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 중 中 트리스탄과 이졸데
7월의 남프랑스에서는 지난 공백을 작정하고 만회하듯, 좋은 프로그램으로 무장한 페스티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 봉준호 감독이 오프닝을 한 칸 영화제(7월 6~17일)에서는 레오 카락스 ‘아네트’, 폴 버호벤 ‘베네데타’ 등 명감독들의 신작들이 줄을 이었고, 아비뇽 페스티벌(7월 5~25일)은 올리비에 파이(이하 연출)의 ‘햄릿’ 10부작, 티아고 로드리게즈의 ‘벚꽃동산’ 등 고전에 집중했다. 축제 측은 첫날 로드리게즈가 차기 예술감독으로 내정됐음을 알렸다.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6월 30일~7월 25일)이 단연 화두였다.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은 1948년, 그러니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3년 뒤에 시작되어 70년이 넘도록 프랑스 정상의 오페라 축제라는 타이틀을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안정적인 운영은 부유한 메세나들의 후원으로 비롯됐다. 큼직하게 조성된 대로와 널찍한 집들이 잘 말해주듯, 엑상프로방스는 여유롭고 클래식 문화가 잘 보존,발달했으며 이를 후원하는 메세나 문화가 튼튼하게 정착된 도시다. 잘 만든 오페라를 제작하고 선보이기에 아주 좋은 환경인 셈이다. 올해 프로그램 역시 사이먼 래틀/런던 심포니의 상주, 카이야 사리아호(Kaija Saariah)의 신작 ‘이노센스’ 세계 초연, 사이먼 스톤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배리 코스키의 ‘팔스타프’, 떠오르는 로테 드 비어의 ‘피가로의 결혼’ 등 매일 밤 화려한 제작진·출연진의 화제작들을 선보였다.
올 페스티벌은 지난 30년간 네덜란드 국립오페라를 국제무대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피에르 오디(Pierre Audi)가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을 맡은 뒤(2018~) 2번째 페스티벌이다. 남다른 감각의 오디가 성사시킨 새 프로덕션들은 페스티벌의 격을 한층 높였다.
폐쇄의 미학, ‘트리스탄과 이졸데’
7월 11일 저녁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오르는 프로방스 대극장을 찾았다. 구시가의 오래되고 작은 아르슈베셰 극장(Théâtre de l'Archevêché)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지어진 이곳은 2006년 도심 왼편 바깥에 세워진 1,370석 규모의 신생 오페라 극장이다. 이 일대는 2000년대 후반 조성된 문화 구역으로 다리우스 미요 음악원과 발레 프렐조카주 국립안무센터도 들어서 있다.
대극장 입구의 언덕길에는 줄이 길었다. 얼마 전부터 시행된 ‘보건 패스(Pass Sanitaire, 백신 접종 확인서/테스트 음성 확인서/코로나 완치 판정서 중 한 가지 의무 제시)’를 검사하기 위해서다. 덕분에 좌석 거리두기는 없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관객도 있었다.
청중들은 사이먼 래틀의 바그너, 또는 페스티벌 역사상 첫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한껏 들뜬 듯 조금 소란스러웠다. 전주곡이 시작되었음에도 관객들의 불평 어린 눈빛과 제지하는 쉿 소리는 긴장감을 와해하기 충분했다. 노련한 래틀은 트리스탄 코드의 불안감을 한껏 고조시키며 관객석을 잠재웠고, 결국 화음이 해결되며 막이 오를 때엔 관객들은 다행히, 숨을 죽이며 몰입했다.
막이 오르며 등장한 고층 빌딩 속 펜트하우스는 마치 극장 안이 아닌, 촬영된 장면인 것과 같은 착시를 일으켰다. 연출가 사이먼 스톤은 무대 높이의 절반 가량만 사용해 낮은 천장의 긴 실내 공간을 만들었고, 이러한 무대 밀도가 스크린과 비슷한 효과를 준 것이다. 전막은 갇힌 공간으로 연출됐다.(1막 펜트하우스, 2막 사무실, 3막 지하철) 원작 ‘배’의 폐쇄성을 낮은 천장의 실내, 즉 현대의 폐쇄적 공간에 투영한 듯하다. 커다란 창문만이 시간과 날씨의 변화를 알린다. 특히 1막에서 이졸데가 잠이 들자 바깥이 바다로 변하는 초현실적인 장면이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순식간에 들이닥친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는 1막 마지막 이중창에서 점점 번져나가는 빛, 거대하게 너울대는 파도, 함께 덮치는 래틀의 오케스트레이션은 압도적인 미장센을 만들었다.
2막에서는 마르케의 성을 패션 회사로 설정했다. 이졸데는 패션팀의 팀장, 시종들은 회사원들로 분했다. 트리스탄, 이졸데와 같은 옷을 입은 복제된 커플들이 등장해 한 공간 안에서 각자 오피스 불륜의 시작과 가정의 파국을 그린다. 그럼에도 함께라면 결국 행복할 것이라는 장밋빛 결론은 당시 유부녀였던 코지마를 향한 바그너의 열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또 이러한 불륜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포장하고 싶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준다.
