괌에서의 새벽 드라이브

뒤돌아보지 않기 vs 지나간 일을 정리하기

by Minah

요즘 내가 집중하고 있는 두 가지 일은 사실상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첫째, 뒤돌아보지 않는 것.

둘째, 정돈되지 못했던 것들을 정리하는 것.



먼저 '뒤돌아보지 않기'에 대해 말하자면, 최근 들어 나는 거의 병적으로 지난 일에 대해 생각하는 걸 싫어하게 됐다.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이미 지나간 시간에 의해 발목 잡히는 느낌이 왠지 싫고 과거보다는 그냥 지금에 집중하고 싶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라고 말함으로써 나를 설명하는 방식보다 '지금 이런 사람이다'로 보여주는 방식이 더 좋다.



근데 그 와중에 뭘 자꾸 정리하게 되는 계기가 여러 번 생기는 거다.

처음 시작은 6월 말에 배송 올 컴퓨터를 둘 자리를 만드느라 책상을 정리하는 거였는데 그게 책장, 피아노까지 번지더니 급기야 방을 거의 다 뒤집어엎게 됐다.


덕분에 하루에 분리수거를 다섯 번씩 왔다 갔다 할 정도로 물건들을 버렸는데, 그러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핸드폰에 들어있는 사진/동영상까지 정리하기 시작했다.



추억이 담긴 물건을 잘 못 버리는 성격 + 지나간 일을 잘 돌아보지 못하는 회피 성향 =

아이폰 4대 + 핸드폰 3대 + 'icloud 저장 공간이 가득 찼습니다'라는 팝업.


지난 일들을 돌아보는 건 나의 대원칙을 깨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시간을 과거라는 이름으로 퉁치고 무작정 클라우드 안에 묻어둘 수는 없다. 뭘 뒤돌아보기 싫은지 대상도 명확하지 않으면서 괜히 두려운 느낌에 겁부터 먹고 계속 피해 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특히 여행 이야기만큼은 살면서 꼭 한 번은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이번에 오프라인/온라인 대청소를 하면서 기겁할만한 자료들을 많이 발견했다.



열아홉에 일본에 갔을 때부터 매번 해외에 갈 때마다 온갖 팸플릿이며 영수증, 명함, 여행지에서 쓴 쪽지와 일기들, 필름 사진들을 모아 각각의 투명 파일에 넣어두었던 것. 십 년 넘은 것들은 영수증이 하얗게 바래 있었지만 (약간 질린 느낌이었음) 그 당시에 갔던 식당 이름까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정돈되지 못한 이야기들을 정리하기 위해선 뒤를 돌아봐야만 하는 아이러니. 그렇다 할지라도 정리하겠다 마음먹었기에, 그 투명 파일 중 하나인 괌(Guam) 폴더를 꺼냈다.




인천 국제공항

비행기 타기 전 커피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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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이 사람 마음을 설레게 하는 건 '떠나는 쪽'이 내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 배웅하는 쪽이 아니라, 떠나는 쪽에 서볼 수 있는 경험은 소중하다.


나라는 사람을 늘 같은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것. 시소의 양쪽 자리에 다 앉아볼 만큼 용기를 가지는 것. 연연하는 역할뿐만이 아니라 후련해하는 역할도 꼭 맡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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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해외여행을 떠날 땐 늘 비행기표와 호텔비만 결제한 채로 아무 일정 없이 떠나곤 했는데, 물론 게으름도 제대로 한몫했지만 나는 떠나는 날의 그 막막함을 유난히 좋아했다.


계절이 반대라는 것도 몰라서 한여름에 한겨울 옷만 들고 간 적도, 새벽마다 현지에서 당일에 갈 코스를 찾느라 머리 싸맨 적도 많지만, 그래도 떠날 때만큼은 함부로 후련하고 싶었던 마음 아니었는지.


그래서 비행기 타기 기다리면서 마시는 커피는 항상 약간의 막막함과 설렘과 후련함이 섞여있는 맛이다.




아시아나 항공 : 인천(ICN) - 괌(GUM)

하늘에서 보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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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타고나서 제일 좋은 두 순간이 있다면 -

하나는 기내 프로그램에 보고 싶은 영화가 마침 있을 때,

그리고 두 번째는 기내 등이 꺼질 때.


이 두 조건이 만나면 꼭 하늘에 있는 영화관 온 거 같아서 그게 너-무 좋다. 아마 세상에서 제일 비싼 영화티켓 아닐까 싶다.


이 날은 개봉한지는 꽤 됐지만 못 본채로 지나갔던 영화 <너의 결혼식>이 있었다.


'When our path crossed, that was how fate worked'

'내가 승희를 얼마나 원하는지보단 얼마나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하느냐가 더 중요하고, 그게 운명이고 인연인 거다'라는 남자 주인공(김영광)의 나레이션이 좋았어서, 불 꺼진 기내에서 영어 자막을 핸드폰 메모장에 옮겨 적었던 기억. (이 말을 하는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우연'이라는 게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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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후반부에 울컥하게 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상하게 비행기에서는 이런 영화들이 잘 어울리더라.




두짓타니 괌 (Dusit Thani Guam Resort) 호텔

2시간의 새벽 드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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괌 공항에 도착해서 두짓타니 호텔에 도착하니 새벽 1시.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곧바로 2시간 더 드라이브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날 엄마는 홍콩에서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집에서 짐만 바꿔 오후에 다시 괌으로 떠나게 됐고 (또 게으름 피우다 엄마 스케줄 안 물어보고 급하게 비행기표 샀음) 짐은 많고, 정신은 없고, 고단했던 엄마는 비행기에 휴대폰을 놓고 내리고 말았다.


우린 그 사실을 호텔 카운터에서 알게 됐고 호텔에서는 곧바로 Gail이라는 직원을 불러줬는데, 그때부터 의도치 않게 Gail과 나의 새벽 드라이브가 시작됐다.


처음엔 공항에 다시 돌아가면 금방 찾을 수 있겠지 싶었는데, 돌아오는 건 '기내 청소 중인데 그런 물건은 없다'는 말뿐. 아쉽지만 새벽에 직원분을 너무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 적당히 포기하려는데 Gail은 나랑 달랐다. 나보다 더 의욕적인 Gail은 휴대폰을 택시에 흘렸을 수도 있다며 공항 직원들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여러 명을 거쳐 나와 엄마를 태웠던 택시를 찾아냈고, 우리는 택시가 주차되어있는 장소로 가서 차 안까지 뒤져볼 수 있었다. (알고 보니 Gail은 전에 공항 택시 배차 파트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이 날 엄마의 새 휴대폰은 찾아내지 못했지만 2시간 동안 괌의 새벽 풍경은 다 봤다.

새벽의 도로는 얼마나 한산한지, 공항 직원들은 어떤 식으로 택시를 배차하는지, 그 많은 택시들은 어디서 쉬고 교대하는지, 공항 뒤편은 어떤 모습인지.


그들의 무전기로 '방금 엄마랑 딸 태운 기사 있냐', '흰색 아이폰 봤냐'는 질문이 오고 갈 때마다 미안함과 민망함에 얼굴이 빨개졌지만, 이상하게 이 날의 새벽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다.


괌의 첫인상은

'아이폰을 잃어버린 곳'이 아니라

'새벽 3시까지 아이폰을 찾아주는 사람이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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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침이 다가올 때쯤 베란다 사이로 보이던 바다까지도.



IMG_7663.jpg?type=w773 Gail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 보냈던 메일




P.S. 비행기나 여행, 바다, 드라이브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는 노래 - 김뮤지엄의 281.31km.

https://youtu.be/lBdPqkMAV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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