아쉬워 하다가. 그런데. 아무래도 이건 다른 사람과의 기억 같다. 다른 사람과의 기억마저 너의 것처럼 느껴져 잠깐, 숨을 멈춘다.
온통 사랑의 감각.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사랑의 흔적. 나에겐 왜 사랑일까.
너에게도 사랑이었으면, 내가 이곳에 있다는 이유로 날 저버리지 않았을텐데.
너에게 나는 한 명 뿐이라, 계속해서 사랑했을텐데.
그게 안 되니 그냥, 이 세상에 여자가 나 한 명이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