1~2막에서 시종 브레게네역의 메조소프라노 제이미 바튼(Jamie Barton)은 옆머리를 밀고 반대쪽을 길게 늘어뜨린 머리스타일만큼이나 돋보이는 연기력으로 이졸데를 안정적으로 서포트했다. 1막에서 나이키 신발 상자에 사랑의 묘약을 천연덕스럽게 숨기는 조력자의 모습, 2막 패션회사에서 검정 원피스에 닥터마틴, 버건디 립으로 무장한 히스테릭한 패션 업계 종사자로 분해 이졸데에게 충고하는 모습 등 감초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음악적으로도 다소 높고 날카로운 메조인 바튼의 목소리가 낮고 풍부한 음량이 강점인 니나 스템(Nina Stemme, 이졸데 역)의 목소리와 좋은 합을 이루었다는 의견이다.
3막은 움직이는 지하철로 꾸며졌다. 1막에서 창문 밖의 움직임으로 배의 거대하고 느릿한 속도를 표현했다면 파리의 지하철을 그대로 옮겨온 3막은 보다 빠른 리듬으로 진행됐다. 흡사 트리스탄 역의 테너 스튜어트 스켈턴(Stuart Skelton)의 건재함을 증명하는 자리인 듯, 독백 형식의 단조로운 구성에서, 쓰러지고 통탄하며 이졸데를 기다리는 그의 모노드라마는 굉장히 흡인력 있었다. 소리가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갇힌 무대에서 풍부한 소리를 위해 얼마나 분투해야 했을지를 생각하면 그의 지구력은 더욱 대단한 것이었다.
마법 같은 세 단어, 결과는?
사실 공연을 리뷰하면서, 오늘은 어땠네, 어제는 저땠네, 하는 식의 일회성 리뷰는 지양한다. 그 공연이 지금 올라오는 어떠한 사회적 맥락이 있을 것이고, 만들어질 때와 공연하는 때의 간극을 메우려는 거시적인 시도가 있을 터인데 그것을 생채기 하나 났다고 비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날은 정말로 의아했다. 관객의 매너와, 오케스트라의 음악 모두 기대 이하였다.
정제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음악의 아름다움, 특히 협화에서 불협화를 미묘하게 넘나드는 바그너식 전조와, 그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듯한 신비로운 음색을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다. 더군다나 오랜만에 만난 래틀과 런던 심포니가 합을 맞춘 것만으로도 주목받을 일이고. 그러나 이날의 음악은 전체적으로는 무난한듯 했지만, 뜯어보면 삐걱인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연결점이 되어야 할 음악들, 예를 들어 1막의 바이올린 솔로와 목관 솔로들은 한 번에 깨끗하게 떨어진 적이 없었고, 2막 시작에서 이졸데가 마르케가 오고 있다는 호른 소리를 들으며 긴장해야 하는 호른 솔로와 3막의 감정을 끌고 가는 오보에(잉글리시 호른) 솔로 역시 그랬다. 관객의 매너도 또한 다를 바 없었다.
솔로 미스의 절반은 관객의 소란에서 나온 것이라 본다. 앞서 언급한 기침과 대화 소리가 ‘전주곡’의 도입을 망친 것처럼, 기침이 그립다는 코비드 시대의 비대면 연주 인터뷰들이 무색할 정도로, 이날은 정말 소음의 향연이었다. 흐름은 모일 만하면 깨졌다. 이졸데가 트리스탄에게 비장하게 독주를 권하고 자신도 죽을 결심을 하는 장면에서 터진 기침 퍼레이드나 트리스탄이 요동치며 죽어가는데 벨소리가 울린 건 두고두고 회자될 에피소드가 아닐까 싶다.
절반은 엑상프로방스에 온 런던심포니의 마음가짐에서 비롯한 것 같다. 이날의 음악은 그동안 본 래틀의 지휘와 정제된 런던심포니의 음반들에 비해서 한껏 늘어진 느낌이었다. 아마 남프랑스에 한 달 정도 상주해야 하니 공연으로 왔다기보다는 휴가처럼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오랜만에 맞은 여름 페스티벌이어서 마음이 느슨해진 것일 수도.
압축된 사이먼 스톤의 무대가 아니었다면 인터미션 포함 4시간이 넘는 이 무대는 와르르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전에 래틀이 다잡긴 하겠지만- 강렬한 가로 방향의 무대와 스튜어트 스켈톤의 모노드라마가 기억에 남을 뿐. 다행히 그들이 든든해 올해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 정상급 오페라 축제라는 명성에 맞지 않는 연주였음은 확실하다.
이후 엑상프로방스 공연을 사흘 내리 본 뒤, 이날의 원인이 여름밤, 래틀, 바그너. 이 마법 같은 키워드에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공연이 '여름밤'에 즐기는 ‘래틀’ 지휘의 ‘바그너’라는, 메세나들의 입맛을 가장 잘 자극하는 공연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오페라로서 감상보다는 어떠한 사교의 장을 위해 초청받았기 때문(혹은 개인적으로 그 비슷한 의도로 접근한 관객이 많았기 때문)에 산만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결론 말이다.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은 크고 작은 메세나들이 많고, 그들의 후원이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세상에 관람 매너가 좋은 메세나만 있으란 법은 없다. 이것이 이날 공연의 흐름을 바꾸었다고 본다. 그동안 엑상프로방스 실황 DVD로는 접할 수 없었던 페스티벌의 또 다른 면을 본 듯했다.
* 함께 관람한 카이야 사리아호의 '이노센스', 배리 코스키의 '팔스타프', 로테 드 비어의 '피가로의 결혼' 리뷰는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월간객석 8월호에 실린 기사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 - 화제에 화제를 거듭한 여름밤>의 원문입니다. 축약된 버전은 월간객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